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xmmxix 미술관에서

아침에 숙소 앞에서 6번 버스를 탔다. 피카딜리 서커스를 지나다가 그린 파크에서 무작정 내렸다. 이 도시의 윤곽을 그릴 수 없었다. 내게는 보이는 곳이 런던의 끝이었다. 아무튼 영국의 공원을 느끼고자 내렸다. 공원에는 가을이 깊다. 공원 건너편에 높은 탑이 보였다.

빅토리아 메모리얼 상단부

버킹엄 궁전 앞 빅토리아 메모리얼이었다.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더몰 가를 따라 걷는다. St. 제임스 공원 입구가 있어서 공원에 들어섰다.

공원에 가을냄새가 가득했다. 연못에선 물새들이 울었다. 살찐 다람쥐(청솔모같기도 하다)가 사람들 앞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한다. 키위같이 생긴 새가 내게로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데, 가진 것이 없었다. 모르는 척하자, 새는 투덜거리며 물러났다. 왠지 미안하다.

영국수상 관저

연못 건너편 호스가드 가로 나가자, 수상관저인 다우닝 가 10번지가 보인다. 주변 건물들이 권위적인 탓에 수상 관저라기 보다 가정집 같다. 다시 공원을 가로질러 더몰 가 쪽으로 나가자 거대한 석조건물과 그 사이로 계단이 나 있는데, 계단 위에는 ‘요크의 공작’이라는 높은 기둥이 있다. 계단을 올라가자 팔몰이다.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더 가자 트라팔가 광장이고, 옆에 내셔널 갤러리가 있다.

내셔널 갤러리

갤러리(gallery)는 ‘갤러리아(galleria)’에서 유래했다. 지붕이 있는 긴 복도인 회랑을 뜻한다.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가 자신의 회랑을 개방해 자신의 소장품을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이후 갤러리가 미술관, 박물관, 화랑 따위의 의미로 사용된다. 바로크 시대에 들어서면서 가문을 위엄을 선전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궁전이나 귀족들의 저택에 갤러리 하나 쯤 마련해 두어야 행세를 할 수 있게 된다.

미술품 거래는 일찍부터 있었지만, 거래는 몹시 제한적이었다. 오랫동안 미술 작품은 주문 제작이었다. 고객이라고는 왕과 교회, 그리고 귀족, 때때로 일부 부유한 상인들이 전부였다. 이들은 예술이라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당시에 Art라는 것이 존재했는지는 모르겠다), 집을 장식하거나, 이름과 권위를 드날리기 위하여 그림에 접근했다. 고객이 적은 만큼 시장도 형성되지 않았고, 작품 또한 주문제작인 탓에 자유작가는 없고 궁궐과 교회의 귀족들의 전속작가가 대다수였다. 주인님이 오더를 내리면, 그에 따라 작업을 하기 위한 조(組)를 꾸민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등 작업의 규모가 크고 현장에 공간이 확보될 경우 현장에 공방(아틀리에)을 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아틀리에(atelier)에서 작업을 한다. 아틀리에는 길드제에 입각하여 운영됐다. 도제들은 안료의 원료가 되는 돌을 갈고 빻아 고운 가루를 만드는 등 품이 많이 드는 안료를 준비했고, 직인들은 안료에 계란 따위의 메디움과 유화제를 섞어 물감을 때에 맞춰 준비하고, 돛을 짤라 캔버스를 만들거나, 나무로 그림을 그릴 패널을 제작한다. 장인들은 자기에게 분담된 패널에 그림을 그린다. 물론 마스터가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고용주와 작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주인의 구미에 맞게 제작하기 위하여 그림의 이야기와 구도를 마련한다. 이러한 이야기와 구도에 적절한 안료의 선택에서 부터 채색작업에 이르기까지를 지휘하면서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 마스터의 일이었다. 다빈치는 열네살 때 베로키오의 제자가 되었다가 스물여섯에 독립했다고 한다. 이는 열네살에 견습사원으로 돌을 갈기 시작한 지 어언 십이년째인 스물여섯에 드디어 마스터가 되어 아틀리에를 꾸몄다는 이야기다. 사생아로 태어나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초고속 출세였을 것이다. 

이런 폭이 좁은 미술시장에서 미켈란젤로와 같이 성질 더러운 사람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천재성 때문이지, 당시의 작업 환경은 예술가의 창조성 따위는 말할 가치도 없었다. 고객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작가 자신은 물론 공방 식솔 모두가 쫄쫄 굶어야 했다. 화가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예술이 어쩌고 저쩌고는 용납되지 않었다.

요즘의 디자인을 당시에는 디세뇨(Desegno)라고 했지만, 양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디세뇨는 계획, 의도, 목적과 데생(Desseing)으로 ‘회화를 위한 계획,밑 그림’을 뜻했다. 이탈리아의 미술 이론가 란칠로티(F. Lancilotti) 가 ‘회화 개론'(1509)에서 디세뇨가 ‘예술가의 마음 속에서 작용하는 창조적인 사고’라고 주장한다. 다른 공예품의 제작에는 디세뇨가 필요없다고 폄하하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하며, 회화가 지적인 작업이며, 인문학에 필적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디자인은 상업적이고, 고객의 요구에 선행한다. 벽지 두께의 TV나 와장창 구겨지는(접는) 스마트폰을 만들어 달라고 한 적이 없다. LG와 삼성이 만들어 놓고 “사고 싶지”라고 고객의 니즈를 창조한다. 즉 레디메이드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디세뇨는 철저하게 오더메이드이다. 르네상스 때나 바로크, 로코코 시대에 오더메이드가 아닌 작품은 없다. 있다면 습작이거나, 완성품에 접근하기 위한 수많은 밑그림들이다. 혹은 한가한 마스터가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작품을 하나쯤 마련할 수는 있다. 

18세기 후반, 미술품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이전에, 갤러리에 걸린 그림들이란 모두 왕가나 귀족들이 화가를 불러 ‘증명사진 하나 폼나게 그려줘’라거나, “이 벽이 좀 심심한 데, 예수님과 우리 수도사들이 함께 식사하는 분위기를 연출하면 어떨까?” 했고, 그토록 초상화가 많고, 벽이 그림으로 도배된 이유이기도 하다.

18세기 후반이란 자본가 계급이 앙시앙 레짐을 혁명으로 깨부수고, 농노의 신분을 철폐하여 공돌이를 만들고, 자유시장경제에 바람을 불어넣던 시기였다. 더불어 튜브 물감이 본격 생산되어, 아틀리에에서 물감을 만들지 않아도 이젤과 캔버스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후원해 줄 스폰서가 없다면, 바르비종1파리 교외의 퐁텐블로 숲에 있는 바르비종 마을로 여기로 이주했던 테오도르 루소, 카미유 코로, 프랑수아 밀레 등 풍경화가 그룹을 바르비종 화파라고 한다.의 들판에서 멋진 풍경화를 그려 파리 시내의 화랑에 가서 돈많고 무식한 자본가들에게 팔면 되었다. 그림 또한 자본주의와 함께 양산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즉 스케치북과 4B연필, 그림물감을 들고 어디든지 가서 보이는대로 그리면 되는 것이 그림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아이들이 도화지 펼쳐 놓고 크레용으로 ‘엄마, 아빠, 나, 오각형의 우리집’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이전의 그림이란 조선의 도화원이나 북송의 화원의 전문가의 그림이었다. 즉 자와 같은 것으로 패널 위에 선을 긋고, 선원근법에 따라 사물을 배치하고, 때때로는 광학기구를 사용하여 입체감을 부여하고 그리자유 기법으로 단색을 먹이고 그 위에 채색하는 등 정교한 작업과정이 필요했다.

이러한 작업은 인상파로 오면서 아카데믹한 화화양식에 반대하면서 선보다 붓터치에 의한 색면이 중요하다고 색상을 넓게 사용하고, 알라 프리마(Alla Prima) 즉 ‘단숨에’ 한번 붓질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오히려 선호되었다. 아카데미의 입장에서 보면 개판으로 그렸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미의 기준은 니콜라 푸생(1594~1665)의 “회화는 시처럼”의 읽는 회화로, 이성에 호소하기 위하여 색채가 아닌 형태와 구도를 강조했다. 푸생은 “정말로 일어나는 것처럼 그릴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화면을 이상적으로 구축했고, 이러한 이상화가 프랑스 미의 규범이었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 전위(아방 가르드)의 선구이자, 인상파의 선배인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는 “천사를 본 적이 없어서 그릴 수가 없다”고 한다. 푸생이 머릿 속의 것을 (아틀리에 안에서) 그린다면, 쿠르베는 (아틀리에의 밖에서) 실제로 본 것을 그린다는 입장이다.

그러다 보니 인상파의 그림이 미완성(Non-fini)라는 비난에 직면하긴 했지만, 그림이 보다 직관적이고 생생한 것이 되었고, 그동안 잘 나갔던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의 작품들은 얼마 안 지나 이발소로 밀려나게 됐다.

이렇게 미술시장이 형성되고 작품이 시장에서 교환되면서, 미술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미학이라는 요상망측한 철학도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박물관과 달리 갤러리는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곳으로 고착된다.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으로써 그런 점에 충실하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아 뭐라고 단순히 말할 수 없다. 미술 또한 진보한다는 것을 목도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은 고등학교 때 한국에 전시된 것을 봤던 때의 느낌과 같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의 느낌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일까. 단지 합정동을 물들이던 노을을 바라보던 느낌만 기억하는 것이고, 모네 그림의 노을과 터너 그림의 노을은 단지 그 느낌을 변주해내는 악보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만약 합정동의 노을에 대한 느낌을 해석해 낼 수 있다면, 터너의 것과 모네의 것 그리고 합정동의 노을, 그 울림들의 차이를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의 머리는 나의 가슴을 이해하거나 품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느낌은 그냥 느낌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

갤러리 안에서 램브란트의 어두움 속의 빛과 루벤스의 밝음을 보았으나, 카라바죠의 그림은 찾을 수 없다.

인상파와 세잔느∙고흐의 그림들, 컨스터블의 그림들을 보았다. 쇠라의 것으로 알려진 점묘화법으로 그린 테오 반 뤼셀베르그2Théo van Rysselberghe (1862~1926) 벨기에 출신의 신인상파 화가해안풍경과 악셀리 갈렌칼렐라3Akseli Gallen-Kallela (1865~1931) 핀란드 출신의 사실주의와 상징주의 화가Keitele 호수는 영적이다. 그림이 지닌 침묵과 정적 때문이 아닐까?

허기가 져서 갤러리에서 나와 차이나타운에서 구룡식 뷔페를 먹었다.

차이나타운에서 멀지 않은 대영박물관에 다시 갔다. 2층으로 올라가서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물을 본 후 이집트의 미이라를 보았다.

삶은 죽음을 어쩌지 못한다. 반면 죽음은 삶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우리는 죽음 저 편에서 삶을 바라보지 못하지만, 삶 쪽에서 죽음을 더듬는데, 그것이 삶을 뒤흔든다. 다 산 자의 진실이고 허구이지, 결코 죽은 자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집트인은 죽음 위에 삶을 덧붙이기에 혈안이었는지, 아니면 삶에 죽음을 덧붙이는데 급급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죽음을 위해서 살았던 것 같다. 죽음을 위해서 사는 얼마되지 않는 사람 탓에, 살기에 급급한 무수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죽어갔다.

파피루스에 쓰인 이집트 문자

이집트 ‘사자의 서’의 일부분이 쓰여있는 파피루스인지 면포인지를 보았다. 그것은 상형문자라기 보다 알파벳의 필기체처럼 보였다. 조금 더 가자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이 보였다. 점토판의 위를 수놓은 쐐기(설형문자)들은 글보다 모양으로 무늬를 펼쳤고 너무 촘촘하여 쐐기(글자)와 쐐기(글자) 사이를 변별해 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용도에 따라 점토판마다 글자를 새기는 방식도 다양했다.

점토판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서(수메르 점토판)에는 ‘보리 29,086자루 37개월, 쿠심’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초기 단계의 쓰기는 사실과 숫자에 한정되었다. 인간 행동의 제한된 영역에 속하는 특정 유형의 정보만을 표현할 수 있는 불완전한 문자체계였다. 즉 현대의 수학이나 음악 기호처럼 불완전했다.4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219~221쪽 중에서 그 문자로는 연애편지도, 詩도, 진리에 대해서 쓸 수 없다. 단지 철저하게 실용적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래는 읽을 수 없는 글자로 쓰여진 책이다. 그러니 책이 아니라 그림이거나 공예품이다. 오래된 문서의 철저한 실용적임에 대하여, 이 책의 이러한 무용함 또한 부적처럼 신묘하게 느껴진다.

읽을 수 없는 문자로 쓴 책

왜 문자에 매료되는지 모르겠다.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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