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이라는 것

한강의 시를 읽었다. 그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의 시들 또한 그녀의 소설처럼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마 산다는 것 혹은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나보다 훨씬 크고 집요한 모양이다. 그녀의 외상의 흔적들을 뒤적이다 다음 글을 본다.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 한강의 시 ‘조용한 날들’ 중 –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나도 그녀에게 말했다.

      “아프겠다 너는,
      생명이 있어서…”

그녀의 시를 읽다가 어리고 젊었던 시절 나를 매료시켰던 어떤 낱말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중 –

낱말 중에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데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만든 것들이 있다. 영혼이나 神과 같은 낱말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 “거시기를 거시기라고 한다면, 분명 거시기가 아닐 것이여”(道可道 非常道)라고 노자께서 말씀했는지 모른다. 나는 영원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작도 끝도 없는(無始無終) 그 상태에 들어가 불변이라는 것 속에 깃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엘레아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나는 고지식하다. 진리를 믿고 무한하며 전일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원’이라는 것이 진리와 무한에 합하는 무엇인가로 이 온갖 충동과 변화 그리고 소멸하는 것들로 가득 들어찬 세상에 있어야만 한다고…

‘영원한 것’이라고 나는 말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내용없는 공허한 ‘말’일 뿐이었다. 이 나이가 들도록 영원이라는 것이 있을 뿐 아니라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한강의 이 시를 읽게 되었다.

한강은 이 순간이 과거가 되고, 생멸할 수 밖에 없는 무엇인가가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느낀다. 지금의 이 순간이 흘러가면 ‘영원’이라는 것이 다가오는데 그것은 단지 순간이 만든 부산물일 뿐, 지금 이 순간은 흘러가면 영원 속에 갇혀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생애 속을 스쳐 지난 온갖 순간들은 영원히 ‘영원’ 속에 갇혀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영원 속에 흘러들 것이다. 그러니 영원이란 파르메니데스적이기 보다 오히려 헤라클레이토스적이다.

그러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집착하는 것들이 이 순간이 지나면 어떤 진실과 가치를 가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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