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xmmxix 노트르담에서

베르갈랑 광장에서 본 퐁뇌프의 모습

시테섬으로 간다. 화창한 날이다. 퐁뇌프 다리 밑에 있는 베르갈랑 광장에서 강변으로 내려앉는 아침의 싱그러운 햇살을 즐겼다. 그 후 지방법원 쪽으로 나가, 섬의 남쪽 오흐페브흐 가를 따라 노트르담 쪽으로 갔다. 화재 복구를 위해 펜스를 치고 길을 막아 놓았다. 다리를 건너자 불타버린 노트르담 대성당의 참혹한 모습이 눈 앞에 들어왔다.

우리들의 성모, 노트르담의 복구 모습 1Notre-Dame은 ‘우리들의 귀부인’으로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석조건물이 탄다는 것이 화재 당시에는 의아했다. 석조건물 내부에 엄청난 목재가 들어있다고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그 자리에 원래 있던 대성당을 허물고 지었다고 한다. 1163년 초석이 얹혀지고 약 180년 후인 1345년 완성되었다고 한다.

노트르담은 고딕양식이다. 고딕양식은 1137~1144년 사이에 생 드니 왕실 수도원장인 쉬제(Suger : 1081~1151)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노트르담이 최초의 건축물인 셈이다. 12세기 후반부터 14세기까지 계속된 십자군 원정으로 유럽과 동방을 잇는 교통이 발달한다. 이에 따라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커진다. 봉건영지(농촌)의 조그만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달하던 기독교가 마침내 도시에서 대성당을 짓게 되면서 고딕양식이 탄생한다. 이제 교회는 단순히 기도만 하는 곳이 아니라, 동방에서 들어온 학문을 흡수 연구하고, 이슬람 의학을 받아들여 부속 병원을 갖추는 것은 물론 성서 및 신학과 관련한 출판 그리고 각종 문화의 중심이 된다. 교회의 거대화와 발전이 바로 대학의 시발이며, 르네상스로 이어진다.

파리대학교는 노트르담 신학 대학의 부속으로 1150년경 세워진다. ‘파리의 교수와 학생 연합’이라는 조합 형태로 시작했다. 파리대학교에 공식적인 지위를 준 첫 번째 문서는 1200년 필리프 2세가 대학에 속한 사람들에게 교회법에 의해서 특혜를 준다는 문서였다. 대학에 속한 사람들은 성직자처럼 여겨졌다. 121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파리대학교에서 수학한 적이 있다고 함)에 의하여 재공인된다. 이 파리대학교에서 유학한 영국인들이 돌아가 세운 대학이 옥스퍼드다.

도시의 발달과 교회의 발전과 함께 한 프랑스 건축양식을 나중(16세기)에 ‘고딕양식’이라는 경멸적인 용어로 표현한다. “고대문화에 심취한 라파엘로와 고전주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중세미술은 퇴행과 비이성적인 탐색일 뿐이었다. … 5세기에 이탈리아를 침공해서 로마의 패망에 일조했던 고트족에 의해 창안된 미술이 바로 중세미술이라고 그들은 확신했던 것이다.”2자닉 뒤랑의 ‘중세미술’ 10~11쪽

1548년 위그노(개신교)들이 성상들을 우상숭배라며 성당 외관을 해쳤으며, 1793년 프랑스혁명 당시 성당 내부의 보물들이 파괴되거나 강탈당했다고 한다. 그 후 복원을 거쳐 여러 차례의 전화(戰禍) 속에서도 잘 버텨왔다. 하지만 2019년 4월 15일 오후 6시 50분쯤, 보수 공사 중이던 첨탑 주변에서 화재가 발생, 화재는 첨탑과 해당 첨탑을 받치고 있는 목재지붕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약 10시간 만인 4월 16일 오전 4시경 진화된다.

런던에 갔더니 빅밴은 수리 중이고, 파리에 오니 노트르담은 화재 복구공사 탓에 들어갈 수가 없다.

예전에 파리는 시테섬에 불과했다고 한다. 시테섬의 크기는 0.225km²로 2.9km²인 여의도 면적(윤중로 제방 안쪽)의 1/13에 불과하다. 하지만 고대의 인구수와 센느강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요새로 이만한 곳도 없을 것 같다. 시테는 프랑스어로 “도시”를 뜻하고, 율리우스 시이저의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이 곳에 파리시(Parisii)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파리시족이 사는 도시가 파리인가 보다.

시테섬은 본래 켈트족이 종교의식을 거행한 제단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로마에서 신전을 세웠고, 로마가 국교를 기독교로 지정한 이후 교회가 들어섰다고 한다. 그 자리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들어선 곳이며, 프랑스 왕가의 상징적인 자리가 되었다.

시테섬을 한바퀴 돌자 콩시에르주리가 나왔다. 콩시에르주리는 8세기 중반까지는 (성혈과 성배에서 예수의 후손이라는) 메로빙거 왕조가 사용한 궁전을 13세기 후반 필리프 4세가 새로이 개축했고, 이후 국왕의 공식 왕궁이었으나 루브르가 완성되자 왕궁을 옮겨갔다고 한다. 1391년 샤를 6세 때 부터 500년 넘게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마리 앙투와네트가 단두대로 가기 전에 이곳에서 75일간 머물렀다고 한다. 즉 왕궁은 감옥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오 샹쥬 다리에서 본 콩시에르주리의 모습

시테섬을 둘러 본 후, 잃어버린 모자를 대체할 캡을 하나 사고, 이포포타뮈라는 스테이크 전문점에서 세트 메뉴를 시켜 먹었다. 고기는 질기고 냄새가 났다. 그리고 값싼 것이라 그런 지 야채도 없고 딸랑 고기와 포테이토만 나온다.

오페라 극장 보러 갔는데, 날은 덥고 속도 불편하여, 전경 만 보고 숙소로 돌아온다. 오르세 박물관에서 오페라 극장의 모형을 보았는데, 그 모형에 의하면 내가 생각하는 무대와 달랐다. 한국에서 본 연극무대는 가로 길이가 무대의 깊이보다 길다. 모형으로 본 오페라 극장의 무대는 가로 길이보다 깊이가 훨씬 깊었다. 그 깊이는 거의 객석의 출입문에서 무대까지의 길이와 같았다. 그래서 각종 장막과 설치물들로 원근감(공간감)을 조성할 수 있었다.

오르세 박물관에 있는 오페라 극장의 모형, 객석의 길이나 무대의 깊이가 거의 같다.

파리에 대한 감상은, 오래된 궁궐과 장중한 역사가,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간을 잠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센느강변에 늘어선 그 장중한 건물들에는 지금 누가 있는지, 그 큰 건물 안에 몇사람이나 일하고 있는지 묻게 된다.

아침에 강 가로 나갔다고 쓰고 싶었다. 그러나 센느강에 가서 강이라고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강이 아니라, 단지 물이 흘러가기 위한 통로, 즉 커다란 수로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강도 제방을 쌓고 수중보를 놓는 등 수로를 닮아가지만, 그래도 한강을 보면 수로라기 보다는 아직은 강이다. 강은 개울과 지천의 물이 흘러드는 곳이지만, 주변 땅을 적시고 모래톱을 쌓고 강뚝을 범람하여 땅을 휩쓸고 뻘을 토해내는 것이기도 해야 하는 자연이어야 하는데, 센느강은 어쩐지 바닥까지 돌로 깔아놓은 것 같고 강이란 물이 흘러가는 길 이외의 의미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재미없다.

이런 통계자료가 있다.(면적은 어떤 기준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런던 인구 8,539천명(광역인구 13,880천명) 면적 1,572km²
파리 인구 2,190천명(광역인구 12,162천명) 면적 105.4km²
서울 인구 9,776천명(광역인구 25,925천명) 면적 605.2km²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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