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ii-xmmxix 로마에서 떠돌기

로마는, 특히 고대 로마는 남자답게 살다가 죽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상적인 고장으로 남아 있다. 1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 중 82쪽

하루종일 로마시내를 뺑뺑이를 돌다보니 로마를 다 본 것만 같다.

어제 광야에서의 마귀가 예수를 마지막으로 유혹하던 장면을 떠올렸던 것은, 포로 로마노의 폐허로 부터 캄피돌리오 언덕 위로 층층이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건물들을 보며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이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열방과 만국의 영광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자 팔란티노 언덕 아래 대전차경기장(키르쿠스 막시무스) 옆에 내려 ‘진실의 입’을 스쳐지난다. 영화 ‘로마의 휴일’ 때문인지 엄청난 인간들이 줄을 서 있다. 그들은 사진을 찍는다, 진실의 입에 손을 집어넣고, 웃으면서, 천편일률적으로.

진실의 입 2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고 벽에 얼굴과 입이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원반 형태(아마 이방인의 태양신이 아닌가 싶다)이고 기억보다 몹시 작았다. 참고로 나는 여기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사진을 찍었다. 따라서 저 아가씨는 나와 관계가 하나도 없음

팔란티노 언덕과 포로 로마노 옆으로 난 길(via di S. Teodoro)을 따라 걸었다.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자 포로 로마노가 내려다 보이는 캄피돌리오 광장이 나왔다. 중앙은 높은 탑이 있는 세나토리오 궁전(시청사라고 한다)과 양쪽으로 세나토리오 궁전과 콘세르바토리 궁전이 있다. 궁전 앞의 계단 좌우로 쌍둥이(Gemini자리) 카스토르(Castor : α별)와 폴룩수(Pollux : β별)의 조각상이 있는데 한 곳의 고추에 문제가 있는지 다른 돌로 만들어 붙여놓았다. 남자들의 고추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캄피톨리오 광장의 제미니 동상

계단을 내려가 베네치아 광장 쪽으로 가다보니 초기 기독교인들이 모임을 가졌던 지하 건물이 보인다. 그 옆으로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 성당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통일기념관이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통일기념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20~1878)는 사르데냐 피에몬테의 국왕이자, 1861년 이탈리아 국왕에 오른 사람이다. 그가 왕이 되기 이전의 이탈리아 반도는 북부는 사르데냐,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공화국(오스트리아 속령), 밀라노 공국, 제노바 공국, 남부는 나폴리 시칠리아 공국, 중앙은 교황령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왕이 되자 카보우르를 재상으로 기용하고 가리발디와 같은 용병의 귀재를 발굴하는 한편, 안으로는 선정을 펼치고 밖으로는 용의주도한 외교를 펼친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 스페인, 프랑스, 교황청 등 외세를 물리치고, 공화국들을 단계적으로 흡수 합병해 나가다가, 1870.09월 교황령(프랑스 지원)의 심장부인 로마로 진격하여 이탈리아 대부분을 통일한다. 로마제국 이후 1400년만의 통일이라고 한다.

통일기념관은 1885년 설계되고, 1935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조국의 제단’이라고도 하는데, 1차 세계대전 때 숨진 무명용사들의 묘이기도 하다.

이 건물이 어제 포로 로마노에서 보았을 때, 이 세상의 건물로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 시민들이 뽑은 최악의 건물이란다. 외관 때문에 타자기, 웨딩케이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는 데, 위용만큼은 압도적이다.

에마누엘레 2세 통일기념관의 중앙 계단 아래는 베네치아 광장이다. 광장의 옆으로 베네치아 궁전이 있다. 베네치아 궁전은 콜로세움의 돌을 가져다 지었다고 하는 데, 콜로세움의 돌로 지은 것에 비해서는 아담한 건물이다.

궁전 안의 정원은 시원했고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그늘 아래 앉아 오후를 보냈으면 싶다. 새가 잠시 지저귄다.

베네치아 궁전의 정원

하지만 바로 옆 ‘일 제수 성당'(Il Gesu, Chiesa del Gesù : 예수의 신성한 이름 교회)으로 가 봐야 한다. 바로크의 서막을 알리는 예수회에서 세운 성당, 거기에 지오반니 바티스타 가울리가 그린 천장화가 있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가울리의 ‘그리스도의 승천’ 3빛과 어둠, 극적이며 움직임이 강한 바로크적 감성이 강하다. 트롱프뢰유 기법으로 교회 천장이 하늘로 열려 있는 느낌을 주며, 중력을 거스르는 Soto in Su(아래에서 위로)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소토 인 수’가 바로 휴거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천장을 바라보다가 목이 아프면 보라고 거울까지 설치해 놓았는데, 트롱프뢰유 기법으로 그린 그림은 어느 부분이 조각이고 천장이며 어디서부터 그림인지 나의 시력으로는 가려낼 수가 없다. 천장의 궁륭은 하늘로 이어지고 수많은 사람들과 천사들이 천장의 궁륭을 지나 마치 하늘로 들려 올라가(携擧)듯 빛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그 가운데는 방사하는 거룩한 빛으로 가득하다. 실명할 것을 무릎 쓰고 빛 속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예수회의 문장(紋章)인 ‘십자가 밑에 IHS’4IHS는 예수를 뜻하는 모노그램, 예수의 그리스어 표기(Ίησους; 그리스어 대문자로는 ΙΗΣΟΥΣ)에서 첫 세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필사본을 만들던 시절에 고가의 양피지를 아끼려고 ‘IHS’라고 적고 ‘예수’라고 읽었다.
또 다른 설은 In Hoc Signo (Vinces)의 약자라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물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와 전투를 앞둔 날 밤 중, 신은 Xp(그리스도)라는 징표를 그에게 준 뒤, “이 징표 안에서 (이길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맞다면 IHS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이 된다.
라는 글자가 그려져 있다. 이 문장은 성당의 정문 위에도 새겨져 있다.

예수회는 1534년 군인 출신의 사제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해 세워진다. 일 제수 성당은 1568년에 비놀라가 설계하고 1584년 산토리오 추기경에 봉헌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증개축이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이 성당은 예수회의 최초의 교회라기도 하며 바로크시대를 연 건축물이라고도 한다. 정치면에서 바로크가 절대군주의 권위를 대표하는 예술 사조라면 종교면에서는 종교개혁에 대한 대처로 스스로 개혁에 나선 가톨릭의 개신교에 대한 승리와 권위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에 앞장 선 테아티노회와 예수회의 건물에서 잘 나타난다고 하는데, 바로 일 제수 성당이 그를 대표한다.

이런 바로크 건축 양식은 17세기 동안 예수회의 활동을 통해 유럽 및 남아메리카 전역으로 널리 퍼져 나간다.

예수회는 교회의 개혁 뿐 아니라, 해외 전교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들은 인도의 고야에 근거지를 두고 동아시아 전교에 힘썼다. 그들의 선교사들은 학문 및 과학 등에서 뛰어나고 적응주의 선교전략, 즉 현지의 언어를 익혀 그들의 사상과 문화를 익힌 다음 지배층이나 지식인들과의 학술적 교류로써 가톨릭 교리를 전파한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이다. 마테오 리치 경우 성리학과 중국 고전을 이해하고 문서선교의 일환으로 지은 천주실의는 당대의 문인들의 인기를 끌었다. 또 유클리트 기학학의 기하원본 등을 번역하여 명나라 학자들과 광범위한 교류를 갖는다. 아담 샬의 경우 천문 역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대포 제조 등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소현세자와 교분이 깊었다. 소현세자가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보다 일찍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개신교의 경우 천박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처럼, 불행하게도 천주교 또한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선교를 하게 된다. 도올 선생은 “19세기 우리나라 선교의 주류를 형성한 조직이나, 이 선교회는 동방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제수이트(예수회)와는 달리, 지극히 고답적이고 자기들이 생각하는 종교적 가치 이외의 모든 문화를 야만과 죄악과 저주로 간주하는 극도로 배타적인 선교정책을 견지하였고, 또 프랑스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제국주의적 침략의 전초기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한다. 조선교구장이었던 귀스타브 샤를마리 뮈텔 주교와 안중근 의사의 예를 보면, 안의사가 황해도 지역에 대학 건립을 요청하자,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으면 개화되어 신앙심이 떨어진다고 거절했다. 또 이등박문 저격 후에는 안의사를 일방적으로 출교하고, 그와 가톨릭교회의 관계를 전면 부정하였으며, 처형을 앞두고 종부성사를 위해 프랑스인 사제를 보내달라는 안중근과 그 일가족의 요청을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안의사의 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죄하는 한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또한 안의사 어머님을 불러 회유를 함에 따라, 안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께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당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되고 만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을 즉 죽는 것이 영광이다.”

뮈텔을 비롯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에 대해 차별적인 우월의식이 있었다. 이들은 동양의 미개한 지역에 와서 봉사한다고 생각해 김대건 등 조선인 성직자마저 동역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들은 항일 의병들을 약탈자와 산적에 비유하고, 삼일운동에 참여하였던 신학생들을 퇴학시킨다. 우리 민족의 자존과 자주 독립은 이들에게 성가신 일이었던 탓에 신자들의 독립운동 등 현실참여를 봉쇄하고 오직 신앙 만을 강조한다. 이러다 보니 한국인 최초의 주교인 노기남조차 성직자와 신도들에게 일본군 장병을 위한 기도와 황군의 전쟁 승리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는 것 뿐 아니라, 신부들에게 시국과 관련된 강연을 하도록 권면했다. 주교좌에 있는 작자가 신사참배에 호응하고 국방헌금을 낼 것을 강요하는 등의 의혹마저 있어 결국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이름을 올린다. 그래서 안의사 서거 100주기(2010년)에 서울대교구(명동성당)에서 처음으로 안중근 추모미사를 가졌지만, 일부에서는 “가톨릭, ‘안중근 껴안기’ …“친일 반성이 먼저”라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파리 외방전교회 같은 곳이나 있는 것이지 예수회라고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엔리오 모리코네의 ‘가브리엘의 오보에'(이 음악에 꽂힌 사라 브라이트만이 ‘넬라 판타지아’로 편곡)로 유명한 영화 ‘미션’을 보면, 예수회 활동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다.

미션의 무대는 (지금은 파라과이의 수도인) 아순시온이다. 그리고 영화는 1750.01월 ‘마드리드 조약’과 그 이후의 ‘과라니 전쟁'(7개 전도소 전쟁 : War of the Seven Reductions)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의 아순시온은 포르투갈인 노예상들이 원주민 과라니족을 거래하는 시장이다. 당시 서구인(교황청 포함)에게 과라니족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잘 따라하는 짐승’일 뿐 이었다. 노예상들은 과라니족을 풀어 과라니족을 잡아, 아순시온 시장에서 사고 팔았다.

포르투갈은 토르테시야스 조약51494.06월 에스파냐, 포르투갈 간 유럽 외 지역에 대한 영토분쟁을 해결을 위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로 맺어진 조약이다. 당시 남아메리카는 경도를 정해 동쪽은 스페인, 서쪽은 포르투칼이 영토를 차지하는 것으로 정했지만,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아마존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이미 차지한 땅을 에스파냐에 넘길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남아메리카의 영토 문제에 있었서는 조약은 의미가 없었다.을 무시하고 계속 예스파냐의 영토라고 인정한 동쪽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에스파냐 정부는 교황청에 과리니족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다. 포르투갈의 학살과 노예로 사고 파는 행위를 중지시켜야 한다고 설득하는 한편, 예수회가 이 지역에서 과라니족을 대상으로 선교를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한다.

과리니족에게 백인이란 학살자이며, 질병과 불행을 이끌고 와, 자신과 자식들을 저자거리에서 노예로 팔아먹는 ‘악의 화신’이거나 ‘저승사자’였다. 하지만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회의 신부인 가브리엘과 노예상이었으나 개심한 로드리고는 이과수 폭포 위의 과라니족 서식지(거주지라고 할 수준이 아니다)로 간다. 강변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악의 화신(백인)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과라니족에게, 가브리엘 신부는 오보에로 연주를 한다. 그 음악이 바로 ‘나의 환상 속에서'(Nella Fantasia)의 원곡인 ‘가브리엘의 오보에'(엔니오 모리코네 작곡)다. 그 환상적인 음악에 취한 탓에 이들 과라니족은 천주교 신자가 되어 레둑시온(Reducción : 예수회 전도소 혹은 인디오 전도소라고 하지만 과라니족 신앙공동체)을 세우게 되고, 결국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연합군의 총칼에 죽어가게 된다.

예수회에서의 과라니족에 대한 선교는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이과수 폭포 하류인 파라나강 동쪽(우루과이강 서쪽)에 상당수의 레둑시온을 세운다. 숲에서 짐승처럼 살아가야만 했던 과라니족 26,362명이 이 곳에 모여 찬송가를 부르며 평화롭게 살게 된다.

1750년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고 따라 양국간 식민지 영토가 획정된다. 이제 스페인은 더 이상 과라니족이나 예수회를 비호할 이유가 없었다. 파라나강에서 우루과이 강 사이에 산개되어 있는 레둑시온은 오히려 양국간 획정된 영토 문제에 있어서 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었다. 토사구팽이라고 1756년 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이 과라니족을 학살하며 주님의 은총으로 가득한 레둑시온을 파괴한다. 이 레둑시온들은 조약6우루과이강을 경계로 하여 서쪽은 에스파냐, 동쪽은 포르투갈 관할로 하기로 함.에 따라 에스파냐의 영토로 편입된다.

1,511명의 과라니족을 학살(백인은 4명이 죽음)하는 과정이 영화 ‘미션’처럼 된 것은 아니다. 예수회는 전쟁 2년 전인 1754년에 이미 레둑시온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가브리엘 신부가 십자가를 들고 총에 맞아 죽은 것은 영화의 극적 픽션일 뿐이다. 하지만 제수이트의 선교사들은 이후로도 남미의 원주민과 깊은 유대를 쌓아 간다. 그들은 기층 민중의 삶에 뿌리를 둔 전교활동을 하다보니 악덕 지주와 군사독재정권의 착취에 반대하는 ‘해방신학’이라는 진보신학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개혁 및 선교활동을 통하여 예수회가 쌓아올린 권위는 유태인의 세계정복 시나리오라고 불리기도 하고, 제5공화국 때 전두환의 (퇴임 후) ‘장기집권시나리오’7전두환의 막하의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언론인 강제해직,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등을 주도하여 ‘전두환의 괴벨스’라 불리던 허문도 등이 두환이가 대통령을 퇴임한 후, 어떻게 막후에서 정부와 정권을 다스릴 것 인가를 기획했던 것으로 거기에는 두환이가 최소한 2000년까지는 막후실세로 민정당을 장악하고, 정부요직에 측근으로 앉히는 등의 섭정 시나리오를 말함. 5공 말기에 이에 대한 각종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그 후에는 유야무야됨의 프로토 타입이자 20세기 음모론의 대표인 ‘시온의정서(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8반유대주의를 조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서로, 프랑스 정치 풍자가 모리스 졸리가 쓴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키외의 지옥에서의 대화’라는 풍자 소설을 표절하여 만든 문서이다. 1903년 러시아에서 처음 출판되었다고 한다.에서조차 자신들의 세력이 두려워할 유일한 상대는 ‘예수회’라고 할 정도다.

줄리어스 시이저가 암살당한 폼페이 원로원이 있던 오래된 폐허 ‘라르고 디 토레 아르헨티나’ 옆의 카페 아르헨티나에서 해물 리스토를 사 먹었는데 맛은 꼭 김치국밥에서 국물을 뺀 맛이다. 그런대로 맛있다.

판테온 앞의 파사드

판테온으로 간다. 겉의 외벽은 헐었으나 정면의 코린트식 파사드는 지은 지 얼마 안된 것처럼 말짱하다. 안의 구조는 무척 튼튼해 보인다. 돔 가운데 오쿨루스(구멍)에서 흘러드는 빛이 돔의 한 쪽을 비춘다. 오후 2시의 빛이 정박하는 지점이 명확하다. 만신전(萬神殿)인지 복마전(伏魔殿)인지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은 이제 단 하나의 신(하나님)을 위한 성당으로 변해 있었고, 그 하나의 신을 위해 판테온은 치장되어 있다. 르네상스 이후로는 파리의 팡테옹처럼 무덤으로도 쓰여졌다고 한다. 라파엘의 무덤과 에마누엘레 2세의 무덤 등이 있다.

판테온의 겉 모습은 낡았으나 몹시 튼튼해 보인다 9이런 외벽의 모습은 아우구스투스의 영묘와 산탄젤로성에서 볼 수 있다

돔의 내부 원의 지름은 43.3m라고 하며, 천장의 오쿨루스에서 바닥까지도 43.3m라고 한다. 피렌체의 쿠풀라의 지름은 42m로 이보다는 작으나, 피렌체의 쿠풀라는 계란 모양으로 구형인 판테온에 비하여 돔의 용적이 크다. 참고로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의 안쪽 지름은 41.47m로 셋 중 가장 작다. 대신 돔의 총 높이는 대성당의 바닥에서 바깥에 있는 십자가의 끝까지 136.57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돔이다.

판테온의 지붕 10오쿨루스를 통해서 오후 2시의 햇빛이 들어왔다. 돔의 무게를 줄이면서도 하중을 버틸 수 있게 만든 소란 반자가 몹시 튼튼해 보인다.

AD125년 경에 콘크리트를 거푸집에 들이부어 만든 소란(小欄) 반자11천장이라는 반자를 쓰는 것이 맞는 지 모르겠다. 오히려 계란판 돔 구조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를 보면, 밀레니엄에 밀레니엄의 세월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크기가 커보이지는 않지만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다.

나보나 광장, 광장 양쪽으로 분수대가 있다

‘나보나 광장’, 애천(Three coins in the fountain, 1955작)의 무대가 되는 ‘트레비 분수’, 로마의 휴일과 같은 영화에서 보면 지나가는 외국 처녀들을 유혹하려는 멋진 이탈리아 청년들이 계단에 앉아 있는 ‘스페인 광장’을 들러 일찍 숙소로 돌아온다.

애천의 무대가 된 트래비 분수,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오드리 헵번이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던 스페인 광장의 계단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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