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호수

이웃의 포스트에서 원천유원지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을 보며 나의 기억의 조각을 맞추어 보려 했으나, 그 사진들은 한 장만 빼고 너무도 생소했다. 내가 그 곳을 갔던 때가 1978년의 봄이니, 세월의 탓일 수도 있다. 그 생소함은 그 곳에 대한 추억이 다 지워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그 때문에 황급히 이 글을 쓰게 했다.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77년 가을부터 78년 봄까지,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몹시 아팠고, 그 저수지에 이를 때까지만 해도, 77년 겨울의 혹독한 추위로 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수원에 이르게 된 것은, 어느 날 아침, 그녀가 “우리 한번 멀리 가 볼까?”하고 물었다. 멀리 떠나기 위하여 우리는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손에 쥐어진 버스표란 고속버스가 갈 수 있는 곳 중 가장 가까운 수원이었다.

불과 몇 십 분이면 도달하게 될 수원이었지만, 아주 멀리 가는 것처럼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스 안은 따스했다. 수원에 도착하면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아무 계획도 없었다. 잠깐 사이에 버스는 수원외곽에 우리를 내려놓았고, 터미널을 나와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오르던 길을 따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원천유원지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였고, 아주대학교를 다니던 형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라 유원지 쪽으로 가보자고 했다.

공기총으로 인형을 쏘아 맞추거나, 사람들의 손때가 까맣게 묻은 화살을 쏜다던지 파란색 칠이 된 녹슨 허니문카 등을 생각하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매표소와 멈추어선 허니문카 밖에는 없었다. 비닐막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황량한 유원지 입구 옆의 뚝길로 들어섰다.

뚝길을 따라 걸었다. 저수지의 물은 찰랑찰랑 불어 올랐고, 바람이 불어 물결들이 봄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물결을 따라 저수지 맞은편을 보니, 움이 트는 듯 누런 색 사이로 푸른색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비가 온 듯, 날은 맑았지만 뚝길 이쪽저쪽에 물웅덩이가 있었고, 그 사이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새싹을 보다가 웅덩이 속에 뭔가 곰실거리는 것을 보았다. 올챙이들이었다. 아니 올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 부는 바람에 휘날리듯 그것들은 와하며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녔다. 한동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올챙이들을 보았다기 보다, 웅덩이에 비친 하늘과 나의 반쪽 눈, 그리고 나의 머리 뒤에서 웅덩이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 그런 것들을 보았다.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바닥이 하염없이 깊어서 공허하고 슬펐다. 그 공허한 밑바닥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기에 가슴이 뻐근했다.

“뭐봐?”

“……”

“어머! 올챙이들이네.”

“정말 봄이 오는 모양이야.”

한마디 한마디 그녀에게 말을 토해낼 때마다, 처음으로 여자를 만난 수줍은 소년처럼 마냥 힘들었고, 그녀가 멀게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차오를 때마다 지난 겨울의 추위가 몸 속에서 옴실거렸다. 그녀는 내 몸 속의 추위를 감지한 듯 움칫거리며 침묵 뒤로 밀려나곤 했다.

가눌 길 없는 침묵을 덜어내기 위하여 다시 저수지 저편으로 걸었다. 저수지의 주변 구릉 곁에는 아직 찬바람 속에 은사시나무가 햇빛을 받아 은빛의 몸체와 가지를 하얗게 펼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가련하면서도 뚜렷하여 오히려 의젓했다.

그런 풍경을 보면서 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주 단순한 말이라도 좋았다.

가령 “나는 한번도 너를 사랑하거나 좋아하지 않았어….”라고 시작해도 좋았다. 아니면 “왜 다시 날 만날 생각을 했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뚝길을 거닐면서, 땅 위에 스민 빗물이 햇볕에 타오르며 뿜어내는 흙냄새를 맡았다. 바람은 찼지만 대기나 부푼 흙 속에 응결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혹은 질척이는 웅덩이를 피할 수 있도록 잡아주었던 그녀의 손끝에서 열기가 내 몸 속으로 흘러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누구의 손바닥에서인지 땀이 촉촉이 배어났지만, 잡았던 손을 놓지는 않았다.

많이 아팠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먼길을 걸었고, 좁은 여인숙에서 딱딱하게 굳은 발을 아랫목에 깔고 문풍지가 밤새도록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방바닥의 열기에 땀을 흘렸고, 방 안에 감돌던 냉기는 다시 뼛속으로 스미며 몇 번이고 깼고 다시 혼절하듯 잠에 들곤했다. 통행금지가 끝난 새벽이면 밤중에 하얗게 오른 서리를 밟으며 트럭이나 차들이 하얀 김을 뿜으며 어디론가 달려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갈증에 주전자를 들어 물을 들이켰다. 그러면 물에서는 땀 냄새와 같은 비릿한 쉰 냄새가 났다. 그리고 아침이면 꽁꽁 언 여인숙 마당의 수도꼭지를 틀어 세수를 하고 또 걸었다.

아침이면 길은 겨울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피어올랐고, 저녁이면 길의 끝을 찾을 수 없어서 아득했다. 모든 것을 하염없이 어디론가 떠나보내면서도 길은 고집스럽게 늘 거기에 있었고, 세상의 모든 길은 길에 이어져 있었다. 그런 길과 들은 시간에 따라 무수한 색으로 변하고 참새들이 날고, 마른 논에 피어오르는 연기 등으로 감싸이기도 했지만, 황량했다.

하루 종일 하는 말이라곤 “짜장면 주세요.”, “얼마죠?”, “방 있어요?”에 불과했지만, 머릿 속에는 혀가 자라나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혀는 “씨팔”, “빌어먹을….” 등등의 것들로 잔잔해진 가슴을 흔들어대곤 했다. 그해 겨울 나를 지배하고 있던 병이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분노와 증오, 그런 것이었다.

며칠 동안의 산보의 끝에 집으로 돌아왔고, 겨울방학 내내 방 안에 틀어박혀 그토록 고요하던 일상이 어디서 부터 어긋났는가를 생각했다.

여자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니었다.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게을렀고, 자신의 틀에서 한치도 벗어날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와 나의 주변에 있던 모두가 다쳤다. 그 모두 속에 나도 있었던 만큼 나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그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늘 아팠다.

도보여행을 갔다 와서 방학이 다가도록 누구에게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여자 친구로 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너를 정말 몰랐어. 그렇지만 기다렸어…. 언젠가는 네가 날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네가 날 좋아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항상 그렇듯 성냥개비를 테이블 위에 쌓아올리며, 나를 보지 않고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넌 알잖아? 내가 외롭고 널 필요로 했다는 걸…. 그런데 넌 늘 다른 곳에 있었어. 그리고 내가 너의 여자라는 것을 한 번도 느끼도록 해주지 않았어.”

가슴 속을 찌르고 드는 그녀의 비난에 대하여 나는 아무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방학동안 너의 전화를 기다렸어…. 네가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난 알고 싶었어.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며, 네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지… 그런 것들을. 그러나 너는 한 번도 전화를 안했어.”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 것인가 생각했다. 아마 그때 나는 그런 말을 하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너는 너무 아름다워서 네 주위에는 늘 남자들이 있었고, 단 한 번도 네가 외롭다거나 날 필요로 하는지 몰랐다. 진심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네가 한 말들조차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지난 가을에 있었던 그 고약한 일련의 사건들이 부끄러워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만약 네가 그 사건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해서 벌어진 일들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너는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니라 너다. “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 웅성거림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을 때, 그녀는 머리를 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결국 알았어. 현수가 알려주더군.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고…. 너와 헤어졌던 그 여자.”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리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확신에 넘치고 있었고 단호했다.

“그래서 결심했어.
널 놓아주기로…”

그녀는 말을 마치고 까페를 나섰고,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곤 합정동 로터리에서 그녀가 버스를 타고 떠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을 뿐이다.

현란한 수사학적인 포장지에 둘러싸인 결별선언과 함께 나는 그렇게 걷어차였던 것이다.

버스가 겨울의 끝에 엉켜있는 빛의 소실점으로 사라질 즈음에, 좀 비겁하긴 하지만, 더 이상 여자를 만나지도 번거롭지도 말자고 결심했다. 어린 날의 엉성한 축제는 그만 끝나버린 것이라고, 이제는 아주 심심하지만 고요한 예전의 두꺼운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가자고 결심했다. 아니면 여자를 만나더라도 좋아한다거나 사랑하는 일없이 육체의 정염에 따르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은 사이비와 같은 사랑놀음의 타락으로 부터 구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가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불행하게도 오래 전에 알았던 한 여자가 되어 있었고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다.

개학이 되었고 나는 조용히 수업이나 듣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거나, 바닥이 찬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기어들어가 티브이를 보았다.

“목련이 피었네!” 그녀가 소리쳤다.

마을은 저수지 물이 끝나는 곳에 발목을 담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물이 길까지 차오를 것처럼 마을은 낮았고, 집 몇채가 서로 이웃하고 있었다. 목련나무는 마을보다 높았고, 햇빛을 받아 하얗게 마을을 밝히고 있는 것 같았다. 목련의 하얀 빛은 싸늘해서, 목련이 필 즈음의 바람은 차가웠다.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고, 응달을 피하여 빛이 드는 쪽으로 걸었다.

마을을 벗어날 즈음에 그녀의 손을 놓았고, 어디 쯤에서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유원지의 끝에 가면 찻집이 있을 것이며, 거기에서 그녀를 위해서 더 이상 나 같은 놈을 만나지 말라고, 네가 나한테 전화를 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제발 저수지의 입구에 따스한 찻집이 있기를 빌었다.

마침내 저수지의 끝에 다다랐다. 거기서는 유원지와 허니문 카가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처럼 아늑해 보였고, 저수지에는 봄 하늘이 꽉 차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봄빛에 일렁이는 잔물결에 눈이 부셨다.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비목이었을 것이다.

낮은 구릉 나무 그늘 아래에서 노래는 흘러나왔는데, 봄빛과 저수지와 차가운 바람, 이런 것들이 얼마나 고즈넉하며 뿌듯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녀가 내 팔을 안았다.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고, 샴푸냄새가 났다.

아득하여 약간 어지러웠다.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녹슨 시간들이 빛과 향기 속에 용해되어 다시 선율 속에 제자리를 잡는 것만 같았다. 하늘을 보았다. 너무 하염없어서 어디가 그 끝인지 알 수 없었고, 파란색에 눈이 시려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한쪽 어깨를 잡아 내 가슴 깊숙이 그녀를 끌어당겼고, 내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사내의 노래는 끝났다. 갈채를 보내고 싶었지만, 우리를 둘러싼 고요를 깨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 한곡만 더 불러주었으면….” 그녀가 내 품에서 속삭였다.

왜 사월이었을까? 왜 사월을 잔인하다고 했을까? 내 가슴 속에서 참새처럼 떨고 있는 이 여자에게 나는 오늘,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랑할 수 없는 놈을 만나느니, 형편없는 자식을 만나든 좋은 남자를 만나든 최소한 남으로 부터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나는 날아가고자 하는 허무하고도 집요한 열망에 복종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나에게서 떠났던 작년 여름, 그녀가 이미 알았던 것이 아닌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아무리 외롭고 남자가 필요했더라도 나를 다시 찾은 것은 잘못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네가 알듯 나는 형편없는 놈이며, 외로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런 놈이고, 한번도 누구를 그리워하거나 애착을 갖지 못했던 놈이라는 걸 잘 알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늘 그랬던 것이 아닌가? 뭔가를 말하려하면 늘 내가 하려던 말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그리고 낱말들이 나를 따돌리며, 그 피상적이고도 현란함 때문에 가슴이 막혀 숨조차 쉬지 못할 것 같은 생각 때문에 높은 곳으로 올라가 비명을 지르고 싶었던 그 나날들이 기억났다.

말로서 내가 세상을 건너 저들의 가슴에 가 닿는 방법을 몰랐다. 그러나 그녀를 가슴에 안으니 이처럼 뿌듯한 데, 헤어지려 하니 너무 허전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만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이미 내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뚝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이러저런 이야기를 했고, 웅덩이를 깡충 건너뛰면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저수지의 맞은 편까지의 길이 아주 멀어서 유원지의 끝에 다다랐을 때, 젊음과 장년의 때를 지나 노년에 이르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와 헤어졌을 때, 더 이상 삶이란 것이 남지 않고 먼지처럼 사라져버리기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넓어보였던 저수지는 그만 끝이 났고, 유원지의 한쪽 구석에는 기다렸다는 듯 찻집이 있었다.

“추워! 들어가서 우리 따뜻한 커피나 한잔 해.”

찻집에 들어가자 그녀는 화장실이 필요했는지,

“커피 뜨거운 걸로…….”하고 자리를 떴다.

창 밖에는 유원지의 현수막이 바람을 받아 퍼덕퍼덕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따스한 물잔을 손아귀에 꽉 쥐고 겨울의 황량했던 길들을 생각했다. 새벽에 달려가던 차들은 결국 어디에 가 닿으려고 그토록 치열하게 달렸던 것일까? 거기에는 무엇이 있길래? 달려간 그들이 만나는 것은 무엇이길래 그렇게 허겁지겁 졸음을 쫓으며 달려간 것이지?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고, 만나는 것은 또 다른 불행한 오늘과 좀 나을 것으로 기대되는 내일쯤, 그 맥 빠지고 빈곤한 것들이 아닐까?

다시 아팠다. 걷잡을 수 없이 피로했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말하고 떠나야 했다.

그녀가 자리로 돌아왔고, 나는 오랫동안 침묵에 빠져있었다. 침울하게 앉아 있자 걱정이 되었는지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

“아니 좀 피로해서….”

나는 아주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너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은 알지? 아니 그동안 미워했을지 몰라.”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인 후, 고개를 푹 숙였다.

“좋아하지만 말이야….
조금 더 나가서, 아주 조금 더 나가서 말이야…
널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잠깐!
더 말하지 마. 내가 말할 테니….”

내 말을 멈추게 하고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창 밖에는 오후가 여물어 황금빛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여전히 바람이 불었다.

“내가 왜 다시 네게 돌아왔는지 알아?”

“……”

“어느 날인가 잠을 자는 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어. 그건 너였어.
너의 얼굴은 몹시 초췌했고 피로해보였어. 그런데 네가 나를 보고 웃었어.
나는 그 웃음에 깜짝 놀라 깨어났지.”

“그런데?”

“오래 생각했어. 네가 날 좋아할지는 몰라도, 사랑하거나 하는 유치한 짓거리를 못할 것은 나도 잘 알아.
그러나 나는 네게 돌아왔어. 몹시 불안한 느낌으로, 조심스럽게, 아니면 뻔뻔스럽게 자존심마저 벗어던지고 말이야.
넌 정말 나쁜 놈이야.”

“……”

“내가 널 정말로 미워했다는 것 알아? 네가 죽어버렸으면 했던 적도 있어.”

“그런데 왜 다시….”

“너는 아파. 나는 그것을 치유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어디가 아픈데…?”

“네가 아까 말했잖아. 좋아하긴 하는데, 사랑할 수는 없다고….”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고, 그 웃음 가운데로 부터 따뜻한 것, 아주 오래 전에 알았던 부드럽고 차분한 것들이 나에게 전해져 왔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제 네가 내 곁을 떠나고 말고는 네 자유야. 그것이 오늘이던, 아니면 수십 년이 지난 후가 되었던 말이야.
네가 내 곁에 있을 동안 안 떠날 생각이야. 좋아하던 사랑하던 간에 그것은 네 자유고, 아무 상관 않겠어.
그러나 가끔은 말이야…. 오늘처럼 날 꼭 껴안아 줘. 이 나쁜 놈아!”

아마 그때 나는 치유되었거나 구원을 얻었을지 모른다.

그해의 추웠던 겨울은 가버렸다. 친구들이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 학교에 가서도 외롭지 않았고, 머릿속의 혀가 자기 멋대로 지껄이지 않았다. 심심하면 새벽 두시에도 그녀에게 전화를 했고, 한밤을 꼬박 새며 그녀에게 몇 장씩 되는 편지를 썼다. 산보를 하거나 노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고, 오래 전부터 친구였던 침묵 속으로 다시 내려갈 수도 있었다. 우리는 정말로 멀리 놀러가기도 했는데, 우리가 함께 가장 멀리 간 곳은 강촌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원천유원지에는 다시 가 보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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