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x-xmmxix 로마 배회

아침에 일어나니 갈 곳이 막연하다. 그래서 우선 내일 남부 투어의 집합장소인 산타마리아 델라 마조레 성당으로 가 본다. 이 성당 부근에서 라오콘이 나왔다고 한다. 다음은 테르미니역 옆에 있는 공화국 광장을 간다.

공화국 광장

광장의 건너편, 마리아 델라 안젤라 성당으로 간다. 로마 대욕장을 고쳐 성당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폐허를 통해 들어가다보니 마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지만, 안은 넓고 천장의 조명 탓에 현대에 지은 건물같다. 밖으로 나오면서 보니 검붉게 산화시킨 철문의 부조(浮彫 보다 半彫가 맞다)가 인상적이다.

성당의 정문, 대욕장의 입구를 살려 문을 만든 것 같다

디오클레치아노 로마국립박물관으로 간다. 이 또한 로마 대욕장 ‘테르메 디오클레치아노’에 세워졌다고 한다. 로마의 중앙역인 테르미니역의 이름도 욕장(Thermae)에서 왔다고 한다. 대욕장이 테르미니역까지 였다고 하니 규모가 엄청나다.(120.000m²이니 바티칸의 1/4 규모다)

이 디아클레치아노가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44~311년)다. 로마의 쇠퇴를 막아보고자 동서방에 각각 정제(正帝, Augustus)와 부제(副帝, Caeser)를 두는 사두정치(Tetrarchia) 체제를 만들었다. 당시 그는 동방의 정제였으며, 서방의 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였다.

또 기독교를 강력하게 탄압(305~309년)한 것으로 유명한 황제다. 303년 2월 그는 기독교 탄압을 위한 칙령을 발표하고 기독교 교회와 성물, 성전을 파괴하고 기독교인의 모임을 불허한다고 공표했다. 이에 따라 ‘대박해시대’가 시작된다. 기독교 측의 자료에 의하면 이 기간동안 약 3,000 ~ 3,500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일부 연구자는 순교자가 너무 적다고 하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의 글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육신으로 부터 당장이라도 풀려나 소멸될 수 있는 해탈의 각오가 되어 있는 영혼은 얼마나 칭송할 만한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각오는 반드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순간의 결단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어야지, 그리스도교처럼 법관의 명령도 무시하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오는 것이면 안된다. 심사숙고해야 하며, 품위가 있어야 하며, 타인에게 신념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들처럼 영웅적, 극적 제스처를 써서는 아니된다.

이 글을 보면, 기독교인들의 순교(죽음)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현제 아우렐리우스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대박해시대 중에도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이 아니라, 동방의 소아시아 지역 사람들이었다.

대박해와 함께 디아클레티아누스는 성물, 성전의 파괴와 함께 기존에 있던 경전들을 불태워버렸다. 구약의 경우 셉추아진타로 결집된 것이 오랫동안 있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신약의 텍스트의 경우는 이본도 많고, 분서도 된 관계 상, 기독교 공인 이후 산재된 경전을 모으고 편집하여 정경화(Canonize)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 정경화 작업은 유세비우스가 초대 교회에서 신뢰성에 논쟁이 되는 성경의 책들을 언급하면서 시작되었다. 키릴루스는 이 중에서 ‘경전성에 의심이 없는 문서’1Homolo-goumena : 4복음서, 바울의 편지, 베드로가 보낸 첫째 편지, 요한이 보낸 첫째 편지와 ‘경전성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서’2antilegomena : 베드로가 보낸 둘째 편지, 요한의 둘째, 셋째 편지, 유다의 편지, 야고보의 편지를 합쳐 26권의 목록을 만든다. 이는 라오디케아 공의회(363년)에서 추인되며 현재의 신약성서 모습을 갖춘다. 여기에 ‘경전성 인정은 어려우나, 잘 알려진 문서’3Nota : 베드로 묵시록, 요한계시록, 디다케, 바나바의 편지, 헤르마스의 목자 등로 분류했던 요한계시록을 ‘경전성에 의심이 없는 문서’로 보아야 한다고 하여 27권으로 된 신약성서의 구성은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확정된다. 그러니까 지금의 성서가 축자영감설4逐字靈感說 : 성서는 글자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단 한 글자도 한 문장도 틀림이 없으며, 이로 인해 오류가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성경관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주교와 사제라는 교회의 이익을 대변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분류되고 판단된 결과라는 것이다. 무수한 이본에 이본이 쌓이고 섞인 필사본들 가운데, ‘어느 것이 진본이냐’하는 판단은 주교와 사제들에게 맡겨졌다. 그때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이미 350년(AD382)이 지난 시점이었다.

인테넷이 잘 안되어 부근을 한참 찾아다닌 후에 겨우 박물관에 들어간다. 로마에서 가장 방대한 고고학 유물이 있다고 하지만, 박물관은 한적했다. 대욕장은 마리아 델라 안젤라 성당의 벽 뒤에 흔적만 있다. 토요일인데 성당 벽에서 성가가 울려나왔다. 욕장 옆 회랑에는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이 있다. 황제라기에는 너무 편안한 인상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흉상

고고학 박물관이라고 하지만, 전시된 유물들이 콜로세움이나 포로 로마노에서 불과 몇백년 거슬러 올라가는 탓에 고고학적 유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있다면 고대 라티움 지역의 발전에 대한 전시물을 자세히 보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에 세워졌다고 한다. 로물루스(Romulus)가 레무스(Remus)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테베강 건너편 아벤티노 언덕에 레마(Rema)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한다. 이후 244년간 7명의 왕이 왕정체제를 유지했다. 왕정이라고는 하지만, 도시의 한쪽 귀퉁이에서 간신히 연명을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타르퀴니우스 왕가의 아들 세스투스(Sextus)가 루크레티아를 강간한 일로 타르퀴니우스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기원전 509년 공화정을 이룬다. 지금 우리가 쓰는 공화국(共和國, republic)이란 말은, ‘res publica’에서 온 것이다. ‘공공의 것’이란 뜻이겠지만, 키케로가 이를 ‘res populi’ 즉 ‘인민의 것’으로 풀이했다. 로마를 상징하는 S.P.Q.R도 Senatus Populus Que Romanus(the Senate and the People of Rome)로 로마공화정을 상징하는 데서 로마제국의 상징이 된다. 

로마를 상징

하지만 Republic을 일본인이 번역하여 만든 共和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모두가 화합한다는 뜻이겠지만, 연원은 멀리 주나라 여왕까지 올라간다. 여왕의 폭정으로 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이려 하자, 여왕은 도망을 간다. 왕의 자리가 비어 주 정공과 소 목공이 함께 조정을 다스린 이때를 공화시대라고 한다. 이와 달리 당시 제후들에게 추대된 공백(共伯) 화(和)라는 자가 왕을 대신해 정무를 맡았는데 이것이 공화제의 유래라는 의견도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 때(공화)부터 무력에 의한 정치가 횡행하여 강자는 약자를 괴롭혔고, 군대 동원령은 천자의 재가를 요청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왕의 손자인 유왕 때 ‘포사의 난’으로 서주(서안)에서 동주(낙양)로 천도를 하게 되고, 왕으로서 제후들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따라서 역사적인 의미에서도 공화의 의미는 그다지 좋지 않다.

민주주의공화국 보다 민국 또는 인민국으로 쓰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사우디 아라비아 전제주의 왕국’이라면 ‘대한 민주주의 민국’ 또는 ‘대한 민주주의 인민국’으로 쓰면 공화국에 비하여 주권재민(주권이 국민에게 있다)의 느낌이 팍 살아난다.

잠시 국민, 인민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의 민국은 ‘국민의 나라’이고, 국민은 ‘나라의 국민’이다. 이를 한번 더 펼치면 ‘나라의 국민의 나라’이고 ‘나라의 나라의 국민’이다. 즉 국민의 민은 속격으로 주체가 될 수 없다. 나라가 없으면 국민은 없다. 하지만 나라가 망해도 사람은 산다. 따라서 국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다. 특히 황국신민이라는 단어로 부터 국민이라는 단어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갑자기 토착왜구가 된 듯한 느낌이다.

북한과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있어서 쓰지 못하게 된 낱말이 ‘인민’과 친구의 우리말인 ‘동무’다. 그래서 인민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느껴진다. 유시민은 그의 책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조선왕조실록에는 ‘국민’이 163회, ‘백성’이 1,718회 등장하는 반면, ‘인민’은 2,504회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루소의 자유주의가 일본을 통해 동아시아로 유입될 때 ‘인민’은 국가에 대립하여 존재하는 자유로운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317쪽)고 한다. 이 구절의 뒤로도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거부하기에는 ‘인민’이 민주주의, 민권과 관련하여 뿌리깊고 소중한 우리말 개념어”라고 그는 말한다.

인민을 고대의 용어에서 보면, 人(사람)은 왕(천자)∙공(임금)∙경∙대부 따위의 지배계급을 지칭한다. 民(백성 : 고대에는 노예를 뜻함)은 사민(四民) 즉 士(조선에서 처럼 선비가 아니라 하급무사 즉 상∙중∙하사의 사)∙農(농민)∙工(공인)∙商(상인)으로 피지배계급을 말한다. 공자도 하급무사 집 안에서 태어나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지배계급으로 올라서기 위하여 유세를 한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의 최고의 꿈이란 장원급제하여 출육(다른 급제자보다 몇급 높은 정육품으로 입궐)하면, 떼어 놓은 당상(당상관 : 당에 올라가 정사를 논할 수 있는 정삼품 이상의 품계)이 되어 지배계급이자 백성이 아닌 대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인민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모두 아우른다는 뜻이다.

반면 국민에서 민은 국에 의하여 지배되는 피지배계급의 의미를 함유한다. 여기에서 국은 나라가 되겠지만, 이 추상적인 나라라는 개념을 확대하고 구체화하면 정부와 대통령 이하 정부를 구성하는 자들이 지배계급이 된다는 의미이다. 물론 현실정치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권력은 인민이 아니라, 이들에게 있다. 선거 때나 촛불집회 경우에나 주권은 재민한다.

박물관의 로마의 유물들은 우리의 삼국시대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만, 몇백년 밖에 안된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유물들은 아득하다. 첨성대처럼 “천문을 본다는 데, 어떻게 보았을까” 혹은 어떤 유물을 보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무슨 용도일까”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많다. 이천년 전 로마의 역사는 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어렵고 아득한 것인지…

박물관을 나와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간다. 조그마한 성당이지만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성당이다. 16세기의 아빌라의 테레사 수녀을 기리기 위한 성당이라고 한다. ‘아폴로와 다프네’로 유명한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 수녀 조각이 있다. 수녀의 환상 속에 천사가 자신의 심장을 화살로 꿰뚫는다. 그 순간 엑스터시(悅樂)에 빠진다. 수녀의 눈은 견딜 수 없는 희열 때문에 몰아에 빠진 듯하다. 조각상의 이름을 피에타(Pieta : 비탄)에 대하여 죠이야(Gioia : 열락)라고 해도 될 듯하다. 역시 베르니니의 조각은 표정이 압권이다. 이 조각의 표정 역시 그렇지만 성당 안에 있기에는 너무 관능적이라는 평이다. 그리고 어두운 성당 안에서 이 조각상 위로 내려 앉는 빛의 표현 또한 강렬하다.

볼만한 오페라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오페라 극장(Teatro Dell’Opera)에 갔으나, 볼만한 것은 내년에 공연이 있다.

로마 오페라 극장, 이탈리아 3대 극장이라고 하는데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다

베네토 거리에서 점심을 사 먹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나중에 계산서를 보니, 거의 사기 수준이다. 하지만 맛은 있었다.

보르게세 공원으로 간다. 로마에서 가장 큰 공원이라고 하는데, 관리가 허술하다. 하지만 휴일에 와서 산보를 하기에는 좋다. 공원의 높은 곳에 연못이 있다. 연못에 섬이 있고, 섬에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이 있다.

아스클레피오스6의학과 치료의 신의 신전

조금 더 가자, 공원이 끝난다. 공원이 끝나는 무로 토르토(고대의 성벽) 위로 인도교가 있고, 건너면 핀초 언덕으로 이어진다.

무로 토르토 밑을 지나는 도로

핀쵸 언덕의 끝은 문득 끊어져 허공에 닿는다. 허공과 언덕을 가르는 테라스 아래는 포플로 광장이다.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 이렇게 쓴다.

내가 앉아 있는 돌의자에서는 나에게 피로감을 주던 로마의 시가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보르게즈의 동산이 내려다보여 멀리 우람한 소나무들이 밑에서 하늘로 뻗쳐 나의 발과 같은 높이까지 다다라 있었다. 오오, 테라스여, 거기서 공간이 뻗어 나가고 있는 테라스여! 오! 공중의 항해……”7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67~68쪽

핀초언덕의 테라스에서 내려다 본 포플로 광장

그 공중은 포로 로마노까지 오후의 햇빛 아래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코르소 거리가 된 플라미니오 가도이다. 가도가 시작되는 포플로 광장에는 플라미니오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기원전 13세기 람세스 2세 때 헬리오폴리스 태양의 신전에 세었던 방첨탑을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키르쿠스 막시무스(대전차 경기장)에 옮겼고, 16세기말이 세 조각이 난 것을 발견하여 이곳으로 옮겨왔다.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4m, 기단에서 첨탑의 위의 십자가까지는 36.5m에 달한다. 핀쵸 언덕에서 높다란 계단을 내려와, 오벨리스크 그늘 아래에서 오후의 폭양을 피할 즈음, 광장에는 휴일을 맞은 사람들이 느긋하게 오후를 즐기고 있다.

3200년 이상된 오벨리스크

다시 낡은 아우구스투스의 영묘를 지나, 베네치아 광장으로 가서 포로 로마노의 건너편에 있는 포로 트라이아노로 간다.

포로 트라이아노

포로 트라이아노는 AD113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북쪽(사실은 동쪽) 도나우 강 가에서 다키아인을 상대로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혼잡한 포로 로마노를 대신하기 위해서 포룸(시장)을 세웠다. 타키아인들을 몰아낸 도나우 강 가에 로마인들을 보내 살게 했는데, 지금의 루마니아(로마인의 땅)다.

콜로세움을 다시 보고 난 후 돌아온다.

201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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