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i-xmmxix 바티칸에서

바티칸 전일투어를 했다.

어제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로마를 다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바티칸을 보고서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바티칸 시국의 면적은 0.44 km2로 여의도 윤중로 제방 안쪽 면적의 1/6에 불과하다. 인구는 839명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세속적인 지배권이 미치는 유형의 영토인 교황령이 754년 피핀의 기증 때부터 1870년 이탈리아 왕국에 멸망, 합병되기 전까지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지역에 걸쳐 있었다. 1870년 사실 상 합병, 세속적인 지배권이 소멸되었으나, 1929년 무솔리니와 바티칸의 라테라노 궁전에서 조약을 맺음으로써 60년간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시국(市國)으로 나마 광복을 맞이한다. 이 조약에 의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탈리아 국교화와 교황청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한 바티칸 시의 완전한 독립이 확인되었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교육·결혼·자산·과세·주교임명 등의 여러 가지 특권이 인정되었다.

하지만 일개의 로마주교가 어떻게 소아시아의 총대주교들을 제압하고 교황의 권위를 구축했으며, 세속적인 지배권을 얻으려고 했는지는 이와 별도로 콘스탄틴의 증여(Donatio Constantini)라는 날조된 문서를 참고할 필요도 있다. 특히 피핀이 교황령을 증여한 시기와 콘스탄틴 황제가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로마교황)는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의 주교들을 관할하는 지상권(至上權)을 갖는다. 황제는 로마 주교와 라테라노 궁전의 후계자들에게 로마 시의 모든 교구는 물론, 이태리의 모든 주, 성, 도시 및 서방지역들을 기증한다. 그리고 황제인 나는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수장(首長)이 거하도록 정하신 곳에 세속정부가 권력을 가짐이 불편하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하노라”는 내용으로 날조된 ‘콘스탄틴의 증여’가 출현한 시기가 묘하게 비슷하다.

먼저 바티칸 미술관에서 출발했다.

중세의 화가들은 전문화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수도사였고, 그림에 대한 지식도 기능적인 역량 또한 부족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내려온 도상에 따라 성실히 그렸다면, 르네상스가 되자 단축법이나 원근법이 발전하고, 관찰에 의한 소묘가 발전함에 따라 중세는 예수나 성인을 크게 그렸다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모든 인간의 크기가 같아진다. 중세의 인물의 표정이 천편일률적(성인들의 표정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무덤덤하다)이라면, 르네상스 인물들의 표정은 생동감이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도 위대한 인물들의 얼굴에는 나이가 없고 고통이 없다.(이는 나중에 피에타에서 이야기하겠다)

멜로쪼 다 포를리 作 ‘음악가의 천사 그룹’ 1프레스코 파편이며, 아래에서 위로 본 ‘단축법’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중세의 인물의 무표정함은 예술적 기교의 부족일 수도 있겠으나,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음’이라는 책 중 ‘영광스러운 몸'(천국에서 부활한 육체의 본성과 특징)에서 보자면, 중세의 신학자들은 영광스러운 몸의 네가지 특성을 무감각함, 미묘함, 민첩함, 명료함으로 보았다. 이 내용들을 종합하자면, ‘유령이란 어떤 형상인가’이다. 이 중 ‘무감각성’이란 육체의 완벽을 방해하던 무질서한 정념들에 육체가 더 이상 예속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성인(순교자)들이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무표정으로 죽어가는 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증거하는 것인지 모른다.

아울러 ‘미묘함’이란 극단적인 희박함이며, 축복받은 자들의 신체를 공기나 바람과 유사하게 만들어 다른 신체가 관통할 수 있게 한다. 즉 이들의 신체는 손으로 만지거나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숨결이나 정신과 구별되지 않는다.(벽이나 유리창을 지나다닐 수 있다) 그리고 ‘민첩함’이란 모든 움직임과 행동에서 그 신체는 영혼에 재빠르게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생각에 따라 순간이동이 가능하다) ‘명료함’은 축복받은 이들은 수정처럼 속이 비치도록 투명하지만 금처럼 빛이 그들의 몸을 투과하지는 못한다.(꼬마 유령 캐스퍼의 형상과 같다) 그러니까 유령이란 중세 신학자들의 발명품인 셈이다.

라파엘의 그림이 있는 전시장에 들어섰다. 십대의 그림들은 스승을 따라가기에 바빴고, 이십대에는 네오나르도 다빈치의 영향으로 스푸마토와 공기원근법적인 특징을 보이며, 삼십대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보고 난 감동으로 바뀐 그림 스타일을 보여준다. 사십대의 경향을 보기에는 그는 이미 37살 나이로 죽었다. 그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표정이란 황홀경(엑스타시)에 빠져있는 표정들이다. 성스러운 그들은 속된 인간의 감정과 다른 감정을 가졌으며, 가져야만 한다.

라파엘의 ‘그리스도의 변용’

그 다음은 매너리즘으로 해석되는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작품들이 있다. 르네상스의 세 천재들을 능가할 수 없었던 화가들은 천재들의 기법을 따라하면서도 나름대로 왜곡을 통해 자신의 독특함을 드러낸다. 이 매너리즘 화가 중에 엘 그레코(스페인어로 그리스인, 본명은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이다)도 있다. 여기에는 없지만,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을 좋아한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낮이며 정적이라면, 틴토레토의 것은 저녁의 어둠이 깃들어 있으며, 만찬이 열린 마가의 다락방은 예수와 열두제자 외에도 만찬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천사들로 소란스럽다. 그 가운데에서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막 14:22)하시는 장면이 펼쳐진다.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는 있으나, 틴토레토의 것은 베니스에 있어서 볼 수 없었다.

다음은 바로크 화가들이다. 르네상스가 젊고∙잘 생기고∙거룩한 표정의 인물들을 그렸다면, 카라바죠의 경우 나이에 따라, 생긴대로, 두려움과 고통 앞에서 처절하고 시기심과 분노에 깃든 감정을 어둠 속에 그로데스크하게 그려내어 결국 인간이 신 앞에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매장’

중세는 도상에 따른 장미를, 르네상스 때는 아름다운 장미를, 바로크 시대에는 시들 수 밖에 없는 장미를 표현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아폴로상

점심으로 샐러드를 먹고,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의 팔각정원에서 조각들을 보았다. 아폴로상과 라오콘상을 보면 무거운 돌의 질량을 느낄 수 없다. 어쩐지 조각상의 인물들이 공중으로 떠 오르려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폴로상과 라오콘상의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 라오콘의 극적인 움직임과 사람들이 느끼는 처절한 고통을 표현하는 것과 신 아폴론의 완벽(피렌체의 다비드상에서 느낄 수 있는)함을 그려내는 것 중 어떤 쪽이 작가의 절제를 더 필요로 했을 것인가하는 문제인 것 같다. 단적으로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의 뮤즈의 방으로 들어가면 벨베데레의 토르소가 있다.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복원 요청에 거부하면서 “이 자체로 완벽한 작품”이라고 했다지만, 내가 보기에는 절제가 안되고 과도한 작품인 것 같다. 물론 이 작품이 나중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토르소가 수준이 아폴로와 라오콘에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시 관저를 읽고 “즐거워도 난잡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슬퍼도 애가 끊어지지는 않는구나”(樂而不淫 哀而不傷) 한다. 이것이 우리의 정악(正樂)과 정가(正歌)가 취하는 중도(中道)이다. 논어의 이 문장을 가지고 삼국사기에서 우륵의 음악을 평하기를 “즐기면서도 휩쓸리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이를 만하다”(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고 한다. 정악(아악)과 정가(시조창)에 있어서 바르다(正)는 밖으로 넘치지도 않고 안으로 후벼파지도 않지만, 그 탓에 재미없고 심심하다. 때론 흥청망청 간혹은 창자가 끊어질 것 같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복상지음(濮上之音)의 소리가 궁금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대의 악보란 없다. 특히 나라가 망할 정도의 음란한 고대 음악을 어찌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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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데레의 토르소 2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의 몸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해 볼 것

여행을 오기 전에 재수가 좋다면, 어렸을 적 집에 있던 세계문화사대사전 안에 들어있던 사진 속의 토르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육면의 깨어진 돌덩이 위에 가슴과 배만 남아 있는 토르소였다. 깨어진 돌 위에는 새끼 손가락 반마디 깊이의 파인 부분이 있다. 파인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거기에서 돌이 스며나오고 있는 것 같다. 그 홈은 배꼽이다. 거기서 솟아난 복부의 근육과 살은 낮은 언덕과 구릉을 펼친다. 몸의 겉면은 목욕한 여인의 살처럼 매끈했지만, 간혹 충격에 표면이 긁혀나간 자국도 보였다. 언덕은 아랫배 속으로 잠시 스미는 듯 불두덩에서 낮게 떠오른다. 떠오른 곡면은 사타구니의 막다른 지점 쪽으로 깊숙히 당겨지다가 그만 돌 속으로 스며든다. 상행 곡면은 크게 융기되지 않은 채 낮은 신음을 내며 달리다가 유두 부분에 작은 흔적을 남기면서 어깨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다가 쇄골에 다다르기 전에 그만 깨져버렸다. 깨진 부위는 가슴이 어떤 에너지의 곡면으로 떨리고 있는지, 단면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곡면의 흐름은 가파르지 않고 낮게 굽이치며 여인의 벗은 몸을 숨막히게 연주해 냈다. 그 토르소보다 적은 돌을 덜어내어 여인의 숨가쁜 몸을 표현한 작품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 책을 잃어버린 뒤, 각종 화보집을 찾아보고 인테넷으로 찾아 보았으나 그 토르소를 찾을 수 없었다.

그 토르소가 매료시킨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단지 복부 위에 손을 올리고 그것이 살의 따스함을 간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돌의 차가움인지 피가 도는 따스함인지 알고 싶은 유혹에 몇번인가 대리석상에 손을 올려본 적이 있다. 뜨거운 내 손 탓에 촉감으로 차가움과 따스함을 구분할 수 없어 결국 입술을 대 보고서야 돌의 차가움을 확인하곤 했다.

그러면서 ‘보고 싶다’ 보다 ‘만지고 싶다’가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3입체파인 조르주 브라크가 나와 같은 갈증을 가지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해부학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라오콘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아버지인 라오콘의 오른팔은 없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고통 때문에 오른 팔을 하늘 쪽으로 펼치고 있었을 것으로 예측했으나, 미켈란젤로는 근육의 뒤틀림 등을 살펴보고 구부리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라오콘의 오른팔을 찾고 보니 미켈란젤로의 추측이 맞았다.

라오콘

촛불의 방과 지도의 회랑을 지나 라파엘의 방으로 들어가 벽화를 본다. 아테네 학당의 그림 옆의 기둥을 보면, 진짜가 아니다. 그리자유4Grisaille(gris는 회색)란 모노크롬으로 그린 단색화를 말한다. 장식에서는 렐리프(relief)안에 사물을 그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색은 일반적으로 회색, 갈색을 사용하는데 조금 다른 색을 넣기도 한다. 그리자유 회화는 모노크롬이라는 점에서 뎃생과 비슷하다. 기법으로 그린 환영이다. 벽은 있지만 기둥같은 것은 없다. 이러한 환상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라파엘과 그의 조수들은 벽에 기둥과 돋을새김을 그려낳았다. 이제는 이러한 ‘환영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에서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과 ‘팝 아트’와 같은 포스트 모더니즘 양식이 안출된다.

아테네 학당의 좌측 기둥 부분 5그리자유 기법으로 입체감을 표현했다. 아래의 아테네 학당 그림에서 기둥과 아치의 모서리 두면이 여기에서는 평면으로 펼쳐져 있다. 부조로 된 꽃과 사람 얼굴도 그림이다.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에는 르네상스 3대 거장(다빈치, 미켈란젤로, 본인 라파엘) 모두가 들어있다. 그 외에 58명의 철학자들이 나온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면 정작 그림을 감상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런 것을 이감6귀로 감상하다(耳鑑)라는 뜻이지만, 음악 감상과 같은 것이 아닌 주로 서화와 같이 눈으로 감상하는 것에 주로 적용된다. ‘몽계필담’ 중 ‘서화’편에 나오는 말로 “서예나 회화작품을 수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허망한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자가 많다. 종요나 왕희지, 혹은 고개지나 육탐미의 작품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다투어 찾아가 그것을 구입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이감(耳鑑)이라는 것이다”고 심괄은 말한다.이라고 한다. 그림의 크기와 그림을 바라볼 때의 느낌, 그런 것을 놓치게 된다. 아네테 학당은 가슴 높이 이상에서 바닥이 시작된다. 그래서 평행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고개를 쳐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무척 큰 빌딩의 로비에 들어선 느낌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야외같은 개방감과 밝아서 명랑한 느낌이다. 원근법을 이용하여 멋진 아테네 학당을 세운 것 같다. 하지만 로마식 아테네 학당이다.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 위의 사진과 본 그림의 우하단의 기둥부위를 비교해볼 것

마침내 시스티나 소성당에 들어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기록하고 사색을 했던 사람이라면, 미켈란젤로는 3D에 대한 천부적인 구상력을 가지고 맨 땅에 헤딩해가며(하지만 돌파해나가기 위하여 깊은 사유를 했던) 위대함을 부조해 나가는 인간, 라파엘은 겸허한 천재라는 점을 시스티나 소성당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잇다. 학자였던 다빈치, 화가였던 라파엘,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 조각가가 이니었다면 시스티나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을 저렇게 그릴 수는 없다. 그는 조각을 그려냈고, 기둥을 새겨 그렸고, 둥근 천장을 끌과 망치 대신에 붓으로 조각해냈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의 오른쪽 대각선 아래가 ‘쿠마의 시빌’이다 7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다른 곳에서 가져 옴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천지창조)를 보면 고개가 아프다. 소성당에 들어선 입구가 천장화의 반대편인 탓인 것 같다. 반대편 출구쪽에서 ‘최후의 심판’ 쪽으로 걸어오며 보면 고개가 덜 아프다. 그리고 천장화를 다 보고 난 후 고개를 바로 하면, 죄의 무거움 탓에 연옥에서 지옥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운데에는 성모와 예수가 보인다. 예수께서는 손을 들어 그들을 심판하려 하고 늘어선 자들은 두려움에서 인지 예수의 손을 피하려 한 손으로 자신을 가로막으며 한 발자욱 뒤로 물러서려 한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8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다른 곳에서 가져 옴

두 작품을 보면 미케란젤로는 조각가이지 결코 화가가 아니다.

서구미술이 그리스에서 비롯한다고 치자. 헬레니즘의 예술은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과 퇴락한 벽화도 있겠지만, 압권은 역시 조각이다. 조각은 3차원이지만 오히려 공간을 차지한다. 신이나 사람, 동물 등 일정한 부피를 가진 것을 표현하는데는 장점이 있지만, 식물이나 구름 등 자연을 표현하는데 분명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는 산수화 등 자연에 시선이 멈췄던 동양(비단과 종이의 나라)과 달리 사람과 신에 집중하게 했다. 이후 예수와 성자 중심의 이콘(Icon : 聖畵와 聖像)에 집중하던 중세를 지나고, 르네상스에서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서구미술의 대상과 주제는 늘 사람이었다.

회화는 2차원의 평면 위에 연출되는 것이고, 그 평면은 벽과 나무판, 돛이 많았던 베네치아 같은 곳에서는 캔버스로 이루어져 있다. 벽에 그려지기도 하고 방이나 복도와 같은 회랑(galleria)에 그림이 걸리기도 한다. 조각이 공간을 잠식하는데 반하여, 그림이라는 평면은 오히려 환영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베누스의 탄생’을 예비하기 위해서는 보디첼리는 바다와 아득한 수평선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브루넬리스키가 선 원근법을 만들고 스푸마토 기법이 대기까지 그려내며 르네상스 미술이 공간을 창조하자, 그 공간 속으로 빛과 그림자가 스몄고9카라바죠나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어둠 속으로 빛이 스미면서 사람과 사물이 드러난다. 반면 루벤스나 바로크의 시작을 알리는 일 제수 성당의 천장화(Giovanni Battista Gaulli의 그리스도의 승천)를 보면 실명할 정도로 강렬한 빛으로 들끓는다., 바로크 시대를 연다. 16세기의 어느 누군가는 (플랑드르의 뛰어난 르네상스 미술을 폄하하기 위한 목적이어서 믿을 수는 없지만) 미켈란젤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플랑드르 화가들은 오로지 외적으로 눈을 속일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런 플랑드르 미술은 벽돌과 반죽, 평원의 잔디와 나무 그림자, 다리와 강”과 같은 하찮은 것들만 취급하며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을 여기 저기 그려놓고, 그것을 풍경화라고 부른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북방(네델란드, 벨기에, 독일 등)의 르네상스 회화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북방에는 고대, 즉 그리스・로마 문화의 전통이 없었기에 오히려 인간과 자연 모두에 골고루 시선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그런 그림에 대하여 “합리성이나 기술도 없이, 대칭이나 균형도 없이, 취사선택도 없이” 그려졌으므로 천박한 것이라고 했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자연이란 합리적이거나 고상한 것은 아니다. 그냥 자연일 뿐이다. 하지만 이 고집스런 조각가의 의견과는 달리 서구의 회화는 조르지오네와 티치아노와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의 맑고 시원한 풍경 쪽으로 조금씩 옮겨가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두 작품에서 인물 뒤의 풍경은 화가들에 비하여 극히 취약하다. 화가가 아닌 그는 라파엘과 같은 멋진 풍경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인물들이라는 조각상이 위치해야 할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래서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들은 조각상이거나 아니면 뎃생으로 보는 것도 좋다. 천장화의 경우 그리자유 기법으로 천장 구조물을 그려 조각상이 위치할 공간을 마련하고 그 곳에 인물들을 배치했다. 그러니까 천장화의 대부분이 건축구조물과 인물이고 풍경은 성서의 스토리텔링을 위해서 조금 그렸을 뿐이다.

천장화에는 쿠마의 무녀가 나온다. 황무지의 에즈라 파운드를 위한 헌시에 나온 늙고 쭈그러들어 조롱 속에 갇힌 시빌(무녀)의 “죽고 싶어”라는 절망을 처음 읽고, 어렸던 나는 무슨 일인지 모르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CVMAEA의 무녀는 남자처럼 강건하고 검게 그을러 내가 가졌던 시빌에 대한 이미지를 팍 깨버린다.

이 소성당에서는 교황의 선종 후 새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댄 브라운의 소설 ‘천사와 악마’의 무대이다. 이 소설에는 반물질10빅뱅으로 無에서 우주가 탄생한다. 이것으로 천지창조는 설명될 수 있으나, 수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이 고안해낸 것이 +의 有(우주, 물질)가 나왔으니, -의 有(반물질)가 있다면 이 둘을 합하면 0(無)가 된다는 생각 아래 반물질을 찾아나선다. 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입자가속기에서 빅뱅을 시뮬레이션하면서 마침내 반물질을 추출해낸다. 이 반물질은 등량의 물질과 반응하여 無(소멸)가 되는데, 극소량이라도 핵폭발에 버금가는 에너지가 나온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는 이 반물질을 가지고 죽은 교황의 궁무처장은 자신이 새로운 교황이 되려고 하는데, 로버트 랭던 교수가 초를 치고 만다. 하지만 이 반물질은 허구가 아니다. 실제로 추출된 바가 있다고 한다. 이렇다면 우리가 있는 +우주의 반대편 어딘가에 -우주가 있을 것이고, -의 나(我)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이라는 재미있는 물질이 등장한다. 또 18세기까지만 해도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주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를 들을 수 있는 곳은 시스티나 성당 이곳 뿐이었다. 그것도 일년에 단 한번 성주간(聖週間) 때 뿐이었다. 그 시절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 노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천상에서 흘러나온 음악 같았다.” “그 노래를 접하자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Miserere Mei Deus 듣기…

소성당에서 베드로 대성당으로 간다.

성 베드로 대성당, 세상에서 가장 큰 성당이 어떻게 이렇게 작아보일 수 있는지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성당은 없다고 한다. 이 성당도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졌다고 한다. 건축기술이 없었던 그는 판테온과 피렌체의 두오모를 공부하여 쿠풀라를 올려 세웠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 모습. 거룩함을 화려가 덮었다

성당에 들어가면 규모에 화려를 돋을새김한 탓에, 어쩔 수 없이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성당을 둘러본 후, 지하묘소를 보고, ‘거기에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피에타를 보았다. 안타깝게도 피에타는 파괴범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방탄유리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래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서 처럼 슬픔이 밀려오지는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11어쩐지 두 사람이 날아오를 것 같다. 예수를 저렇게 가볍게 안고 있을 수는 없다

이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스물네살 때 작품이다. 이 작품의 마리아는 서른세살의 아들이 있는 어머니라기 보다 마치 수태고지를 받던 소녀같다는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의 질문에 대하여 “순결한 여자들이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더 잘 유지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고 말일세”라고 미켈란젤로는 말한다. 앞에서 말한 예술에 있어서의 르네상스적 사고를 미켈란젤로는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대성당의 쿠풀라

시간에 여유가 있을 것 같다고 하여 쿠풀라로 올라간다. 일부는 엘리베이터로 나머지는 계단으로 올라간 탓에 피렌체보다는 한결 수월했다. 쿠풀라에서 본 로마는 낮고 잔잔한 분지였다.

쿠풀라 위에서 본 로마, 내가 보는 분지가 라티움인지 모르겠다

쿠풀라를 올라간 후 시간에 쫓겨 허둥대다가 가이드를 놓쳤다. 시간은 이미 오후 5시가 넘었다. 가이드를 찾다가 안될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온다.

오는 길에 산탄젤로 성을 본다.

산탄젤로 성,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였다고 한다.

날이 저물어 들어가지는 않고 그 앞의 테베강을 보며 다리를 건넌다. 이천칠팔백년의 역사가 흘렀을 강은 개울처럼 강폭이 좁다.

저물녘의 테베강

한참을 걷다가 피자를 사먹었는데, 이탈리아 그것도 로마에서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피자를 먹게 되었다. 맛이 없어 절반도 먹지 못하고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발바닥이 얼얼하다.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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