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꿈꾸며

포사의 난이 있은 이후 주나라의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춘추 열국이 일어나더니, 문강과 애강이 있은 연후에 오패가 쟁패했다. 그 후 공구가 있어 윤강을 세워 만대의 스승으로 문묘에서 흠향하더라.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하여 거짓봉화를 올린 결과, 봉건의 신뢰관계가 깨짐으로써 주공이 꿈꾸었던 이상국가 주는 와해되었다. 문강은 오빠와 동침을 하고 남편을 죽이는 등 패륜을 보여주었다. 패륜의 시절에 공자가 났다. 숙량흘이라는 늙고 비천한 하급무사가 야합(정식 혼례를 치르지 아니한 Love Affair)해서 나은 자식이나, 춘추를 필하고, 대화를 통하여 충서의 도를 세우고 인륜의 도를 세웠다. 그러나 그의 도는 세워지지 않았다. 그 후 춘추시대는 거하고, 전국의 군웅이 할거했고 제후들이 칭왕하기에 이르렀으며, 살육의 피냄새는 더욱 짙었다.

도덕과 윤리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또 법률은 삶의 다양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공자가 살던 그 시절이 지금보다 더 흉흉하고, 모든 권위는 부단히 부정되었던 시대이다. 도덕이 무엇인지도 윤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약육강식과 패권주의가 만연했다. 그것을 제어할 어떠한 제도도 마땅한 권위도 없었다.

전쟁은 기아와 참상을 불러일으켰으나, 마른 땅에 고랑을 파듯 타국의 건장한 피가 여기의 속살에 스미어 아기를 내놓았고, 아기들이 자라면 다른 곳으로 창을 들고 떠났다. 병과의 참상은 그러하되, 순리처럼, 강 가의 홀씨가 흘러 산에 민들레를 피우고, 산의 송화가루가 들에 솔을 피우듯, 피는 한 곳에 고이지 않고 말발굽을 따라 이 곳, 저 곳으로 번지고 혼효되었다. 그리고 지식인들이 병사와 말이 달린 길을 따라 또 어디론가로 갔다.

문무라 할 때, 무가 자연이라면 문은 인위다. 병사들의 기치가 삼엄하고, 움직임에 질서가 있을 때, 자연은 인위로 바뀌고 살륙의 강도는 더욱 치열해진다. 문은 군문에 종사하여, 군율을 세우고, 병과의 갯수를 헤아리고, 출사의 제문과 책문과 죽은 자의 조사에서 문은 자라났다. 그래서 무가 문을 앞선다. 따라서 문에는 피냄새가 어려있었다.

살벌했던 시절, 인륜과 도덕이 무너지기는 커녕, 있지도 않았던 시절, 인륜과 도덕을 지킨 것은 공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을이었다. 공자의 도는 아득했고, 또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제후와 공·경· 대부와 신진 엘리트의 것이었을 뿐이다.

마을은 자연과 인위의 경계이다. 그것이 촌락이든 유목민들의 천막이든 매 한가지다. 마을은 땅과 자연을 마주하고, 사람이 개별적일 수 없음을 가르친다. 그것이 윤리이며, 윤리는 처한 땅을 닮아 있다. 마을은 봄에 풀린 대지를 바라보듯 여인의 달거리를 바라보며, 고랑에 뿌려진 씨앗이 한가지 이듯, 여인이 품는 씨 또한 잡하지 않아야 했다. 그것이 생육과 번성에 서로 맞기 때문이다. 섭리가 거부될 때, 소출은 줄고, 남자들은 마을을 떠난다.

마을은 생산 단위이고 나라는 소비적이다. 마을은 독특한 문화와 윤리로 땅을 갈고, 짐승을 키워 먹고 마시며, 남는 것은 다른 지역과 바꾸었다. 딸들을 다른 곳에 보내고, 먼 마을의 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식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뿌리를 내리고, 마을과 마을은 이어지게 되었다.

도덕은 땅과 같이 두텁고, 율법은 모래바람과 같이 건조하다.

공맹이 국가와 윤강에 대해서 떠든 것의 핵심은 결국 민의 함포고복에 불과하고, 영원한 아나키스트 노자는 소국과민으로 마을을 찬양했다. 치국의 달도인 수공평장 또한 국가가 무엇을 하기 보다 놔두면 마을과 백성이 자가발전하여 절로 다스려짐을 말한다.

그리하여 전란이 방역을 휩쓸고, 패륜의 피가 열국에 흘러넘쳐도, 마을은 여리디 여린 생명과 윤리를 지켜갔다. 이것이 고대의 마을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의 원주민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혼인법칙이 현대수학에 의해서나 풀이가 될 수 있는 고도의 질서를 가진 매트릭스에 의한다는 것을 알았다. 원주민의 친족과 결혼체계는 도덕과 윤리를 기반으로 하기보다는, 언어와 같이 자의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씨족 간 혼인이라는 교환에 의하여 물적, 혈연적 결합만이 생존과 번창이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친족체계는 자연에 대한 문화이며, 혼인의 매트릭스 구조가 복잡하면 할수록 매트릭스는 보다 많은 씨족을 아우르고 환경에 대한 적응력을 확대해 나갈 수가 있다.

그는 원시상태에 머물고 있는 문화에 대하여 그것이 야만이나 미개가 아니라, 그들이 지닌 시스템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변화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정합도가 높고 우월했기에 그들의 사회는 정체했으며, 현대의 문명사회는 시스템이 환경에 적응하기에는 느슨하고 나약했기에 모순 속에서 들끓었기 때문에 발전했다는 역설을 토했다.

근친상간이 보편적 도덕율에 의하여 금제된 것이 아니라, 매트릭스 구조 속에서 씨족 내의 여자를 소비할 경우, 교환의 법칙이 와해되어 생존을 위한 물자의 교환이 차단될 뿐 아니라, 타 씨족의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종족이 멸절되고 만다는 자연율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혼은 잉여와 부족을 상호 해소하고, 공존해 나가기 위한 씨족 간의 약속체계에 다름이 아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민속학적 연구를 보면, 도덕과 윤리는 씨족이라는 마을 단위, 마을과 마을의 자의적 약속체계이며, 그 약속체계야 말로 마을의 구성원의 생존의 조건이자, 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존속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이와 같이 장황하게 떠들고 있는 이유는 이 시대를 떠돌고 있는 성 모럴의 변태적이고도 보편적인 타락과 학교 내 왕따와 일진회, 유영철의 엽기적 살해사건, 사회적 불신과 그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물욕의 깊이와 광기의 쾌락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이 나라를 보면서, 삼강오륜을 부르짖고, 여호와와 예수를 찾고, 목탁소리를 높이면 과연 구제가 가능한 것인가 하는 회의 속에 잦아들기 때문이다.

물론 나 스스로도 이 시대의 엽기적 광란 속에서 독야청청하노라고 할 수는 없다. 또 이러한 현상이 인류사의 보편적 현상으로 기존의 도덕과 윤리의 패러다임 축이 변화하고 있는 중인지, 아니면 전 지구의 소돔과 고모라화의 끝에 아마겟돈의 그 날을 맞이하는 것인지, 아니면 후천개벽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 한하여 볼 때, 이 시대의 타락은 전통과 인륜의 담지체인 마을의 해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보여진다.

로빈슨 크루소에게 개인의 도덕은 요구되지 아니한다. 가족에게 도덕은 친친의 수준일 뿐이다. 도덕은 담벼락을 넘어설 때 기능하며, 사회적 선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사회의 광범위한 불특정의 다수 속에서 기능하기에는 사회는 너무 비대하고 이해에 얼룩져 있다. 따라서 마을이라는 일차적 사회단위에서 윤리와 도덕은 산출되고 작동되며 습득되어져야 한다, 마을은 인륜이 배양되기 좋은 토양을 지닌다. 땅을 중심으로 이웃과 오래된 친구와 지인, 밥숟가락까지 빌어쓰는 이해의 토양에서 용서와 화해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며, 그 마을에서 용납되지 아니한 자들은 도시나 먼 곳으로 떠나고, 용납할 만한 자들은 마을에 흡수되면서 인륜의 자정적 신진대사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마을은 농촌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오래된 동네에서도 기능할 수 있다.

마을은 생각보다 견고해서 일제의 강점기의 수탈에도 해체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동란이 한차례 이 땅을 휩쓸더니 와해의 조짐을 보였고, 새마을 운동으로 균열되더니, 이제는 흔적도 없다. 마을이 있으되, 아이의 울음소리도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없는 죽음의 적막 끝에 달린 풍경마냥 모색으로 접어드는 사멸의 이름일 뿐이다.

도시로 유입된 사람들은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빼듯, 도시의 동네를 조각내었다. 농촌의 붕괴는 결국 도시를 사람이 사는 곳에서 돈으로 환가되는 가치의 세계로 만들고, 인적 결합보다 개인의 이익추구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결국 도시는 타자화된 돈에 굶주린 야수들이 어슬렁거리고, 제어되지 못하는 광란의 불야성으로 바뀌는 것이다. 어떠한 개인도, 가족도, 윤리도, 율법도 도시의 꿈틀대는 야욕과 바닥 모르는 타락으로 부터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저 머나먼 마을로 부터 봄소식 마냥 올 것만 같다,

사람들이 함께 사는 마을을 꿈꾸며, 음울한 몽상으로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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