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과 풍경

시집을 받았다. 아들의 이름을 빌어 그 시집을 받았다. 그리고 음미할 시간도 없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한편, 한편, 곱씹어가며 글을 적는 것이 보내 준 시인에 대한 도리겠으나, 백날을 곱씹은 들 본의를 알 수 있겠는가? 시인의 내적 체험의 순간들은 비교할 수 없이 독특하기 때문에 관심법을 지니지 않은 한, 그림자인 언어를 통하여 시인의 뜻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내 식으로 오해하고, 즐길 뿐인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시를 배웠다. 배워서 시를 쓴다는 것은 아니다. 읽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이렇게 시인이 난무하는 세상에서는 읽는다는 것이 쓰는 것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요할 수도 있다.

지금은 어떠한 지 모르겠으나, 학교에서 우향~ 우! 하면 오른쪽으로 도는 식으로 詩를 배웠다. 왼쪽은 용서되지 않았다. 詩에 심혼의 울림이 맥놀이쳐도, 읽는 자의 가슴의 떨림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교정에서 詩를 배웠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조국의 독립’이라는 일가의 의미로만 환유되는 학습, 느끼지 못한 채 외워야 하는 詩, 유신의 시대에는 모든 詩가 조국에 갇혀 있었다.

나는 그에게 시를 배웠다. 그의 시를 처음 대했을 때, 그는 아무도 아닌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떠도는 익명일 뿐이었다. 내가 그의 시에 부딪힐 때, 그의 시에는 어떠한 권위도, 추구해야 할 의미도 없었다. 그의 시를 읽었다. 시가 와서 부딪히는 대로…

나는 날마다 혹은 때때로 읽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습작에 불과한 시를 읽었다. 그것은 좋았고 시는 나의 시가 되었다.

이제 그의 시집을 받아 들고, 익명의 바다를 건너온 시인을 본다. 시인을 마주함으로써 나에게 자유롭던 시는 날개의 일부를 접어야 하는 숙명을 지닐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시가 나에게 말하는 단계에서 내가 말하는 2라운드에 접어들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긴장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읽은 시의 숫자도 문제려니와 시에 달리는 시평에 대해서는 오불관언, 내 식으로 읽어왔기에 분명 나의 이야기는 쌩뚱맞고, 시학적인 견고함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달라요. 즉 권위나 그런 것은 괄목해도 상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전문가적인 식견에 나는 탁월하다.


모든 예술에 있어서 우연은 인위의 해안에 맞닿아 있다. 시인조차도 우연을 말할 수 없다. 우연은 영감이라는 것으로,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득하게 다가와, 인위 속으로 스미며 말하여 질 뿐이다.

소름 돋도록 푸른
하늘 아래로
곤두박질쳐
낭자하게 흩뿌린 선혈
자갈밭에 반짝이는 아침

낮은 속삭임에 눈물이 솟구친다

잘가요 안녕히……

시의 제목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시는 막힘과 풀림을 보여준다. 독자는 시를 따라 하늘에서 땅으로 응시하게 됨으로써 그의 언어 속에 구속된다. 그것은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나 <잘가요 안녕히……>라고 시인은 우리를 풀어준다.

시의 다음은 읽는 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한 후 과연 행복했을까? 하는 질문의 답은 동화 속에 없듯이, 안녕히…… 의 다음은 전적으로 독자의 내적 체험에 달려 있을 뿐이다.

시인의 인위는 안녕히…… 속에 갇히고, 시와 우리는 우연의 바다를 마주한다.

씻김굿 같은 시인의 압운은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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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불교도다. 정직 자신은 모를 수도 있다. 아니 세상의 모든 시인은 어느 정도 불교도여야 한다. 사람들은 말하여 질 수 없는 것(不立文字)들을 말하려고 한다. 사랑이나 고독, 그리고 슬픔 등은, 영원히 말하여 질 수 없는 것.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말하고자 한다. 말은 하여도 거기에 가 닿지 못한다. 독자는 자기의 내적 체험 속에서 시인의 느낌을 굴절시킬 뿐이다. 하나의 풍경에 있어서도 그렇다. 정작 표현하고자 하면 모든 것이 아득하다. 그래서 시인과 시인이 아닌 사람이 있다. 시인은 불행하게도 아득한 것을 말하려 한다.

     달뜨는 산을 담은
     물가에 섰다.

     산은
     황소의 혀끝에서 부서지고

     물 속으로
     또 다른 황소가 걸어 들어간다.

<그림자>

한 폭의 한국화로 묵이 번져가는 이 시에서 불현듯 성우 경허선사가 생각난다. 어느 처사의 “소가 되려면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가 되어야지”라는 소리(公案)에 깨달음을 얻은 그의 열반송과 시인의 시는 닮아있다.

     마음의 달이 홀로 밝아
     달빛이 모든 것을 삼킨다
     빛과 경계가 함께 사라질 때
     다시 무엇이 있을까

(경허스님의 열반송)

즉, 그의 시에서 달(빛)과 그림자(경계)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어디가 물이고 소이며 산인지 아득한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인드라 망의 세계와 조응하고 있다. 어디가 본체이고 어디가 대상인지 가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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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 들어선 만큼, 이제 그의 심우도(尋牛圖)를 찾아가 보자. 아래의 단청이 퇴락한 새벽은 인식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무명의 짙은 안개를 헤치고 있다. 그것은 느리거나 숨가쁘며, 무의미하면서도 탐욕적이다가 수냐(空)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공즉시색의 아침을 맞이한다.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그대로 그림이 되는 새벽이었다.

     발끝이 보이지 않도록
     숨차게 기어오르는 물결 속에서
     세상은
     느릿느릿 움직이고

     바쁠 것도 없이 어슬렁대는
     떠돌이 개 한 마리
     문득
     박힌 듯 멈춰 서더니
     말라비틀어진 먹이를 물고
     그림 속을 빠져 나가
     자취를 감춘다

     순간
     세상은
     조금씩 수묵화 속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안개 낀 아침 풍경>

시인이 새벽으로 들어가자, 세상이 걸어 나왔다는 0.5초의 순간을 그린 이 시는, 1圖 심우(尋牛), 새벽을 찾아 나선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시인은 9圖 반본환원(返本還原),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세상의 풍경을 맞이한다. 이제 그에게는 저자거리로 나서는 입전수수(入廛垂手) 만 남은 것 같다. 돈오의 새벽은 가고 점수의 기나긴 하루가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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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도 촉급한 나의 여행에는 시인의 시를 다시 곱씹어 삼키는 지리한 수행이 더 남아있다. 결단코 그의 시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시는 이미 시인의 손을 벗어났다. 이것은 냉혹하고도 엄연한 현실이다. 내가 어떻게 읽든 시인은 침묵하라! 이제 당신의 손을 벗어 났노라!

아무 말도 않고
그냥
왼손을 쓱 내밀었다
손바닥에
바람이 살랑 올라앉는다

<변명>


詩人께 드리는 말씀

암묵적으로 나마 홀로 시집을 읽어줄 것을 부탁 받았음에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사과드리며, 함께 동의도 없이 시를 무단으로 제 블로그에 올린 점에 대해서도 깊은 용서 있으시길 빕니다.

미거한 제게 시집을 보내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요설과 망언으로 님의 글에 누를 끼친 점 해량하여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참고> 강이 산으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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