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편 도시로 간 누이에게

참 맑은 날입니다.

여름이 치열하게 더웠던 만큼 오늘 아침의 햇빛은 가을 냄새로 가득합니다. 지하로 출퇴근을 하는 저는 어두운 터널의 단조로운 레일소리로 하루를 시작하는 만큼, 찬란한 아침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출근과 동시에 여름 동안 창을 가렸던 사무실의 블라인드를 올렸습니다. 도시의 벽 위로는 이른 가을 볕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텅비고 너른 가을 풍경은 이제는 낯선 것이 되었지만, 오래된 시절에 대한 아련함이 있습니다.

편지를 쓰는 것 또한 오래된 습관이었지만, 헤어지고 난 후 처음이며, 이제 당신이 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뚜렷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서글프지만 예전과는 달리 ‘너’를 ‘당신’으로, ‘하다’에서 ‘합니다’라고 씁니다. 우리는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길이 그만 갈라졌고, 서로 알 수 없는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뿐 입니다. 만난다 해도 더 이상 당신을 알아 볼 자신이 없습니다.

그 때 당신은 제 곁에 있었고, 용납한 만큼 저는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제 이름을 부르기를 당신은 좋아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저 또한 가슴 속에 미소가 차오르곤 했습니다. 사랑하기 보다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제 마음을 그리지 못하며, 당신이 곁에 없을 때 나의 가슴에 차오르는, 부재한다는 아픔일 뿐이었습니다. 곁에 있을 땐 행복에 겨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러한 기억들은 모두 다 희미해지고, 사랑이나 행복 그런 것은 아득한 전설이 된 듯합니다. 전설조차 사라질지라도 그리움은 여전합니다.

기억이 딱딱하게 말라붙긴 했어도, 함께 거닐었던 이 황량한 도시의 건물 사이로 난 길들이며, 찻집 소파의 촉감, 그리고 아련해진 음악 소리가 불현듯 떠오르곤 합니다. 그 길들은 낡고 촌스러운 색조를 띠고 있었지만, 그 시대의 빛깔로 용해되고 우울함 속에서 새로운 꿈으로 떠오르곤 합니다.

지금 이 도시의 사이로 난 거리들이 얼마나 낯설고 값어치가 없어 보입니까?

가끔 당신을 생각합니다. 추억할 것이 없음에도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랑하기보다 너무도 좋아하여 어쩔 줄 몰라 했었지요.

기억하시나요? 그때 세시간이나 찻집에 앉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 당신의 가슴 속에 깃든 것을 모두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당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과 당신 또한 제 속에 있음을 알고 조용히 웃음지었습니다. 저의 미소에 당신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눈짓으로 답하였습니다.

그 순간 내가 가진 조그만 영광과 희열의 끝에 다다랐고 영원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영원은 순간 속에 있으며, 작열하는 잔잔한 영혼으로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때 찻집의 어둠 속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며 제 맞은 편에 당신은 앉아 있었고, 흘러가던 무의미한 시간들이 빛이 되어 당신의 가슴 속으로 휘말려 들고, 저는 아득한 정적 속에서 온 세상의 풍경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고 어둠과 빛 그리고 다시 시간이 되어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건조한 삶 속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인생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사색이나 독서를 통하여 얻어지기도 하지만, 늘 나를 통하여 해석되는 것인 만큼, 나처럼 하찮은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그때에 알았습니다. 그 후 삶이 찬란한 광휘와 영광 속에 온유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으며, 고독과 고통들은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하찮은 삶을 살고 있지만, 수풀 속에 비치는 햇빛 속에서, 때론 하늘이며, 끝간 데를 모르는 대지 속에서 다시금 그때의 광휘와 영광을 봅니다.

제가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고통이 되었다가, 그리움이 되었다가, 이제는 세포 낱낱에 녹아 들고, 대기의 빛깔들 속에 용해되는군요. 당신을 숨쉬고, 저의 생명은 당신과 잇닿아 있습니다.

어느 날 꿈에서 일어났습니다. 온 몸을 빛이 휘감고 있었습니다. 빛이 어디에서 오는 지 찾아갔습니다. 빛은 다락방으로 난 계단을 따라 흘러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 방문을 열었습니다. 빛 속에 당신이 서 있었습니다. 당신의 품에 저를 던졌으며, 당신은 부드럽게 저를 안고 쓰다듬었습니다. 영혼이, 제 영혼이 모두 당신께 빨려 들어가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당신을 만난 환희와 그동안의 외로움이 뒤섞인 탓에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허전했던 제 가슴은 신선한 생명력으로 충만했습니다. 대신 며칠 동안을 그리움에 시달렸습니다.

당신의 가슴에 차고 넘치는 향기와 웃음소리, 저를 쳐다보던 그 눈동자를……

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습니다. 꿈꿀 수조차 없습니다. 세월의 광휘에 눈멀어 버렸나 봅니다.

당신은 어린 누이이자, 저를 어루만지는 큰 누이였습니다. 험난한 세상 속의 당신은 때론 애처로워 보였고, 때론 곁에 있어서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스케이팅 교습을 받는 곳으로 저를 불렀습니다. 당신의 모습을 보고자 아이스링크 위의 커피숍으로 올라갔습니다. 당신은 몇 번인가 넘어졌지만 도와줄 수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와 손을 내주었고, 당신은 그 손을 잡았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조그마한 손은 우리 영혼의 교차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손을 잡음으로써 당신의 고통과 외로움을 모두 읽었고, 그것들을 치유하곤 했습니다. 타인의 손은 썩은 나무둥치요, 우리의 손은 연리지, 당신의 풍성한 자양분을 제 몸 깊숙히 빨아들이고, 다시 제 피를 당신의 가슴까지 다다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늘 함께였고, 당신은 또 다른 나였습니다. 당신을 통하여 세월과 풍경과 저의 꿈과 앞 날의 삶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함과 평범함 속에서 당신을 품에 안고 삶을 향유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누이여!

그때 알았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손을 타인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당신의 손이 저 만의 것이라고 함은 집착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숙명의 끝자락을 보고 끝없는 외로움 속에 다가 올 허무함에 대하여 공포를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더 이상 당신을 보지 못하고 커피숍에서 나왔습니다. 도시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차량들은 엔진소리와 함께 달리고, 소란스러움 가운데에 저는 두려움에 떨며 서 있었습니다. 가로등이 점등되고 차디찬 겨울로 가는 냄새가 매연과 뒤섞여 낡은 도시의 곳곳으로 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익숙했던 거리가 어둠 속에 녹아가면서 점점이 이어지는 불빛 속에서 생경하게 변했습니다. 처음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었습니다.

공허감에 휩싸여 담배를 피고 있을 때, 당신은 오래 기다렸느냐며 제 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침울함에 빠져 있는 것을 알았는지 술을 사겠다고 했지만, 저는 싫다고 했습니다.

황량한 도시의 한쪽 구석으로 갔고, 잘 아는 찻집으로 내려가 저는 기도하듯 당신의 손을 꼭 잡고 한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려움과 외로움은 점차 사라졌고, 깊은 휴식이 몰려왔습니다. 고요함 만이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당신의 눈에서 미소가 반짝했습니다. 이제 괜찮아? 하고 물었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 은행잎이 가로등 밑으로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 기억의 다 입니다.

만나서 사랑하기까지는 낱낱이 기억할 수 있지만, 사랑하게 되면서 더 이상 기억할 것이나 추억이 없습니다. 추억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 도시 위로 내려앉는 태양의 빛과 나뭇잎들의 웅성거림. 뒷골목의 차고 서늘한 그늘, 그런 것뿐 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이 도시에 연인들이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기를 즐겼습니다. 당신은 그랬습니다. 저 남자 참 멋있게 생겼다라고. 그러면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저 아가씨는 참 참하게 생겼잖아 하고.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나의 누이, 당신이었습니다.

어떻게 헤어졌는 지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가슴 한 쪽에서 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고 저는 그렇게 당신이 부름으로써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당신이 제 이름을 부름으로써 저는 나였으니까요.

아마 당신을 잃어버렸나 봅니다. 혼란한 세월의 갈래 길 속에서, 소음과 먼지 속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당신은 더 이상 제 곁에 없었습니다. 아니 당신 곁에 있던 제가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또 다시 오랜 세월 동안 이 도시를 배회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또 다른 의미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도시의 모든 곳은 변두리이며, 외지고,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제가 서있는 이 지점은, 저 도시와 분리되고, 저 도시의 어느 곳을 나의 누이가 걸어가고 있으며, 그녀 또한 저를 찾고 있음에도 나는 도시의 변두리 이 곳에서 방황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누이여!

저 도시에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부패한 냄새를 피우던 은행나무에서 조만간 처절하게 낙엽이 떨어질 것이며, 햇빛은 조금씩 더 깊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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