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기041125HK

홍콩이 바닷가의 동네라는 것을 잊었을 지도 모른다.

나의 문제는 일찍 일어난다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피로를 떨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피로감을 달고 일어난다. 피로 속에 내려다 보는 6시의 좁은 바다와 완차이의 콘벤션쎈터의 주위를 희뿌옇게 감싸고 있는 조명은 아침이 아직도 멀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서울의 아침이 서서히 온다면, 이 곳 바닷가의 아침은 불현듯 온다.

북창에 놓인 빅토리아 하버로 빛이 들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되어 아침 햇살로 가득하다.

호텔을 빠져 나와 사무실까지 걷기로 한다. 하코트공원을 지나 퀸스로드 쎈트랄로 가고자 했으나, 잠시 착각을 하여 결국 ‘인민해방군사령부’가 되어버린 웨일즈왕자빌딩 앞을 지난다.

아침 빛은 점점 더 집요해졌고 공원이나 길 가의 나무가지 사이에서 새들이 조그만 소리로 울었다. 잎 사이에 이슬이 맺혀있는 것을 보니 아직도 여름이 끝나지는 않았다.

사무실에서 침사추이로 가기 위하여 스타페리 부두로 갔을 때, 고공의 태양이 아스팔트와 건물들의 곳곳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마천루의 사이에 불과 몇평의 공터 위로 떨어지는 태양의 발광은 차라리 애처롭기도 하지만, 배에 오르기 위하여 남국의 한 낮을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배에 오르자 투엔문까지 열린 하버의 서쪽이 보였다.

하버의 서쪽은 넓었고 하오의 빛이 바다 위로 내리면 신계를 둘러싼 연봉들이 빛의 광막 저쪽에서 그림자로 지워지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사무실에서 가슴이 답답하면 부두로 나가 배를 탔다. 줍아 터진 바다와 배들이 지나는 것을 보았고, 홍콩 컬쳐센타 앞 광장에서 홍콩섬의 마천루의 유리창에 석양의 빛이 물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세월이 지남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홍콩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토록 절실하고 외롭던 시절은 이미 까맣게 잊혀진 듯 하다.

그때의 사무실은 정적으로 깊고 서늘했다. 때론 사무실 저 쪽에서 전화벨 소리가 주인을 찾고 있어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에어콘의 냉기는 사람이 줄어들자 사무실의 구석까지 스며들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하여 스웨터를 입고 볕이 드는 창가로 가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몇명 남지 않은 동료가 와서 “요즘 한가한 것 같아”하고 이야기 했다. 나는 말했다, “할 일도 없어, 돈이 없으니까.”

1997년 11월에 홍콩에서 IMF연차총회가 있었고 강경식 부총리가 홍콩으로 왔을 때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그 후 은행들은 크레디트 라인을 걷어 가기 시작했다.

언어가 실체를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그 때였다. 그들은 신용을 끊으면서 돈의 상환을 요구했고, 나는 내가 알아왔던 것들의 기반이 얼마나 허무한 가를 알았다. 나는 회사를 위해서 거짓말을 했고 은행은 나를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결국 나 스스로도 나를 믿을 수 없었다. 불신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 표류하고 있었고, 그 세상은 모욕과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은행 직원들과 나는 낮에는 서로 욕질을 해가면서 살기 위해서 기를 쓰면서도 저녁에는 식당에서 함께 술을 하면서 조국 대한민국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서글펐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울한 것이었다. 서로 아이엠에프의 암울한 터널이 얼마나 길겠는가를 점쳤으나 그것은 생각보다 길고 멀었다.

1998년 3월이 되자 신용장 개설도 할 수 없게 되었다. Back to Back 방식으로 겨우 영업을 이어가는 동안 주재원은 본사 소환이나 전보발령이 났고, 현채인에 대한 해고가 이루어 졌다. 그리고 사무실의 책상들이 주인을 잃었고, 책상들은 매일 조금씩 어둠 속으로 스며들면서 흉물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직원들을 사무실의 한 가운데로 몰기 시작했다. 그것은 깊은 밤을 지내기 위하여 모닥불에 모이는 제식과 같았다. 그들의 초췌한 얼굴을 보면 서글퍼졌다. 그들은 몰랐다. 단지 영업을 할 수가 없고 신용장 개설이 안되고 자금에 문제가 있으며 한국이 아이엠에프로 힘들다는 정도만 알 뿐이었다.

오월이 지나고, 칠월이 되자 모든 것이 정지했다.

내가 관리할 더 이상의 돈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자 은행에서 더 이상 전화가 없었고, 본사도 더 이상 해외지점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나는 사무실의 냉기를 건디지 못하여 스웨터를 사 입었다. 그러나 추위는 단순한 기온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런 희망도 더 이상의 불안도 더 이상 할 일도 없다는 데 있었다. 나는 창 가로 가서 도로에 지나가는 차를 보거나 남국의 여름 속에 짙어져 가는 산정의 수림을 쳐다보곤 했다.

그러다가 예전에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생각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번은 누군가 고통총량불변의 법칙을 이야기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인생에 주어진 고통의 총량은 불변이다. 그래서 환란의 시기에 겪는 고통은 나머지 시간의 고통이 줄어듬으로써 보상받게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지금의 고통에 좌절하지 마라.

이것은 절대적으로 진실인 듯하면서도 허무하기 짝이 없는 논리였다.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주어진 고통의 총량이 훨씬 초과한다면 앞 날에 더 큰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는 음울한 추리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은행과 상호공생의 방식을 논의해가면서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모닥불로 모이게 한 직원들도 어느 덧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의지했다. 아무 것도 믿을 것은 없었지만, 함께 불우한 시절을 보낸다는 점에서 그들과의 동지의식은 한층 고양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안정되자, 나는 홍콩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홍콩에 출장을 온 것이다. 배로 건너는 하버는 예전에 느꼈던 감흥을 더 이상 불러오지 못했다.

나는 몇군데의 거래선을 방문하고 현채인들과 점심을 한 후, 후임과 거리를 거닐면서 어떻냐고 물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가지 않는다고 불만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은행 업무가 없어서 오래 된 현지 자금담당 직원의 거취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고 했다.

다 잘 된 일이겠으나, 그 직원은 아이엠에프 때 내 옆에 항상 있어 주었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는 너의 회사다. 네가 이십년 가까이 이 곳에 근무하는 동안 본사의 자금담당들이 왔다 갔고 너는 항상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때로 놀러 왔을 수도, 일을 하러 왔을 수도 있으며 약간의 추억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지만 너는 여기에 항상 있을 것이다. 나도 돌아갈 것이며, 그리고 네가 여기에 있을 것임을 기억할 것이다.

세상은 항상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돌아가지는 않지만, 때로 그런 것이 재미있기도 허무하기도 한 것이다.

사무실의 북창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다.

11월 25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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