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노래

헤르메스는 신들의 뜻을 전달하는 전령이다. 또한 죽은 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영혼의 인도자이다. 그는 아르카디아에서는 마법의 신이었으며, 또 나그네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헤르메스는 항상 올림푸스 산 속의 한 쪽 귀퉁이에 초라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어느 신보다 탁월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그는 은비한 것을 좋아했거니와 또 교활했기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헤르메스는 신 중에서 가장 신비하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차용한 아폴론의 신탁,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에는 자명함이 있다. ‘자 봐라! 너 아는 것이 없지 않느냐?’ 하는 자명함. 이와 같은 자명함은 이성에 기반을 둔 자명함일 것이다.

이성에 의한 관념의 로직 안에서의 사고는 판명성을 추구하지만,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에 대한 이해라는 면에 부딪힐 때는 명석한 이해란 불가능해진다. 이해라는 측면은 때론 헤르메스에 의하여 전달된 신탁을 해석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넌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 ‘그래 나는 돌대가리라서 그런다 왜?’라는 사건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해석학(Hermeneutics)은 성서나 고전의 올바른 해석을 중시하는 근대의 인문학적 전통 속에서 발아했지만 19세기에 들어와 뵈크와 술라이어마허에 의하여 이해와 해석의 보편적인 학으로 정립되었다.

딜타이가 역사적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 ‘추체험’을 통하여 ‘이해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고 부르짖은 이후, 하이데거는 인간의 역사적 세계를 심리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의 차원에 머물렀던 것을, 존재의 의미를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는 철학의 방법으로 심화시켰다.

딜타이는 과거의 문헌이나 역사적 정신활동은 현재의 환경과 나의 경험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만큼 텍스트가 형성된 그 시점으로 이해의 지평을 쉬프트시켜야 보다 나은 이해가 되며, 이해의 지평을 옮기기 위해서는 과거의 텍스트들과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신약의 해석에 있어서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정부로 부터 유대지방의 소요사태와 관련하여 두번이나 경고를 받은 상태에서 예수에 대한 치죄가 있었고, 당시 스타로 부상한 예수를 둘러 싼 젤롯당과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이해하고, 예수가 국제도시인 갈릴리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성서해석이 신의 말씀이라는 신화적 차원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이고 생동감있는 역사문헌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점에서 딜타이의 텍스트와의 상호교호를 통한 추체험은 방법론으로써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라는 말로써 한 인간의 실존은 자신의 경험과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세계는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된 세계이다. 인간이 일정수준 이상의 자극(역치)을 받아야 감각을 느끼듯, 인간의 뇌 신경(이해력) 또한 일정 수준 이상의 정보가 없을 경우 어떤 텍스트가 들어와도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떤 이해를 위해서는 선-이해(선입관)가 필수불가결하다. 이러한 선-이해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해를 왜곡시키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한다. 이러한 면에서 이해는 없고 나름대로의 해석 만 남을 뿐이다. 반면 보다 나은 이해로 다가가는 해석학적 순환은 지속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지적 능력이 성장함에 따라 어떤 외부의 정보가 어렸을 적보다 원활하게 이해되는 경우가 있는 데 이것은 어떤 면에서 해석학적 지평의 확대에 해당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점은 데카르트 이후 이성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인간상보다는 천차만별의 개별적인 실체로서의 인간군상을 그려낼 수 있었다.

하이데거의 이론에서 볼 때, 모든 보편적인 관념(여호와나 예수도 포함)은 각 개인의 세계 속으로 용해되면서 보편성의 허물을 벗고 개별화된다. 따라서 절대자인 신은 보편적인 관념이 되었다가 각 개인 속에서 수십억개의 개별자인 여호와로 변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보편적인 관념은 무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멘.

그 후 가다머가 나와 ‘진리와 방법’을 정말 이해 안되는 난해한 술어로 집필하고, 리쾨르와 장대한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논쟁을 펼치면서 역사와 실존 양면에 걸쳐 난해한 현대철학의 세계를 새로 구축해 나가고 있다.

헤르메스는 네이버의 날개달린 모자를 쓰고 날아다니면서 ‘너 이것 아니?’하고 질문을 하거나 때론 악기를 만들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남의 것을 훔치기도 했다.

그러나 헤르메스의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진리를 찾느냐 얘들아
너희는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걸
때론 진리를 찾긴 하여도
결국 알지 못할텐데
내가 너희를 레테의 강으로 이끌 때까지…

This Post Has 2 Comments

  1. 여인

    알레테이아가 진리이긴 하지만, 은님의 포스트에서 본 알-레테-이아 즉 레테의 강을 건너기 이전 망각 이전의 상태, 즉 본체계(Idea계)와 상통하다는 것은 일견 일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레테 이전을 상실한 자들, 그래서 보편이 아닌 개별로써 세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우울을 지닌다. 그래서 세상은 천천차만만별로 움직이는 것이고 오욕과 칠정에 물들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정적과 고요에 감싸인 이데아의 세계 속에서 사는 것보다 비극적이긴 하지만 훨씬 더 사는 느낌이다.

lamp; 은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