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詩 두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 1954.10.05 作 '거미' -

일반 사람은 관습이나 교육에 따라 사물이나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세계와 불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1 강신주

김수영은 아내 김현경과 1949년부터 동거를 하다가 1950. 4월에 결혼한다. 얼마 후 6.25전쟁이 나고 인공치하에서 수영은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잡혀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1953년 겨울, 반공포로로 풀려난다. 시인 박인환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아내를 찾았을 때, 아내는 다른 사람도 아닌 이종구(김수영과 동경 유학시절 한 방을 쓰기도 했고, 김현경을 수영에게 소개시켜 주었다)와 함께 살고 있었다. 수영이 죽은 줄 알고 다른 남자와 동거를 했던 아내는 다음 해 이종구와 헤어진다. 위의 詩 ‘거미’는 수영이 현경과 다시 살림을 시작한 즈음에 쓴 것 같다.

이 詩에서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절규하지만, 아마 그도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늘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욕망은 바로 타인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수영이 말하는 으스러진 풍경이란 전쟁의 폐허 뿐 만 아니라, 자신을 으스러트린 세상을 말하는 것 같다.

강신주는 틀렸다. 수영이 세상에 대하여 불화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세상이 수영에게 적의의 이빨을 드러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자신에게 퍼붓는 모욕과 같은 아내에게 때때로 손찌검을 하고, 방 구석에서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는지도 모른다.

다음의 시를 읽으면, 위의 상황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수영이 조금 편해진 것 같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체념과 같이 세상의 한 자락을 받아들인 것 같기도 하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우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 늦은 거미같이 존재 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 1956년 作 '구름의 파수병' 중 일부 -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다. 이런 자신감이 얼마나 많은 자괴감과 설움에서 탄생했는지, 얼마나 강한 의지와 냉정한 지성을 필요로 했던 것인지.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우리에게 “자기 눈을 가리키며 ‘나는 시인이다’고 당당하게 사자후를 터뜨렸던 시인이 있다는 사실이. 2 1968. 6.17 <경향신문> 6면 <정열의 시인 : 故 김수영 씨의 발자취> 중

김수영은 1968.06.15일 저녁 친구들과 술 한잔을 한 후, 집으로 귀가하던 길에 인도로 뛰어든 좌석버스에 치여 교남동의 적십자병원에 옮겨졌으나, 다음날 새벽 48세의 일기로 영면한다. 위의 경향신문의 기사는 한 시대의 위대한 시인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한 줄이다.

그가 교통사고를 당한 마포구 구수동은 시에서 밝힌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 그리고 두 아들이 살던 그 곳 일 것이다.

두 아들 중 맏이는 1950년생이고, 둘째는 나와 동갑인데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다.

이 시에도 수영은 자신을 거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내를 애처롭다고 한다. 아내가 애처로운 것은 그저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가려고 함에 쑥스러운 탓이다.

김수영은 그것을 몰랐다. 남들도 다 외양만이라도 남처럼 갖추려고 허겁지겁이라는 것을…

존경하는 시인 김수영님을 마치 친구처럼 들먹인 점 용서바랍니다.
글을 쓰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이해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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