아버지의 엽서

아버지는 딸 아이에게 엽서를 매주 보내신다. 나는 그 엽서를 훔쳐본다. 그리고 딸 아이에게 묻는다.

할아버지에게 답장은 안하니?
아니! 할아버지가 답장 안해도 된다고 했어.
나는 딸 아이에게 섭섭하다.

아버지의 글씨를 접하면 슬프다.
아버지는 녹내장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시고, 한 쪽 눈으로 글을 쓰신다. 그래서 글씨가 예전같지 않다.
아버지의 글씨에는 서글픈 역사가 있다.

아버지는 한글을 칠판으로 배우셨다. 글씨를 잘 보면 백묵과 칠판의 화해하지 못하는 긴장감이 있다. 아버지의 글은 날카롭고 피로하다.
아버지의 글씨를 흉내내고자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종이 위를 구르는 연필과 펜에는 백묵과 칠판의 긴장이 없었다.
해방되던 해에 아버지는 사범학교를 졸업하셨다. 열여덟에 선생이 되셨고, 광복된 나라에서 글을 가르쳐야 했다.

아버지는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려면, 판서가 고와야 한다며 한 자씩 정성으로 쓰셨다.
아버지는 예순여덟까지 51년을 삐약삐약 초등학생만 가르치셨다.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는 아버지는 이제 딸 아이에게 엽서를 보낸다.

그래서 묻는다.
할아버지에게 답장은 안하니?
아무 것도 모르는 딸 아이는
왜 자꾸 그걸 묻는거야? 한다.

나는 딸 아이의 대답에 자꾸 섭섭하다.

This Post Has 13 Comments

  1. 따뜻하지만가슴 아프네요.
    저렇게 좋은 할아버지는 둔 행운에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아직 여인님의 따님은 모를 거예요.
    제가.. 우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땅을 치며 그리워하듯이.. 아마도 따님도 그러겠지요..

    1. 여인

      그래도 앞에서는 귀엽게 잘합니다. 꼭 간이라도 빼줄 듯 하다가 답장이라도 쓰라면 아주 냉정해지더군요.

      녀석에겐 외할아버지는 이미 안계시고, 외할머니는 중풍으로 말씀조차 못하시니 반쪽의 사랑은 못받은 셈입니다.

  2. lamp; 은

    엽서보곤 울컥해서.. 목이 아프고 글썽거려져요..
    따님도 크고나서야 할아버지 마음을 알꺼에요.

    1. 여인

      모두들 뒤늦게 깨닫게 되지요. 아마 어느 날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가 어떤 크기였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3. 흰돌고래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엽서, 정말로 감동이에요. 많이 부럽기도 하고요. 개나리꽃나무를 주신다니…
    따님에게 ‘답장을 보내 드리면 할아버지께서 많이 기뻐하실텐데’ 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네요.

    1. 여인

      죽자고 답장 안하더군요. 작년부터 올 6월까지 미국에 가 있었는데… 이메일을 꽉꽉 재서 보내면 “응 나 잘지내고 있으니 걱정마.”
      딸랑 한 줄입니다. 흐이구! 키워서 뭐하나

    2. lamp; 은

      큭.
      제 유학시절을 보는 듯 해요.
      그땐 항공메일이었지만..^^
      아빠는 두세장 꼼꼼히 쓰시고 제 답장은 한장도 겨우겨우..-,-;

      그런데 따님이 할아버지께 죽자고 답장을 안하는 건 아닐꺼에요.
      애들 심리가 하고 싶다가도 옆에서 하라고 하면
      그냥 이유없이 하기싫어지는 때가 있으니 말이에요.
      우리집 소도 요즘 한창 사춘기라.. 정말 죽자고 말을 안들어요.

      내일 친정갈 때 아버지 좋아하시는
      모리나가 카라멜과 양갱사서 가야겠어요.
      딸은 키우면 이렇게 아버지 좋아하시는 것 사갑니다~ ^^

    3. 여인

      아마 자그마한 좋아하는 것 주고 더 큰 것을 빼앗아가는 것은 아닌지… ^^

    4. 흰돌고래

      전 아빠나 엄마에게는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께도 편지를 받아본 일이 없어서 그저 부럽기만 해요. T-T 전 반대로 항상 쓰는 쪽이에요ㅎㅎ
      어릴 적엔 더 많이 썼었는데 크고 나서는 많이 줄어들었지만요..ㅎ
      (아, 유치원에 다닐 때 부모님이 편지를 써주는게 숙제 였던 적은 있어서 한통은 받아 보았어요 ㅎㅎㅎ)

    5. 여인

      저도 없어서 딸내미가 부럽기만 한데, 녀석은 죽자고 답장을 안하네요.

      저도 편지는 많이 썼습니다. 국군장병 아저씨께 한 육개월동안 위문편지를 쓴 적이 있고, 대학다닐 때, 밤을 세워가며 좋아하는 여자친구에게 아무 의미없는 기나긴 편지도 썼고요. 하지만 부모님께 쓴 편지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ㅜㅜ

  4. 여인

    아버지도 저한테 섭섭했던 날들이 무척 많았겠지요? 하지만 아직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늦게 교감이 되셨는데, 얼마 후 기운이 빠지시고 시름시름 앓더군요. 그래서 왜 자꾸 아프시냐고 여쭈었더니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교감이라는 것이 매일 서류나 만지고 선생들과 부딪히는 일인데, 선생으로 정작 아이들과 지내지 못하니, 아이들이 보고 싶어 그런가 보다 하시더군요.
    아버지께선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 했으면서도 그 사랑이 지겹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때에서야 아버지가 정말로 선생이라는 것을 간신히 알았습니다.

    저한테는 무섭고, 호기심많고, 개구지고, 고집스럽고, 구두쇠며, 손잡고 뭘 가르쳐주시고, 귀찮고 한 존재지만, 아버지만큼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버지가 부럽습니다.

    1. lamp; 은

      시아버님의 유일한 유품으로 70년대 말부터의 아버님의 일기장이 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니 아버님의 일기를 읽기 전까지 남편은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질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참 지난 후, 힘든 일이 있었는데 그제서야 아! 우리아버지가 그래서 그렇게 하셨었구나.. 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도 보고싶다고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기를 보고 제가 느꼈던 시아버님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외로우셨었구나.였습니다.

    2. 여인

      저는 예전에 어머니가 쓰셨던 육아일기를 몰래 보관하고 있다가 향한테 걸려서 빼앗긴 적이 있는데…

      누군가의 일기를 보면, 모든 사람들의 내면은 몹시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이 잘돌아간다고 생각된 사람들도 고민도 있고, 시기심이나, 자신 만의 고유한 아픔들이 있는데 누구에겐가 펼쳐보일 수 없어서 자신의 세계 속에 기록한다는 것, 그것은 외로움의 무늬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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