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과 낡은 전철을 갈아타고 베르사유 궁전에 갔다. 먼저 정원을 보고, 트리아농의 영지, 그랑 트리아농과 프티 트리아농을 본 후 베르사유 궁전을 보았다.
베르사유의 정원을 거닐 때, 헨델의 음악과 같은 바로크 음악이 정원으로 흘러나왔다. 광활한 베르사유 정원을 바라보며 바로크 음악을 들으니 그것 참! 제 맛 같다.(하지만 나는 바로크나 고전파 음악을 싫어한다)
바로크는 가톨릭과 신교가 분열하고, 절대왕권이 수립하는 와중에 5대양 6대주가 전지구적 질서 속에 편입되어가는 시기에 나타난 양식이다. 건축면에서는 로마가 반종교개혁 노선과 일치하는 바로크식 교회 건축(일 제수교회)에서 발현되었다면, 불란서는 절대군주제의 요구에 상응하는 궁정건축(베르사유)에 나타났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를 지은 것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지, 사적인 건축 취미 만은 아니었다. 국내정치에서 무한한 권위를 얻고자 했던 그는 귀족계급들을 불러와 ‘궁전의 포로’로 만들고자 했다. 왜인들의 참근교대(參勤交代)와 비슷하지만, 귀족들이 베르사유에 기거하면서 왕의 곁에서 잘 보이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또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민간인에게 개방하여 왕의 권위를 선전하고자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겉 모습을 위주로 짓다보니 난방에 문제가 심각했다고 하며, 궁전 안이 귀족과 민간인이 함께 섞여 도떼기 시장판으로 사생활 보호가 취약하여 루이 14세 외에 다른 왕들은 이곳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정하지 않았던 트리아농의 영지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태양왕 루이 14세를 지나 그 다음 다음의 왕인 루이 16세에 왕정이 무너진 것은 루이 15세의 정부인 마담 퐁파드르(1721~1764)의 역할도 꽤 컸을 것이다. 그녀는 평민 출신으로 여후작에 올랐고, 미모는 물론 풍부한 교양을 갖추고 있어서 바스티유 감옥에 두번이나 투옥된 볼테르를 지지하는 등 백과전서파를 후원하고 루소의 자유주의 사상이 프랑스 내 널리 퍼질 수 있도록 했다. 또 오랜 숙적이었던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오스트리아 공주였던 마리 앙뜨와네트와 루이 16세가 결혼할 길도 열어준 셈이다.
루이 14세 때가 바로크 시대라면, 그의 증손자이자 다음 왕인 루이 15세 때부터 로코코 시대가 열리는데, 마담 퐁파드르가 또한 큰 역할을 했다.
로코코는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 위주로 제작되었다. 프티 트리아농에 있는 아담한 건축과 그 안의 가구나 소품들을 보면 로코코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반면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은 바로크적이다.
프티 트리아농은 마담 퐁파드르를 위해서 조성하였지만 그녀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마리 앙트와네트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영국풍으로 장식하고 살았다고 한다. 트리아농의 영지의 정원과 건물들은 로코코적으로 아담하고 섬세할 뿐 아니라, 관광객들이 없어서 두시간 동안 산보를 하며 몹시 즐거웠다.
영지의 정원을 산보하고 난 후,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서자 권위와 격식 등을 느낄 수 밖에 없어서 진부했다. 장식은 찐한 데, 그다지 품위가 없었다. 왕의 방이나 거울의 방, 전쟁의 방에 있는 그림들 모두가 작품이라 할 만한 것들이 없다. 궁궐 안을 걷다보니 왕 노릇하기도 피곤하고 재미없었겠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로 갈아타는 앵발리드역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뻔 했으나 가방에 꾸겨넣은 자켓 때문에 다행히 잃어버린 것은 없다.
2019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