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병

고미카와준페이(五味川純平)의「인간의 조건」에 이런 대목이 있다.

시베리아에 있는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는 전쟁포로에게 일일대사량에 훨씬 밑도는 식사를 배급하고, 강제노동을 시킨다. 포로들 중 일부는 생존을 연장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강제노동에서 빠져 나와 섭취된 열량의 소모를 극도로 자제한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자들은 그들이 아니라, 강제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죽음의 이유는 바로 무위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고통과 배고픔과 함께 삶에 대한 애착마저도 상실했기 때문이다.

나의 생활도 이와 같은 무위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남들은 담배를 끊고, 육체적 긴장도를 높히기 위하여 운동을 한다. 또 그들은 돈과 승진, 온갖 자신들이 가치있다고 느끼는 것들을 추구한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삶의 중요한 문제들이 닥쳐도 무중력 상태인 내 속에서는 아무런 하중을 갖지 못한 채 표류할 뿐이다. 이러한 무위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인간들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스스로 아낌없이 비판하고 나의 공허한 제국을 세워왔을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무위의 병에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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