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xmmxix 피렌체에서

보블리 정원(피티궁전)에서 본 두오모와 종탑

08:30분 두오모의 쿠풀라에 오른다. 쿠풀라(cupola)는 이탈리아말로 반구모양의 지붕으로 돔(Dome)과 거의 같은 의미라고 한다. 좁은 통로로 하염없이 오르는 쿠풀라 속에서 젊은 친구들도 헥헥거린다. 나도 죽겠다. 쿠풀라의 경사도가 높아지면 계단도 가팔라진다. 계단이 아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의 순간, 쿠풀라의 정상에 당도하게 된다.

날씨가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일기예보와 달리 쿠풀라 정상에서 본 피렌체는 맑았다.

쿠풀라의 정상은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본 것처럼 넓거나 로맨틱하지 않다. 쿠풀라 위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고, 고된 등정의 끝이라 모두 지쳐 있다. 연인들도 쉴 만한 곳이 없는가 찾고 있다.

쿠풀라를 지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는 고려시대 말엽 쯤에 태어났다. 부모는 관리가 되었으면 했으나, 예술에 뜻을 둔 그는 금은세공사가 되었다. 피렌체 대성당(Duomo di Firenze =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은 1296년에 착공했으나, 1418년까지 돔을 올릴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착공 당시 대성당 위에 올릴 쿠풀라를 로마의 판테온보다 더 크게 설계는 했으나, 대성당 위에 어떻게 그것을 앉힐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아이디어는 없었다. 1419년 대성당 돔의 설계안을 공모하는 대회를 연다. 이때 브루넬레스키의 경쟁자는 로렌초 기베르티였다.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세례당의 ‘천국의 문’1이 천국의 문은 메켈란젤로가 격찬을 한 바가 있으며, 로댕의 ‘지옥의 문’도 여기서 아이디어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공모 콩쿠르에서 기베르티에게 일패를 당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브루넬레스키가 승리하여 설계를 맡게 된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의 판테온의 거대한 돔에서 영감을 얻으려 했으나, 콘크리트 사용법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할 수 없이 브루넬레스키는 벽돌을 가지고 거대한 돔을 만들어야 했다. 이 거대한 구조물의 무게는 37,000톤이며, 4백만 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계를 설치하지 않았고, 외부에 지지하는 벽도 없이 드럼 위에 전체 돔을 만들었으며, 또한 지지할 홍예(虹霓)도 없이 건축된 최초의 커다란 돔이다. 그러니까 허공 위에 버팀대도 없이 차곡차곡 벽돌을 쌓아나간 것이다. 결국 쿠풀라 공사는 1420년에 시작되어 1436년에 완성된다.

로마의 판테온이 117년~128년 원형 돔으로 지지구조와 함께 지어졌다면, 두오모의 쿠풀라는 목재 지지구조 없이 지어진 팔각형 돔이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석재 건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이다.

브루넬레스키는 쿠풀라 공사가 끝나고 쿠풀라 위의 랜턴(돔 위의 위에서 빛을 받아들이는 작은 첨탑) 설계에 공모하여 다시 승리한다. 하지만 공사 시작(1446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한다.

브루넬레스키는 쿠풀라 뿐 아니라, 미술사에서 선원근법의 창시자인 점을 기억해야 한다. 원근법은 이미 그리스 시대에도 무대장치 원근법이라는 것이 있었고, 이른바 측면시나 단축법 또한 원근법의 하나다. 하지만 투시도법이라고도 하는 선원근법은 3차원의 대상물을 평면에 그리고 입체성과 원근감을 표현하려고 시도하여, 기하학적 원근화법, 즉 소실점(vanishing point)의 기하학적 의미를 명확히 포착하는 기법은 브루넬레스키에 의하여 1410년 경에 발견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눈 대중으로 그리는 것 말고 건물의 모양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고 연구를 한 결과, 투시도법을 발견해 낸다. 피렌체의 세례당을 투시도법으로 그려 거기에 구멍을 뜷고 자신의 세례당 그림이 비치는 거울과 실재의 세례당을 맞춰보도록 선원근법을 시현해 보았다고 한다.

건축가였던 브루넬레스키는 의뢰인들에게 자신이 지을 건물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 원근법을 개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에 옮겨놓는 이 기법을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에 도입하면서 르네상스 미술도 발전하기 시작한다.

뒤러의 여인의 투시도를 그리는 제도사(1525년)를 보면, 투시도(선원근법)를 그리기 위하여 틀에 실로 구분선을 만든 도구를 보여준다. 이것이 후대의 화가들이 사용한 카메라 옵스큐라, 카메라 루시다 등 광학장치의 프로토 타입이라고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의 수많은 연구와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 12권의 필사본 저서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서 카메라 옵스큐라(어둠의 방)에 대한 작동 원리 및 이를 이용한 미술에서의 원근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16세기 이탈리아 과학자 지오반니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1504~1615)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빛에 의한 자연 현상의 하나로 보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저서 ‘자연의 마술’에서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어두운 상자 속에 바깥의 풍경이나 사람의 모습을 투사하여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원리는 과학적인 투시(透視)에 따른 미술에서의 선 원근법 및 소실점의 원리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이유로 실제로 17~19세기 화가들은 좀 더 빨리, 그리고 좀 더 정확하게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널리 사용하게 된다. 당시 화가들에게 카메라 옵스큐라에 투영된 이미지는 ‘객관적인 진실’이었던 것이다.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기법은 우리나라 조선시대 1780년대에 이미 도입되어 초상화 제작에 활용되었다고 한다. 실학자인 다산(1762~1836)의 ‘여유당전서’ 속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 기술하고 ‘칠실관화설(漆室觀火說)’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원리를 실험하고 연구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유럽에서 까마득한 동쪽, 조선에서 “까만방의 수정눈”이라 부르며 한 학자가 “까만방 안에서 보는 빛과 그림자에 대한 소고”를 썼다면 당시의 유럽에서는 얼마나 유행했을 것인지 알 수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 이후 화가 코닐리어스 발리는 “그래픽 텔레스코프”라는 도구를 개발했으며, 이후 과학자인 윌리엄 하이드 울러스턴은 1807년에 카메라 루시다(빛의 방)를 만든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경우 방이 필요하지만, 카메라 루시다는 방도 필요없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쓰면 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미술가인 카라바죠, 램브란트 등 무수한 화가들이 광학기기의 도움을 받았다고 유명한 팝 아트 작가인 데이비드 호크니는 주장한다. 카라바죠의 그림에 보이는 인물들 중 동일한 인물이 여러 그림에 등장하고 있으며 동일한 피부질환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카날레토의 산 마르코 광장(1720년대 후반 작)을 볼 때 우리는 한 자리에 고정된다. … 사진을 찍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렌즈를 통해서 건물들을 보면 원근감이 강해지고, 수직선들이 기울어지며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모든 것이 훨씬 멀어 보이게 된다. 카메라가 수행하는, 자연에 대한 광학적 투영은 우리를 이미지의 공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고 한다. 그런데 선원근법이야말로 우리를 그림의 소실점의 바로 반대편, 이미지의 공간 밖에 위치하게 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화면의 환영(공간의 일루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포스트 모더니즘 회화의 핵심으로 본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사진과 공유될 수 없는 요소들에 집중하는데 회화의 미래가 있다”고 주장한다.

두오모의 쿠풀라를 내려오니 조토의 종탑이 보인다. 종탑을 다시 올라갈 자신이 없다. 대신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으로 유명한 산 조바니 세례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두오모 성당 주변을 둘러본다. 성당의 건너편에 두오모 박물관이 있다. 두오모와 당시의 건축방식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다. 이외에 천주교 관련 물건 등도 있으나 쿠풀라 건설과 관련한 내용이 많다. 피렌체에서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한번 둘러 볼 가치가 충분한 박물관이다.

전시물 가운데 낯선 기보법으로 적은 성가책이 있다. 16세기 때의 유량악보인 것 같은데 오선지가 아닌 4선지에 콩나물 음표가 아니라 콩나물 대가리만 있는 음표로 적혀 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박자와 리듬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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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유량악보. 오선지가 아니라 사선지이며, 콩나물 대가리 밖에 없다.

박물관에 도나텔로(1386~1466)의 ‘막달라 마리아’상과 미켈란젤로(1475~1564)의 ‘반디니의 피에타’상이 있다. 두 조각 모두 너무 현대적이었다.

막달라 마리아 상

막달라 마리아 상의 경우 실내조명 탓인지 피빛으로 느꼈다. 수분과 양분이 빠져나가 곧 미이라가 될 나이든 남자가 넝마를 걸치고 거의 쓰러질 듯, 허기와 피로 속에서 손을 마주하고 기도를 하려는 것 같다. 작품의 안내문구를 보고서야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을 알았다. 안내문에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쓰여 있지만, 그녀의 생애 어느 시점의 모습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물론 성경에는 기록된 바 없지만,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막달라 마리아는 광야로 나가 고행을 하며 참회와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때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도나텔로 이 작품은 한 여인의 고행과 뒤틀어진 육신의 추함으로 부터 거룩함이 무엇인지 나타내려고 한 것 같다.

반디니의 피에타 상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가 미켈란젤로가 23~24살 때의 작품이라면, 반디니의 피에타 상은 일흔살이 넘은 1546~1547년에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1555년 미완성인 이 작품을 폐기하려고 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제자가 감춰둔 덕에,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진 예수의 극단적인 콘트라포스트를 볼 수 있고, 미완성의 정 자국 때문에 가려진 아리마대 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얼굴 모습에서 예술이 침묵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중에 본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에서는 성모의 품에 누워있는 예수가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떠오를 것 같다면, 이 반디니의 피에타는 세사람이 예수를 부축하여도 엄청난 중력의 힘에 결국 쓰러지고야 말 것이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쓰러지고야 말 것은 결국 쓰러질 것이라는 단순한 동어반복이, 나중에 보게 될 베드로 대성당의 승천할 것 같았던 피에타에 비하여 나는 받아들이기가 한결 쉬웠다.

박물관을 나온 후 다시 조토의 종탑을 오른다. 쿠풀라를 오른 것보다 한결 낫다. 종탑을 오르는 도중 종이 울린다. 귓청이 떨어질 뻔 했다. 다시 탑 위로 오르니, 옆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이 다 보인다.

종탑 위로 비가 내린다.

종탑을 내려와 티 본 스테이크를 먹으러 간다. 중앙역 뒤에 있는 식당으로 가는 길 내내 비가 내렸다.

식당에서 나오는 스테이크 양은 기본이 1Kg이라고 한다. 그 정도의 양을 구워야 제대로 된 맛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나처럼 혼자 간 사람을 위해서 하프 사이즈로 해주는 곳이라고 해서 갔는데 400~500g 짜리도 크기가 만만치 않다.

피렌체의 티 본 스테이크 맛이 좋다고 하더니, 푸짐하고 맛있게 먹었다.

계산하는 카운터에서 보니 한국에서 활약하는 ‘알베르토’의 사진이 걸려있다. 내가 ‘알베르토’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자신들의 친구라고 카운터에서 계산하며 웃는다.

비는 그쳤고, 잠시 숙소에 들렀다가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갔다.

시뇨리아 광장 >> 베키오 궁전 >> 우피치 미술관 >> 베키오교 >> 미켈란젤로 광장 >> 보블리 정원

다비드 상의 레플리카

베키오 궁전 앞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보았다. 비록 레플리카(복제품)라곤 하지만 적당한 위치(야외)에 벌거벗고 서 있는 다비드의 모습은 말할 필요없이 멋있다. 빗물과 햇빛 그리고 세월에 의해 얼룩진 그 모습이 박물관의 깊숙한 곳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것보다 한결 나았고 생동감이 있다.

우피치 박물관 앞의 골목을 따라 베키오 다리로 간다.

베키오 다리는 영화 ‘향수’에서 나온 모습 그대로 있다.

다리의 사진을 찍는데, 한 친구가 다가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사진을 찍어 주다 느낌이 이상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내 가방을 열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놈들은 도망갈 생각도 않는다. 재미있는 놀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들이다. 이 정도라면 주변에 경찰이 있어도 보호받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다행히 돈과 여권 등은 가방 안의 책이나 잡동사니 때문에 놈들의 손에 닿지 않았다.

베키오 다리와 아르노 강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 오래된 다리) 위에는 ‘향수’에서 처럼 향수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쥐스킨트의 ‘향수’에서 나오는 다리는 시테섬과 파리 1구와 4구를 잇는 오 샹쥬 다리(Pont Au Change)이다. 주인공 그루누이는 다리 위에 있는 발디니의 상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다 떠나고 그만 샹쥬 다리는 무너진다. 소설에서는 다리 위 좌우로 4층 건물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 있었던 샹쥬 다리에는 금은세공사나 환전상 등의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다리는 1858~1860년 사이에 새로 세워진 폭 30M의 도로와 보도 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서는 베키오 다리를 무대로 한 것 같다.

다리 위에서 보는 아르노강은 그다지 넓진 않았지만, 뚝까지 강물이 꽉차 흘렀다. 하지만 파리나 런던에서 보던 것처럼 높은 뚝으로 강은 시민들이 다가가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베키오 다리를 건너고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언덕을 오른다. 갈증이 났다. 광장에서 맥주를 사서 마시며 언덕 아래 오후의 피렌체를 본다. 오후 3~4시의 구름 사이로 해가 나면서 피렌체는 빛과 그림자로 반짝인다.

소란스런 시내에서 벗어나 언덕 위에서 느긋하게 언덕 아래를 바라보자 한가한 기분이 들었고 이것이 여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보볼리 정원을 보러 간다. 언덕을 한참 내려간 뒤, 다시 중세의 성벽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길에는 사람들이 없어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언덕 위에 성벽 틈에 정원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있었다.

“나타나엘이여, 내가 본 그지없이 아름다운 정원들의 이야기를 해주마.
플로렌스에서는 장미꽃을 팔고 있었다. 어떤 날에는 시가 전체가 향기를 뿜는 듯했다. 저녁이면 나는 카시나를 산보하곤 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꽃 없는 보볼리 동산을 거닐었다.”2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65쪽

보블리 정원 위에서 내려다 본 피티궁전

보볼리 정원의 가장 높은 입구로 들어선 것이다. 언덕 밑으로 정원은 차곡차곡 가라앉으면서 그 아래에 피티궁전이 있다. 연못과 분수들과 높은 나무 사이로 산책할 수 있도록 난 길, 나는 왼쪽 길로 걸어 연못이 있는 곳에 당도했다. 노란 햇빛이 연못을 녹색빛으로 밝히는데, 비가 내렸다. 어느 한쪽에 무지개라도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보블리 정원의 동쪽 끝에 있는 연못

한가하고 사색하기에 좋은 정원이었지만, 무엇인가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늘 쫓긴다. 하나 둘 쯤 보지 못하고 놓친다면 또 어떻다고…

야간시내투어를 위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어서 밖으로 나가 식사를 한다. 야키소바를 시켜놓고 우동을 기다린다. 야키소바가 우동이 아니라 볶은국수라는 것을 나는 늘 잊는다.

비가 와서 야간투어는 취소되었다.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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