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xmmxix 아말피에서

드디어 아말피로 간다. 열아홉살의 열병이 사그라 들던 스무살에 우연하게 ‘지상의 양식’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라가 가난하여 해외여행 자유화를 할 수 없었던 그때, 완행열차와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초라한 소읍과 낡은 도시로 옮겨가며 그 책을 읽었다.

소렌토로의 해안도로 옆에 있는 저택 1‘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노래는 못사는 소렌토로를 떠난 이웃 친척들에게 편지를 부칠 우체국이 없어서 지어진 노래라고 한다.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던 그때 나에게, 아말피란 북아프리카나 중동의 이정표 조차 없는 어느 곳. 혹은 앙드레 지드가 여행 중에 지명을 잊어 아말피라고 하자고 접어 둔 갈피이거나, 차라리 상상의 지점이었다. 세상에 없을 것 같아서 더욱 가고 싶었다. 얼마 전에야 나폴리에서 소렌토를 지나 소렌토 반도의 살레르노까지 이어지는 바닷가 높은 해안도로 아래, 바위 틈에 서식하고 있는 마을들이 아말피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매료된 것은 무지 탓이다. 알았다면 매료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말피 공국의 항구 중 하나였던 포지타노

짙푸른 지중해의 높은 벼랑 위에 도로가 바다를 내려다보며 달리고 있고, 푸른 색칠을 한 창가에는 갖가지 색으로 꽃들이 자란다. 벼랑 위에 지어진 탓에 모든 집들과 상점들의 문은 도로를 면하고 바다 쪽으로 창문이 열린다.

포지타노 마을 도로

햇빛을 피할 수 없어서 온 동네가 빛으로 술렁대는 하오, 마을에 깃든 여행자들은 상점의 차일 그늘 밑에서 맥주를 마시거나, 헐거운 아마포로 지은 옷에 샌들을 신고 바닷가로 갈 수도 있다. 10월이지만, 지중해의 바다는 미적지근하다. 마을의 가장 낮은 곳인 해변에 서서 고개를 돌리면, 파스텔 상자를 연 것 같은 색으로 차곡차곡 그려진 마을이 보인다.

그 마을이 포지타노다.

월요일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과 목요일도 도무지 생각날 것 같지 않는 마을. 금요일 오후에 시작한 한 주는 샌들을 신고 휘파람을 불며 토요일과 일요일을 지나더니 금요일 저녁으로 다시 이어지는 느긋한 풍경이 불현듯 슬퍼졌다. 주어진 휴일을 다 써버린 여행자인 나는, 첫 입맞춤 때 기쁨 끝에 슬픔을 느낀 어린 아이처럼 포지타노를 천천히 누볐다.

포지타노 해변, 자갈해변이다.
Steps of Positano 듣기…

 

한낮의 기온은 27℃, 태양은 작열한다. 점심을 해안의 절벽에 있는 식당의 차양 아래에서 먹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부두에서 배를 기다린다.  

오후 3시 30분 아말피로 가는 배가 출항했다.

포지타노에서 부터 해안의 암벽 사이 사이로 박혀있는 마을과 마을들. 바다와 산으로 막힌 마을들은 자그마해서 외로워 보였다. 생활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바다 위 절벽과 바위 틈서리에 층층이 집과 집을 쌓고 서로 이어 바닷 쪽으로 창을 내어놓고 살게 하는지, 아득할 뿐이었다. 

포지타노에서 출항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바다는 닫힌다.   

마레 클라우숨(Mare Clausum : 닫힌 바다)은 고대부터 지중해가 폐쇄되는 시기를 말한다. 11월12일부터 겨울 폭풍이 시작되고 거친 날씨가 계속되면서 하늘의 별자리가 보이지 않는 관계로 항해를 금지했다고 한다. 이듬 해 3월 10일이 되어서야 바다가 다시 열렸다. 지금도 11월이 되면 배들은 내항에 닻을 내리고 여객터미널의 매표소도 문을 닫는다고 한다.2여행에서 돌아오고, 11월 중순이 되자 날씨는 급변했고 이탈리아 전역이 침수가 될 정도로 비가 내렸다.

해양강국인 로마는 영해의 개념이 없었다. 모든 바다는 공해(公海)로 마레 리베룸(Mare Liberum : 자유의 바다)이었다. 특히 지중해는 어느 나라의 소유도 아닌 ‘우리의 바다'(Mare Nostrum)였다. 영해(領海)를 뜻하는 마레 클라우숨은 영국에서 비롯한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영국 근해에서 조업을 하자 영국은 바다에도 주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네델란드는 당연히 마레 리베룸을 주장했지만, 결국 강자의 논리에 따라 세상의 모든 바다는 닫히게 된다.

지중해는 닫힐 때가 아직 먼 듯, 파도는 잔잔하다. 뱃전의 바람은 더위를 식혀주기에 적당했다.

오후 4시, 아말피에 하선.

아말피 항구. 여기에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과 레반트로 출항했다

아말피 해안 마을들의 중심이자, 아말피 공국의 수도였다. 왕가와 가문의 문장이 수놓인 깃발을 휘날리며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과 레반트 지역으로 출항한 항구였다. 9세기에서 12세기까지 지중해 해안 상권을 잡고 있었다. 당시에는 콘스탄티노플, 다마스커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북아프리카, 그리스 등 지중해 모든 곳에 아말피 상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1세기가 되면서 북해를 떠돌던 노르만의 지배상태에 접어들고, 12세기에는 노르만과 피사의 약탈로 아말피의 해상 상권은 베네치아, 피사, 제노아로 넘어가고 만다. 14세기에는 해일로 마을들이 파괴되면서 옛 영광은 사라지고 조그만 어촌으로 연명하게 된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영국 상류층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게 된다. 지금도 아말피의 호텔의 경우 시즌의 경우 일박에 수백만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아말피에서 산 위로 올라가면 라벨로가 있다. 아말피의 귀족들이 살던 곳으로, 바그너가 그의 최후의 오페라 ‘파르지팔’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것을 기념하여 매년 음악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아말피는 유럽 최초로 나침판을 제작했고, 종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아말피의 두오모 성당

아말피에서도 성당이 두오모다. 두오모란 한 나라에 하나 밖에 없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각 도시마다 두오모가 있다는 것은 그 도시들이 왕국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아말피도 공국(Repubblica di Amalfi)이었다.

이 두오모에는 베드로의 동생이자 열두제자의 한 사람인 안드레아의 유해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유해를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천년동안 지어졌다고 하는데, 낡은 성당과 현재의 성당, 그리고 지하에 두 성당을 연결하는 기도실과 납골묘 같은 곳이 있다. 지하는 폐소침묵증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다. 밖에서 스며 든 빛이 어둠 위에 내려앉았고, 빛에 쫓겨 구석으로 물러 난 어둠의 옆구리를 성소를 밝힌 불빛이 찔렀다. 어둡지는 않았지만, 벽과 박공과 바닥은 밀려난 어둠으로 흥건했다. 성모상 아래로는 순례 온 수녀가 무릎을 꿇고 묵주를 입술에 댄 채 기도를 하고 있다. 나는 잠시 지하의 냉기 속에서 숨을 고르며 묵상과 같은 침묵에 젖어있었다.

두오모 성당의 지하

밖으로 나와 아말피의 좁은 골목을 걸었다.

아말피에서(밤)

   알지 못할 그 어떤 사랑을
   기다리는 밤들이 있다.
   바다를 굽어보는 조그만 방, 너무나 밝은 달빛이 잠을 깨웠다. 바다 위에 비치는 달빛이.  3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62쪽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아말피의 밤을 노래하지만, 늦은 오후에 온 나는 날이 저물기 전에 이 곳을 떠나야 한다.

아말피의 좁아터진 골목

사람들로 꽉 들어찬 좁은 골목에서 바라 본 아말피는 읍면동 단위도 안될 조그만 마을4아말피 인구 5,353명, 서산시 해미면 8,773명이다. 갑줄을 출렁이는 십자군 기사와 말, 병사들이 머물기에는 좁아터졌고, 비잔틴의 주교와 레반트에서 온 상인들이 묵을 자리도 없어보였다. 유리병이 예뻐서 조그만 리몬첼로를 두 병 샀다.

그리고 5시 50분. 다시 배를 타고 살레르노로 간다. 지중해에 노을이 진다. 해안 마을들 위로 붉은 기운이 서리더니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해가 지는 곶과 곶(岬) 사이에 아말피의 마을들이 이불을 덮고 저녁으로 들어설 것이다

살레르노에 배가 접안할 때, 항구에 불빛이 하나 둘 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말피 해안의 중심인 살레르노

201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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