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xmmxix 몽마르뜨에서

숙소 맞은 편 건물이 새벽 햇살을 맞이하는 모습

뤽상브르란 룩셈부르크다. 보들레르∙릴케와 같은 시인∙소설가∙화가들이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토요일의 공원에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조깅∙태극권 혹은 쿵푸의 투로(套路)를 연습하고 있었다. 분수대 건너편으로는 관악단이 연주를 하고 있다. 악단에는 나이든 사람과 청년들이 섞여 있다.

뤽상브르 공원, 멀리 팡테옹이 보인다.

공원에는 가을이 깊었고, 악단의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공원 옆에 있는 소르본 대학으로 갔다. 영국의 옥스퍼드같지 않다. 좁은 골목 안에 장중한 건물 만 보일 뿐이다.

좁은 골목 안에 있는 소르본 대학 코델리에 캠퍼스. 대학교 같아 보이지 않았다.

생 미셀 광장을 지나 팡테옹으로 갔다. 골목 안에 있는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엄청난 규모다. 공간을 만들기 위해 만든 건축물, 그 텅빔을, 그 공허를 기둥과 돔과 벽으로 만들어 낸 건축이라니.

팡테옹 1루이 15세가 병에서 낫자, 성녀 주느비에브에세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로마의 베드로대성당에 견주려는 야망으로 1755년 건축가 수풀로에게 맡겨졌고, 1790년 완공된다.

팡테옹의 정중앙에 ‘푸코의 진자’가 움직이고 있다. 그 자리에 있던 시간은 정오를 조금 지난 12시 10분, 진자는 12시를 조금 지난 지점과 그 반대편을 왔다갔다 하면서 지구가 자전을 하는 궤적을 그리고 있다. 진자의 길이는 67미터, 추의 무게는 28킬로그램이라고 한다.

팡테옹의 중앙돔, 돔의 중심에 푸코의 진자와 연결된 선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난해한 소설 ‘푸코의 진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푸코의 진자, 내가 갔을 때에는 12시 부근을 진자가 왕복하고 있었다

  내가 진자(振子)를 본 것은 그때였다.
   교회 천장에 고정된, 긴 철선에 매달린 구체(球體)는 엄정한 등시성(等時性)의 위엄을 보이며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진자가 흔들리는 주기는 철선 길이의 평방근(平方根)과 원주율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원주율(圓周率)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력(知力)이 미치지 않는 무리수(無理數)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도의 합리성이 구체가 그려낼 수 있는 원주(圓周)와 지름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기야, 그 고요한 호흡의 비밀을 접하고도 그걸 모를 사람이 있으랴). 그러니까 구체가 양극간(兩極間)을 오가는 시간은, 구체를 매달고 있는 지점(支點)의 단원성(單元性), 평면의 차원이 지니는 이원성(二元性), 원주율이 지니는 삼원성(三元性), 평방근이 은비(隱秘)하고 있는 사원성(四元性), 원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완벽한 다원성(多元性) 등속의, 척도 가운데서도 가장 비시간적인 척도 사이의 은밀한 음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2움베르토 에코 작, 이윤기 옮김 푸코의 진자 1권의 소설 본문 첫장 15쪽

이 소설은 ‘장미의 이름’에 이은 움베르토 에코의 두번째 소설이다. 헨리 링컨, 마이클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공저인 ‘성혈과 성배’를 저본으로 한 소설이다. ‘성혈과 성배’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을 했고, 그 후손이 메로빙거 왕조 등 유럽의 왕가의 혈통을 이루고 십자가 전쟁 이후 유럽내 비밀결사조직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푸코의 진자’는 비밀조직의 비밀을 캐내려는 주인공이 쫓기는 장면이 팡테옹의 ‘푸코의 진자’에서 시작하는 반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루브르의 ‘모나리자’에서 시작한다. ‘성혈과 성배’를 저본으로 하는 만큼 움베르토 에코와 댄 브라운 것의 내용 상 큰 차이는 없다. 댄 브라운이 줄거리 중심이며, 사건의 전개 속도가 독자가 소설을 읽는 시간과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점에서 쉽고, 사건의 긴박감 때문에 재미가 있다.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이라는 텍스트에 다양한 상징과 기호를 새겨넣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푸코의 진자’는 난해함의 절정을 보여준다.

라틴작가들 사이에는 ‘보르헤스’에 대한 열망이 있는 것 같다.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와 읽어 보지 않았지만 ‘알레프’는 보르헤스의 환상소설의 제목들이자, 보르헤스가 만든 단어와 같다. 움베르토 에코의 첫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중세 수도원의 도서관장의 이름은 ‘호르헤’다. 도서관을 맡고 있으면서도 장님이다. 보르헤스의 이름은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이다. 그는 장님이면서도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했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짧은 단편소설(자신의 시력 탓에 긴 소설을 쓰지 못했다. 머리 속으로 소설을 쓸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아주 짧은 단편소설들이다) 곳곳에 카발라 전승을 비벼넣고 또 주석으로 도배해 놓았다. 에코의 ‘푸코의 진자’가 난해한 이유 중 하나는 보르헤스류의 날조된 까발라 전승과 주석 그리고 비의적인 인용문과 세피로드(카발라의 생명의 나무)에 입각한 장절의 구분이라는 얼개 뿐 아니라, 이야기 속에 컴퓨터 코딩, 암호 해석 기법, 점성술, 유럽의 오컬트적인 전승 등을 마구 뒤섞어 놓았기 때문이다.

댄 브라운은 영미작가라서 그런지 보르헤스에 대한 열망은 그다지 큰 것 같지는 않지만, 대신 움베르토 에코에 대한 열망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움베르토 에코는 세계적인 기호학자이며, 9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다빈치 코드’의 전범이 되는 ‘푸코의 진자’나 중세 수도원에서 벌어진 텍스트 살인사건을 다룬 ‘장미의 이름’을 썼다. 그래서 댄 브라운은 움베르토 에코와 비슷한 종교기호학자인 로버트 랭던을 그의 소설의 주인공으로 쓴다.

팡테옹의 지하에 내려가니 퀴리부부의 무덤과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알렉산드르 뒤마의 무덤이 있다. 위고와 졸라의 석관에 손을 대어보니 전기가 오는 것처럼 등줄기가 짜르르하다. (그렇다고 이 두사람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지하에서 나오다 보니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의 무덤도 있다.

팡테옹은 1885년 빅토르 위고의 장례를 계기로 애국의 용도로 쓰이게 된다. 3지하 납골당 입구에는 볼테르와 루소의 자리가 있고, 제국의 고관, 위대한 문학가, 평등을 위한 투쟁 속의 인물, 위대한 인물, 용기와 저항, 과학자 등의 묘지가 있다

팡테옹을 나와 버스를 타고 몽마르뜨 언덕을 향했다. 데모가 있는지, 휴일이라 도로가 막았는지 노선과는 달리, 버스는 루브르박물관을 돌아 오페라에서 다시 본 노선과 합한 후 몽마르뜨로 갔다.

몽마르뜨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고자 했으나, 오후 한 시가 지났고 모든 식당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언덕을 넘어도 어디가 몽마르뜨인지 알 수 없다. 샤크레쾨르 성당 위로 올라가는 계단에 사람들이 앉아 음식들을 먹고 있어서 올라가기 조차 힘들었다.

샤크레쾨르 성당, 몽마르뜨 포도수확 축제를 맞이하여 엄청난 인파가 모였다.

FETE DES VENDANGES DE MONTMARTRE
(2019 Montmartre Grape Harvest Festival)

10월 9일부터 13일까지 수확 축제인데, 오늘은 그날들 중 토요일이다. 입추의 여지가 없다. 노점들이 성당 아래로 가득한 데, 전부 불어 메뉴라서 사 먹을 수가 없다. 성당 내부를 구경하고 밖으로 나와 파리 전경을 찍은 후 계단 아래로 내려가 다시 몽마르뜨를 찾는다.

결국 몽마르뜨의 상징과 같은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주는 곳을 찾았다. 하지만 그 주변이 예술적인 영감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주변 분위기는 이발소에 걸려있는 풍경화 분위기라고난 할까? 그곳을 지나다 보니 결국 한바퀴를 돌아 다시 성당 아래의 노점들과 마주쳤다. 불란서식 샌드위치를 하나 사서 먹는다. 바케트에 치주와 하몽과 같은 것이 들어있는데 바케트가 딱딱하다 보니 소화도 잘 안되는 것 같다.

몽마르트 언덕, 걸려 있는 그림들이 이발소 그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몽마르뜨 언덕을 내려와 묘지에 들렀다. 언덕 위는 소란했지만 묘지는 그늘지고 조용하다. 그래서 기분이 편안해졌다. 죽음이 낼 수 있는 소리란 바로 정적 아니겠는가?

가족 납골당이 많았다. 낡은 묘비 옆에 문득 새로운 묘비가 세워진다. 이끼가 끼고 거미줄과 먼지의 무게로 틈이 벌어지고 주질러 앉는 묘소가 있는 반면, 몇세대가 지났을 것 같지만, 시들지 않은 꽃과 사진 그리고 애정어린 장식물들이 가득한 묘소도 있다. 묘비에 기록된 세월은 1996년에 끝나 있다.

조용한 몽마르뜨 묘지, 좀 앉아서 쉬었어야 했다.

23년의 세월은 잊혀지거나 잊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잊혀지기에 너무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후의 햇살 속의 무심한 나무 그늘과 그 속을 스며드는 정적은, 죽음이란 아무런 입을 가질 수 없어서 그냥 외롭게 느껴졌다.

입이 없어서 아무런 말이 없는 묘지와 묘지, 묘비와 비석들 사이로 삐에로 동상이 보였다. 잘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삐에로는 원망이나 광기와 같은 눈으로 묘지에 들어온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삐에로가 있는 무덤은 세계적인 무용가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것으로, 삐에로 모습은 ‘목신의 오후’의 공연 때의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후원자였던 디아길레프의 방해로 무용을 더는 하기 힘들어진 니진스키는 곧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다른 사람과의 소통도 어렵게 되었고, 결국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는다. 그는 30년간 정신분열증으로 고통을 받다가 1950년 60세의 일기로 죽는다. 그는 불과 10년 정도 춤을 추었으나,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니진스키의 무덤 4‘목신의 오후’ 공연 때 모습일지도 모른다. 저 광대 모습의 눈을 바라보다가 니진스키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무덤 앞에 서 있자, 한 사람이 다가와 누군인지 아느냐고 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한 때 위대한 무용가 아니었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뚱뚱한 몸으로 발레리나가 인사하듯 목례를 보내며 나를 스쳐지나갔다.

묘지에서 나와 오후의 더위를 지나 바토무슈에 승선하기 위하여 센느강 가로 갔다. 배에 승선하고 나자, 힘들었던 하루가 가고 좁은 센느강에도 강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배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시테섬까지 올라갔다가 에펠탑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서서히 하루도 저문다.

시테섬의 상류 쪽에서 바라 본 노트르담 5바토무슈에서는 성당이 불에 탄 것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저녁이 몰려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캐리어를 하나 구입했다. 캐리어 하나를 바꾸니 짐을 관리하는데 훨씬 편해졌다.

201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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