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이야기

1. 처음에…

몇일 전 1950년의 홍콩을 배경으로 한 慕情을 보았다. 종군기자인 윌리엄 홀든이 혼열인 여의사(제니퍼 존스)와의 사랑 이야기. 그 시절 홍콩의 풍광은 천연 그대로다. 창 밖으로는 풍성한 바다가 있고 한가한 섬이 그대로 산수화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앵글을 잡은 上環과 中環은 야트막한 건물이 올망졸망하고 홍콩과 침사추이 사이에 놓여있는 하버는 지금보다 훨씬 여유롭고 풍만하다.

이제는 야릇한 향수를 느끼기에 홍콩은 너무 비대해졌으나 아직도 홍콩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 수십층의 빌딩이 홍콩섬을 가리고 있어도 남해 고도의 짙은 수풀은 시들지 아니하고 밤이면 네온 불빛으로 동방명주의 찬란함을 드리운다. 해 저물녁 리펄스 베이에 가 앉으면 남지나해의 잔잔한 파도가 모레와 속살거리고, 산으로 트랙킹을 가면 심천 쪽으로 연봉이 길게 이어지고 남지나해로 섬들이 점점이 떠 있다. 때론 부두로 가 배를 탄다. 배는 홍콩과 구룡의 좁다란 해로를 지나 꿈처럼 섬으로 간다. 갑판에 앉아 해풍을 맞이하며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이대로 조용히 숨지고 싶다 하는 생각마저 든다.

거리는 언덕으로 길을 내고 높다란 빌딩 옆에는 공원들이 있다. 아직도 오래된 이층전차들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좁다란 보도 위론 못 생긴 홍콩 사람들과 속살이 금시라도 튀어나올 듯한 차림의 늘씬한 서양여자와 인도인들, 각국의 이방인들이 길을 메우고 있다. 그 길 위로는 롤렉스, 헤르메스, 던힐, 불가리, 프라다, 발렌티노, 루이뷔똥 등의 매장이 즐비하고 수십 종에 달하는 일간지와 함께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를 파는 가판대가 있으며 너저분한 중국찬청과 쎄븐일레븐,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모조품을 파는 가게와 재래시장 등이 오묘하게 혼재되어 있다.

새로 이사간 내 집은 언덕 중턱에 있는 데 언덕 입구에는 오래 된 天后廟가 있고 언덕으로 오르는 아스팔트 위로 나무들이 줄기와 푸른 잎새를 드리우고 있어 낮에 차를 타고 지나면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 그리고 집 주변으로는 공원과 수풀로 우거져 있어 각박한 상업도시라도 자연 만은 풍성하다.

2. 차 이야기

본초경에 보면 “신농씨가 무수한 약초를 맛보느라 하루에 72가지 독에 중독되었으나, 차를 얻어 제독할 수 있었노라”(神農嘗百草日遇七十二毒 得茶而解之)고 되어 있다. 기록 상으로는 詩經, 晏子春秋 등에 나타나나 秦이 蜀을 취한 후 비로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바야흐로 동양 3국의 식사 예절에 혁명을 일으킨 젓가락이 시작되는 시점인 전국시대 쯤인 것으로 알면 되겠다. 반면 사기의 화식열전에 보면 중국 내에서 교역 되는 물자에 차가 오르지 않고 있는 점을 볼 때 차가 보편화된 시기는 남북 교통이 활발해진 위진 남북조 시대를 지난 당나라 때부터 이겠다.

차는 일조량이 적고 다습한 지역에서 자라는 耐陰性 식물로 사천지방에서만 재배되던 것이 양자강 남부로 전래되고 기원후 5세기경에는 주변국가로 수출되다 17세기가 되자 유럽 등지까지 수출되었다.

차는 고온다습한 중국의 남부에서 나면서도 오히려 북부와 변방의 오랑캐들이 절실한 필요를 느낀다. 특히 변방의 유목민들은 육식을 주로 하며 유류제품의 섭취가 과다하다. 이 경우 장내에 과다한 지방의 축적으로 소화불량은 물론 울혈과 여타 병증이 유발된다. 따라서 변방의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차가 단순한 기호식품을 넘어 약에 해당되나 차의 재배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중국이란 차와 비단이 있는 가나안 福地였고, 실크로드니 뭐니 하여도 중국 변방무역의 가장 핵심 아이템은 차였다. 때로는 조정에서 차의 교역을 금지시킴으로써 오랑캐가 월경마저 불사하게 만드는 그런 아이템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차의 중요성을 더욱 알 수 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차를 이야기하냐 하면 이것이 홍콩의 역사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3. 홍콩의 역사

홍콩은 광동지역에 위치하여 광동의 역사와 함께 하며 광동의 역사는 바로 중국근대사의 출발이 된다. 그리고 광동지방에 유입되던 아편과 함께 타율적 근대화가 시작된다. 18세기 말부터 남지나해에서 패권을 잡은 영국상인들이 광동성을 중심으로 중국과의 무역을 시작한다. 무역을 시작하고 나자 영국은 자신들이 중국의 차를 능가할 교역 상품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교역에서 만성적인 적자를 기록하자 이들은 인도산 아편을 광동성을 중심으로 풀어내기 시작, 무역역조를 시정하기 시작하였다. 아편밀매로 막대한 은화가 유출되고 사회문제가 야기되자 만청정부는 이를 막기 위하여 흠차대신으로 임칙서를 보낸다. 청렴결백, 옹고집의 임칙서는 아편을 몰수하여 불사르기에 이른다.

울고 싶자 매라고 오냐 잘됐다. 영국은 무력도발을 일으켜 1차 아편전쟁(1840년)을 일으킨다. 이에 굴복한 만청정부는 불평등조약의 예문인 남경조약(1842년)을 맺게 되었다. 조약내용에 홍콩의 할양, 5항(廣東, 福州, 廈門, 寧波, 上海)의 개방, 이천일백만 멕시코달러 배상, 관세협정, 영사주재 등이 들어있으나 문제의 발단인 아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이후 2차 아편전쟁 등을 거쳐 구룡(침사추이) 할양, 신계 조차로 홍콩의 방역을 넓힌다. 홍콩의 중국으로 반환의 근거는 신계의 조차를 위한 홍콩경계확장조약(1898.6.9일) 시 이홍장이 주도하여 기 할양되었던 홍콩과 구룡 또한 조차지로 할 것을 권유, 99년간의 조차기간을 설정한다. 당시 발효일이 1898.7.1일인 바, 1997.7.1일자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홍콩은 광동의 남쪽, 구룡반도 너머에 위치하는 참으로 빈한한 어촌이었다. 아편전쟁이 터지기 이전에는 베트남에서 광동으로 가는 향나무를 하역하던 조그만 부두가 지금 홍콩섬 남단 에버딘에 위치했다고 한다. 당시 인구는 삼천명이었다고 하며 13세기말 광동지방에서 이주해 온 토박이와 남송 때 난을 피해 온 객가족이 주류였다. 이 에버딘의 이름이 香港仔인 바, 여기에서 홍콩이라는 이름이 시작될 것이다. 이름하여 향기로운 항구.

당시 이 땅을 할양받은 해군 대령(찰스 엘리옷)이 예편당할 만큼 척박한 이 곳으로 사람들이 유입, 일본에 점령당하기 직전에는 인구가 170만에 달하였으며 일의 무단강점기에 인구는 다시 60만으로 감소하였으나 중국의 공산화 이후 1949년 장개석의 대만철수에 따라 중국자본가들이 기술자들과 대규모 이주로 1950년에는 236만,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1962년부터 1970년에 이르기까지 2차 이주, 모의 사망 이후 정정불안과 천안문 사태등으로 3차 이주, 지속적인 중국인 유입 등으로 현재 680만에 달한다. 이 중 98% 이상이 광동성과 복건성 출신이다.

홍콩이 광동에 속하는 만큼 대부분의 주민은 역사적으로 볼 때 월(越)의 유민이다. 즉 오월동주의 월의 후예다. 애시당초는 그들이 살던 곳은 지금의 상해 아래 절강성 부근이다. 벌거벗고 문신을 새기는 종족이며 3차 오월간의 전쟁 시 범려가 개전 초 자살군단을 최전선에 배치하여 스스로 자신의 목을 따도록 하여 오군의 사기를 꺽고 승전을 거두는 등 야만무도한 종족이라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구천이 오를 병탄하고 이 지역에서 패자를 자처하자 전국칠웅의 하나인 초가 월을 까부신다. 이에 따라 월의 유민들이 지금의 복건성(동월:?)과 광동성(남월:?)으로 유입된다. 그 후 한조가 수립되고 위타가 이 남월을 평정하여 속국으로 삼는다고 한만큼 중국과의 외교관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다. 지금 이들은 옛날의 월이라는 한자를 쓰지 않고 다른 문자로 월이라 하며 발음은 유에이다. 혹은 오(奧)라고도 한다. 이들은 광동어를 쓴다. 이들은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지략가이자 장사꾼인 범려의 후손인 동시에 미인의 대명사인 서시의 후예이다. 이문에는 밝다는 점에는 공감이 가나 인물 생김새는 아무리 해도 셈을 좋게 쳐줄 수 없다.

혹은 월(지금 절강성), 민월(지금 복건성), 백월(지금 광동, 광서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남만의 통칭일수도 있다.

4. 홍콩이란

홍콩은 홍콩섬(76㎢), 구룡반도(11㎦), 신계 및 란타우섬 등 240여개의 섬(948㎦)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면적은 서울의 1.8배이다. 그러나 사람이 주로 사는 곳은 홍콩섬과 구룡반도인 바, 전체면적의 8%에 대부분의 인구가 살며 경제활동이 이루어진다. 하나 홍콩섬의 경우를 보면 육안으로 살펴볼 때 20% 정도가 안되는 지역에 상업지구와 주거지가 있다. 그렇다면 총면적의 2.5%정도에 80% 정도의 인간이 밀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구룡을 지나 신계로 나가면 아하 할 정도로 전원이 펼쳐져 있고 풍경은 시골 그대로다.

영국이 지배한 155년간 이들은 식민지 주민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떠날 때 이들은 눈물을 흘렸다. 반환일에는 이들의 심사를 반영하듯 비마저 왔다. 이들에게 화려한 중국문명의 총체와 역사는 더 이상 필요없다. 자신들은 중국인이 아니고 당신(나: 동이족)과 같은 오랑캐(남만)이라고 강변까지 하면서 중국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살색이 노란 것 또한 저주한다. 그것은 옳다. 삼천만에 달하는 화교가 가혹한 세금과 혹은 전란, 핍박을 못이겨 고향을 등진 것처럼 이들도 전란과 배고픔과 가렴주구를 피하여 이 땅으로 온 것이고, 중국이 그들에게 준 것은 오직 고통과 고난이었다. 이들이 중국을 등지고 났을 때 남은 삶의 목표는 오직 돈과 가족이다. 돈만 된다면 양코백이 새끼를 배도 차라리 행복하고 돈에 맞아 되진다면 가문의 영광이다. 오직 하면 년초 인사가 꽁헤이파초이(恭喜發財)일까 보냐. 한마디로 잘먹고 잘살아라! 욕인지 비아냥인지 분간이 안 간다.

1) 돈 이야기

식민기간 중 영국은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의 자유경쟁체제를 이 땅에서 실험하려 했는지, 야경만 담당하고 모든 것은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겼다. 배에서 의사를 하던 놈이 본격적으로 아편에 뛰어들어 세운 쟈딘 머세슨이라는 기업이 뻔뻔하게 아직 장사를 하고 있으며 스와이어, 허치슨 왐포아 등 매판들이 뻐젓이 자리잡고 있다. 식민총독부에서 무슨 짓이나 할 수 있다 하자, 돈독이 든 놈들이 뭔짓을 못하랴. 이미 양놈들이 아편은 팔고 있겠다, 판은 벌려져 있는 것. 고리대금업 하던 날렵한 상하이보이와 주먹과 의리의 사나이들 삼협회, 그리고 온갖 잡놈들이 돈이라면 살인과 범죄를 떡 먹듯이 하매, 시쳇말로 “홍콩간다”라는 말은 처음에는 지옥이나 가라(GO TO HONG KONG = GO TO HELL)라는 뜻이었고, 그 후에 천구백육칠십년대의 즐비한 환락가들로 “뿅간다”로 한국에서는 받아들여졌다. 그 후 신임 총독이 마약과 사창가를 정비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깨끗한 도시로 변모되었다. 그러나 경제면에서는 그대로 냅둔 결과 현실세계에서 가장 완정한 야경국가, 철저한 자본주의가 탄생되었다. 철저한 자유경쟁은 전세계에서 빈부의 격차가 가장 큰 곳으로 만들었으며 국민소득은 본국인 영국의 두배, 장강집단의 이가성이란 친구가 홍콩 주식총액의 30%이상을 거머쥐고 있으며 세계 10대 부호 중 항기집단의 이조기가 있으며 곽병상등이 보유재산 100억달러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니 자유방임의 실험은 성공한 셈이다. 이러함에도 영국은 기초적 의무교육조차 도입하지 않았고 민생복지란 꿈도 못 꿨다. 그러던 중 197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시행하더니 마아가린 대쳔가 하는 영국 수상이 등소평을 한 번 만나 아자씨 꼭 돌려드려야 되겠우? 하자 등씨 아저씨 왈 이 여편네가 돌려주기로 했으면 돌려줘야지이. 비오는 날 먼지나게 한번 맞을래? 하자 아! 엄청 무서운 것. 많이 컸는 데? 씨팔 그냥 요대로 줄 순 읎다하고 민주환가 뭔가를 시민들에게 갑자기 배급하고 남아도는 재정을 넘겨줄 경우 너무 아까우니까 신공항이나 확 지어서 재정을 축내야 한다고 첵랍콕공항을 착공한 후 중국에 반환된다.

반환과 함께 한 역사의 아이러니. 공산주의를 지향하고 인민들의 숙적 부르조와를 이 땅에서 박멸하겠다고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강택민 주석은 홍콩 부르조와의 간판스타 이가성과 기타 재계인사 등등을 만나 서로 웃으면서 선박 재벌인 동건화를 초대자치구 수반을 시키고 재벌과의 밀월은 계속되는 가운데 민주화를 맛 본 시민들은 중국 정부가 싫다고 한다. 부르조와는 체제야 뭐가 되얐던 간에 돈만 벌면 된다 빨갱이라도 잘 사귀어 놓자 주의다. 중국정부는 등소평의 남순강화에 입각하여 중국이 이미 사회주의 초급단계를 지난 만큼 “계획과 시장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본질을 구분하는 요소가 아니다”며 고도의 상품경제를 이룩하고 국부의 증강을 위해서는 부르조와마저 사무치게 사랑해야 한다고 반동과 흘레를 붙는 단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홍콩은 역사가 없고 철학이 없으며 문학과 예술마저 사라져 버린…가련한 東方明珠이다. 이들이 산다고 할 때 삶의 목표는 투명하다. 돈과 가족과 먹는 것. 이것을 제외하고 나면 홍콩이란 찬란한 빛을 잃는다. 습기와 더위에 휩쌓인 이 척박한 불모지에 수십층의 빌딩을 두르고 휘황한 네온 불빛이 남지나해에 찬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상부구조가 아닌 돈이라는 물질적인 하부구조가 토대를 결정한 것이다. 인생의 목표가 돈이라는 계량화될 수 있는 것에 타겟을 맞출 때 더 이상 머리 속이 복잡해질 것은 없다. 적자생존의 비린내를 풀풀내면서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만 남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치부를 한 것이다. 경쟁력있는 놈은 돈벌고 살기 위한 지랄발광이 극에 달함으로써 결국 아시아에서 최대의 독자를 가진 김용의 무협소설이 있고 찬란한 광고예술의 금자탑을 쌓고 장사철학이 넘쳐나는 것이다.

범려가 월왕 구천을 도와 오를 무너뜨린 이후 장사를 시작, 후에 중국 장사아치의 대명사격인 도의 주공으로 불리운 만큼 홍콩사람들 또한 범려의 후예로 돈에 눈 멀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범려가 장사를 시작하면서 염두에 둔 것은 이쪽 저쪽의 물산이 서로 교류하면 사람들이 풍요로와 지고 그의 댓가로 자신이 이문을 남길 수 있다는 휴머니즘적인 사고였다면 武와 利益을 멀리하고 德治와 文治를 주로 해왔던 중국의 역대왕조가 결국은 백성을 빈곤의 도탄으로 몰아넣어 자멸할 수 밖에 없었다는 필연적인 귀결 속에서 홍콩이 탄생하였고 정글의 법칙 속에서 여타 아시아의 국가보다 풍요로울 수 있다는 점 또한 당연하다.

한국을 보라. 인륜과 도덕을 중시하며 예절과 숭고한 정신을 바라는 나의 조국이여. 오히려 음난하고 내슝에 절어있도다. 미스코리아와 여배우들은 재벌 이세한테 시집 못가서 안달이고 관료와 정치가들은 방문 걸어잠그고 돈헤아리는 불면의 밤을 보내고, 노동시장은 협소하도다. 수많은 기업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영고성쇠를 거듭하며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승냥이처럼 밥그릇을 찾아다니고 자신의 능력을 광고하고 그에 맞추려고 노력할 때, 최적의 효율과 아웃풋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가연한 재벌들이 노동시장을 독점하고 정부의 보호 아래 타인이 취할 이득을 거머쥘 때 번영과 풍요는 특정 소수의 점유물이 될 뿐이다.

홍콩을 이야기할 때 먹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통루완에 가면 식당전문 빌딩이 있는 데 이름이 食通天이다. 먹는 것이 하늘과 통한다. 극단적으로 인간은 먹다가 밥숟가락 놓는다(죽는다). 이런 뜻 일께다. 홍콩인들은 집에서 밥을 잘 해먹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 있는 냉장고가 적고 거래에서 일이백원 깍는 데 생명을 내놓을 것 같던 사람이 계약이 끝나고 함께 식당에 가서는 수천원의 거금을 뿌리는 것에는 아까워하지 않는다.

홍콩은 세계 음식의 도가니이다.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음식을 배후에 지고 지근거리에 마카오의 서반아 음식과 영국놈, 불란서놈들이 돈벌려 와 양식점을 열고, 태국의 풍성한 진미와 인도네시아, 미얀마 음식이 혼재되고 왜놈까지 저자거리에 식당을 내고 한국음식점이 500개란다. 그러니 세계 각국의 음식의 잡탕, 음식의 혼혈이 태어난다.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부르조와가 사라졌으니 일류 주방장은 목구멍에 거미줄을 쳤다. 그렇게 수십년을 지나다 보니 음식의 맥이 끊어졌다. 그래서 본토의 일류 음식점의 주방장은 홍콩에서 역수입된다. 북경, 사천, 상해, 조주 음식은 본토보다 홍콩이 훨씬 맛있다는 것이 중론이고 홍콩에서 먹는 태국 음식처럼 맛있는 음식은 정작 태국에 없다는 기현상이 생긴다. 한그릇에 수천원짜리 삭스핀이 있는가 하면 일반인을 위한 십원짜리 국수도 있다. 하니 관광객들이 홍콩을 아니 좋아할쏘냐. 홍콩에서 지내다 보니 참으로 주방장이란 것이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음식은 사람을 살찌게 하며 행복하게 하는 동시에 돈을 벌고 예술적인 재능까지 겸비해야 하는 보람찬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한국이 발효식품에서는 전세계에서 가장 발달되었다고 하지만 홍콩에는 이금기라는 회사에서 각종 장유를 만들어내고 있는 데 양조간장은 물론 고추기름, 아발론 쏘스며… 쏘스 하나만 개발하면 대박인 데 하는 생각마저 든다.

반면 홍콩은 남방이며 가모장적 성격이 강하여 술을 잘하지 않는다. 하여 중국의 명주를 먹고자 하여도 잘 찾을 수가 없으며 술값이 양주보다 비싸 함부로 먹을 염두를 낼 수 없으나 우량해, 주귀주 등 백주는 천하명주임에 틀림없다.

과일이야기를 하자면 과일의 황제라는 뚜리얀과 망고 등이 있어 사람들의 군침을 다시게 하고 있으나 한국의 과일처럼 청량하고 새콤하지 않으며 딸기는 천금을 주고 사지만 향기가 박약하고 포도는 껍질이 베껴지지가 않아 달기만 할 뿐 맛이 없다. 한번은 타마린드라는 서역의 과일이 있어 사먹어 보았더니 맛은 곳감이나 차이가 없다. 석류가 있어 오랜 기억을 더듬고 한번 사먹어 보았다는 것 이외에는 소득이 없었다.

채소로는 초이삼, 빡초이, 통초이, 까이란 등이 있어 통상 뜨거운 물에 데치거나 고온으로 데쳐 먹어 맛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나 어떤 경우는 태국식 젖국에 튀기고 아발론 쏘스를 놓아 먹으니 맛이 담박한 가운데 강렬한 소스 맛으로 고기에 지친 위장을 달랜다.

이들의 음식에서 고기는 돼지고기와 닭이 주종이고 쇠고기는 부수적이다. 돼지고기금이나 쇠고기나 대동소이다. 이외에 오리, 거위, 기타 등등의 고기를 쓰며 뱀스프 전문점도 있다. 반면 개고기 집은 없다.

2) 도교 이야기

만약 내가 시간이 있었다면 도교에 대해서 좀 연구를 했겠으나 이에 대한 연구가 박약하다. 전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종족이 있다면 중화인민이다. 베다를 중심으로 이민족 아리안이 사천년간 식민지인 인도를 통치해 왔고, 이집트에서는 무수한 종교가 영고성쇠를 거듭하고 이란과 이라크에 조로아스터교가 고등종교의 체제를 갖추고, 이스라엘 팝 가수 다윗이 고대왕국 건설에 골머리를 썩힐 무렵, 중국에서는 신정일치의 종교국가이었던 은왕조를 멸하고 주나라라는 무종교 고대국가를 세웠다. 그리고 오랜동안 종교가 없이 살아왔다. 공자가 쳇! 내가 지금 사는 것도 잘 모르겠는데 다음 시상을 으쩍크롬 알겄냐?하고 돌아 앉았을 때, 이미 현세 이상의 것은 골치가 아프다는 민족적 특성을 그대로 반증한다. 중국인은 사변적인 종족이 아니다. 그보다는 실천을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가 있을 뿐, 그래서 중국인이 정신적인 가치보다 물질적인 풍요에 경도되는 경향이 강하고 사해만민보다 내 새끼, 호주머니 속의 내 돈이 중요하고 영원한 시간의 수레바퀴는 내세 쪽으로 흐르지 않고 자손만대라는 핏줄 속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보편타당한 만고의 진리보다 현실즉응성을 갖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오직하면 동양최고의 성전인 주역의 별칭이 변화의 책이겠는가. 즉 만고불변은 읎다가 주역의 핵심인 것이다.

이 도교(도장경)는 사실 상 중국문명의 총체를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인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일본의 신도가 오오가미와 그의 자손 덴노를 앞세워 무당연합체를 구축한 것이라면, 도교 또한 중국문화와 무당들을 섞어 만든 비빔밥 그것이다.

우리가 무속을 미신이라고 할 때, 모든 종교는 미신이라는 범주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어떻게 본다면 샤마니즘 이야말로 미신이 아니잖는가 하는 반론도 가능하다. 고등종교라는 것들은 죄와 그에 상응한 징벌을 상정하고 조직적으로 협박 회유함으로써 사람들이 죄에 대한 편집증에 사로잡히도록 유도해 나가며 죄를 씻지 아니하면 왕창 골로 가버린다는 망상을 조작하여 매주일날 사람을 끌어 모은 뒤 천국 갈려면 성의를 표시해야 할 것 아니냐고 한다. 그리고 연보 돈을 받아 성전을 세운다. 반면 무당을 만나는 사람은 뭐가 불안하다, 재수가 없다, 돈 좀 왕창 벌었으면 좋겠다 하고 무당한테 간다. 그럼 무당이 점쳐주고, 부적 써주고, 푸닥거리를 해 준다. 그리고 나면 이들은 더 이상 자기의 죄나 뭐를 생각하지 않고 말짱한 정신으로 일상으로 되돌아 온다. 목욕탕에서 때민 후 느끼는 후련함마저 느낀다. 그래서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미신에 빠지는 시간은 일생 중 극히 짧다. 반면 고등종교의 신봉자들은 미신에 절어 산다.

홍콩에서 절이 廟나 祠로 불리우면 불교사원이고 觀이라 불리우면 도교사원이다. 그러나 도불이 혼합된 형태 또한 많다. 홍콩의 대표적인 도교사원으로는 신계에 청송관이 있고, 구룡에 윙타이신사, 홍콩에 문무묘 그리고 곳곳에 바다를 호위하는 천후묘가 있다. 그리고 재복을 비는 관제묘 또한 많다. 사원에 들리면 불교사원인지 도교사원인지 구분이 안가는 데 향불을 살라 향내가 진동을 하며 외곽으로는 점집이 있고 가게에선 향, 저승에서 쓸 지폐등을 팔고 있다. 그러나 홍콩의 역사가 짧은 터라 시멘트 등속으로 축조되어 한국사찰과 같은 연륜이 배인 멋이 없다.

관제묘는 관우의 사당이다. 관우가 무신(관제)으로 신격화되면서 재복을 주관하는 신으로 자리매김을 하는데 이는 아마 장사 그 자체가 전쟁이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쟁의 신인 관우가 재복까지 겸비하게 되었나 보다.

돈을 중시하는 홍콩인들은 이 사원에 가서 그야말로 현세구복적인 차원에서 향을 사르고 복을 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또한 풍수에 빠져 건물 임대료가 풍수에 좌우된다. 풍수가 개판이면 회사가 망한다는 이들의 믿음을 반증하듯이 홍콩의 깜종(에드미럴티)에는 리뽀쎈타가 있는 데 임대료가 주변건물에 절반이다. 이 건물은 지을 때 건설회사가 파산을 하더니 입주한 BCCI Bank가 파산하고, 한국의 리스 종금사가 입주해 있다가 전부 철수를 했다. 구룡반도에서 홍콩을 바라보면 가든로드가 빅토리아 해를 마주하고 섬을 가로질러 용의 등뼈와 같은 형세를 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용의 머리 위에 BOC(중국은행)건물이 들어서니 홍콩경제가 골로 갈 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한다.

돈이란 가장 현실적인 가치를 지니지만 재복에 혹여 영향이 있을까 두려워 풍수를 믿고 푸닥거리와 점을 친다. 현실이야말로 가장 미신적인 요소와 공존한다는 것이 인간의 아이러니이다.

3) 영화 이야기

영화는 홍콩이 자랑할 수 있는 산업이다. 돈이 되려면 재미있어야 한다. 그래서 홍콩영화는 재미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홍콩음식이 세계각국의 잡탕이고 도장경이 또한 중국문화의 잡탕이라면 예술의 융통화해는 영화라는 종합예술로 나타날 것이다. 원래 적은 인구를 저변에 깔고 영화산업이 발전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따라서 홍콩의 영화산업은 형편없었다. 그런데 이소룡이란 인물이 홍콩영화의 중흥의 개조로 나타난다. 물론 그 이전 왕우를 중심으로한 외팔이(독비도)시리즈가 있기는 하다. 이소룡 메니아를 바탕으로 한 홍콩영화는 같은 경극학원 출신인 성룡, 홍금보, 원표로 이어지고, 귀타귀 등의 말도 안되는 영화 등으로 이어지다가, 헐리우드에서 따끈한 기술을 카피해 온 서극을 맞이하면서 이른바 무협소설의 SF적 요소가 폭발적으로 표출된다. 또한 영웅본색, 도성, 지존무상 등의 오우삼과 주윤발 콤비에 이어지더니 전설적인 인물 황비홍 시리즈로 연결된다.

결국 홍콩영화는 돈 좀 벌더니 자신들의 영화를 홍콩 르와르라고 하거나 혹은 타락천사, 중경삼림 등의 리얼리즘을 소재로 한 영화를 찍거나 패왕별희 등의 예술성에 입각한 영화도 찍는다.

이들 영화는 극히 단순한 도식 속에서 흥미를 유발한다. 선과 악이 존재한다. 그런데 착한 편의 힘센 놈이 나타난다. 그리고 여러 나쁜 놈들을 작살내는 데 어떻게 패버리면 더 신이 날까? 하는 측면에서 앵글이 맞춰진다. 삼협회가 영화산업에 침투하면서 영웅본색류의 영화에는 폭력집단은 다 나쁜 놈이니까 이제 의리와 배신의 이분법을 쓴다. 사단병력의 따발총이 집결되어 총알이 빗발치는데 윤발이 오빠는 이쑤시게 하나 물고서 육혈포로 사단병력을 작살내고 결국 배신자의 심장에 총알을 날린다. 아니면 극단적으로 악령과 선한 인간의 투쟁 등의 이분법이 통하고 쇼부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는 돈방석에 앉는다. 홍콩영화에서는 한번 성공하면, 무슨 시리즈로 첫편의 연장전을 벌이는 것이 공식이다. 취권에서 돈을 벌었다. 그러면 취권2를 찍어서 재탕으로 또 돈번다. 아직 열기가 식지 않았다. 3편이다. 이와 같은 재탕삼탕은 머리쓰지 않고 돈벌 수 있는 첩경이다. 이와 같은 돈의 논리에서 시리즈물로 둔갑하는 영화가 많은 것이 홍콩영화의 특성이다.

5. 홍콩의 풍광

1) 홍콩

홍콩은 섬이다. 그럼에도 처음 이 곳에 오면 섬이란 인식을 가질 수 없다. 또한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홍콩의 중심가는 구룡 쪽인 북쪽으로 창을 내고 벌려져 있다. 또한 북회귀선의 아래 쪽의 태양은 무심하게 머리 위를 스쳐지날 뿐이다. 따라서 남쪽으로 창을 내고 북위 35~38도의 위치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한국사람에게는 어디가 남이고 어디가 북인지,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좁다란 도로 위로는 삼사십층의 건물이 늘어서 하늘은 50평의 넓이로 문득 문득 보일 뿐이다. 중심가인 상환에서 중환을 거쳐 깜종, 완차이, 통루완에 이르기까지 거리는 그림자와 습기에 쌓인다. 그리고 나서 문득 하늘과 산이 보인다. 그 때 사람들은 홍콩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산과 바다와 저 멀리 빌딩군 속에 사람들이 저마다의 생활을 가지고 꼼지락거리고 있음이 아련하게 혹은 한가하게 가슴 속에 스미는 것이다.

나의 사무실에서는 홍콩에서 제일 높은 산은 빅토리아 피크가 보인다. 피크는 해발 552M이며 바닷가인 상환까지 1.4Km이니 그야말로 해발이다. 상환 앞의 해안 매립을 감안한다면 1.1Km에 미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평균 경사도가 27도에 달한다. 그런데 육안으로 보는 사면은 60도를 넘는 것 같다. 사무실에서는 하버와 구룡이 보이고 그 너머로 산과 하늘이 보인다. 어떤 사무실에서는 하버 전체가 눈에 주악들어오기도 한다.

점심 때가 되어 길거리로 나서면 좁다란 인도 위로 사오십층의 건물에서 먹겠다고 기어나온 인파로 걷기가 힘들다. 근무시간에는 건물과 건물을 연결한 통로를 거닐기에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홍콩의 점심 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이다.

그러나 에버딘 터널이나 홍콩이스트와 웨스트의 도로를 지나 남쪽으로 돌아가면 홍콩의 남쪽은 쪽빛 바다와 이어지는 섬들과 짙은 수풀로 한가롭다. 남쪽은 주거지이며 옛날의 어촌의 냄새가 어렴풋이 나고 모정으로 유명한 리펄스 베이, 딥 워터 베이, 쌕오 등의 멱감을 장소가 이곳 저곳 나타난다. 그리고 트래킹을 위한 트레일이 이 곳 저 곳으로 펼쳐져 있다. 또한 식수를 저장하는 타이탐 호수와 양놈들이 배회하는 스탠리 등의 경관이 땅끝과 바다가 만나 더 이상 갈 곳 없는 벼랑처럼 울적하면서도 그 아래로 남지나의 바다가 잔잔하다.

홍콩은 화강암의 암반지대로 표토가 얕고 경사로 인한 토양 유실이 심각한 지 울창한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다. 튼튼한 암반으로 인하여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기에 좋고 수심이 깊어 몇만톤의 배가 어느 곳에나 접안할 수 있는 양항의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반면 터널 굴착이 어려워 홍콩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터널이 한 곳에 불과하며 지하철은 굴착의 난점 때문인 지 영국의 영향인지 보기 드문 협궤열차이다. 또한 높은 산과 바다를 끼고 도로가 있어 사통팔달은 기대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교통이 가장 최악인 지역이 부산이라면 홍콩은 그보다 더 열악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 좁은 도로에는 롤스로이스와 재규어, 벤츠 이층버스와 석기시대의 전차가 몽환적인 느낌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도 러시아워에도 느리긴 하지만 차들은 달리고 생각보단 교통이 양호한 편이다. 또한 사고가 극히 적다. 한국은 보행자는 질서를 지키고 운전자는 신호 무시다. 반면 이 곳은 사람들은 신호 무시하고 길을 건넌다. 차들은 어김없이 신호를 준수한다. 즉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규율을 준수한다면 사고가 없다는 반증이다. 홍콩에서 주의할 점은 차가 한마디로 거꾸로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맨 처음 왔을 때는 차량이 오는 방향을 거꾸로 보다가 사고를 당할 뻔도 했다.

2) 구룡

구룡은 좀 포괄적인 지리개념이다. 크게는 신계까지를 포괄한다. 구룡으로 가자면 여러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지하철을 타고 건너는 법, 두번째는 지하차도를 통하여 차로 건너는 법, 세번째는 틴싱마터우(천성부두)에서 스타 페리를 타는 법, 네번째는 무식하게 수영해서 건너는 것이다. 구룡반도까지 불과 한강폭이니까 자신 있으면 수영으로 건널 만도 하다. 페리를 탄다니까 굉장히 그럴 둣 하지만 지하철로 한 정거장에 9불, 택시로 건널 경우 터널 통행료만 15불, 페리는 아랫층 1.7불, 이층 2불이다. 오래 전 아니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해도 해저터널이 없었다. 그 때는 이른바 화륜선을 타고 구룡과 홍콩을 오고 갔다. 이 페리를 타는 재미가 있다. 출렁이는 배를 타고 홍콩의 마천루를 보며 동서 양쪽으로 뜨악하게 열려있는 협만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호쾌해진다. 오후 서너시 경의 부드러운 햇살이 창랑한 파도에 드리우면 갑자기 어지러워지며 노래라도 부르고 싶어진다.

오분도 안되는 항해를 끝내고 부두에 내리면 구룡은 아우성과 소란 속으로 흘러든다. 관광객과 잡상인, 때론 한국말로 가짜 롤렉스 삼천불하고 속삭이는 인도인들, 주질러 앉을 것 같은 낡은 건물에는 빨래가 널린 듯 광고판이다. 그 많은 태풍에도 역전의 용사처럼 광고판은 살아남아 있다. 바로 거기가 침사츄이이다. 동양 굴지의 페닌슐라 호텔이 홍콩을 굽어보고 있고 길거리로는 장사치들이 나와 갖은 사기를 쳐 댄다. 네고를 잘하면 본전인 이 곳의 상술, 50%를 디스카운트하고 사간 물건이 바가지라 억울해서 한판 더 네고를 붙으러 오는 동네. 이 곳에서 물건을 잘못사면 후회와 깊은 참회가 뒤따르리라. 아무튼 구룡에서는 정찰 아니면 물건 안사는 것이 수신제가평천하인 데 가짜는 없다. 다만 비싸게 팔 뿐. 이 곳에는 가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호텔, 맥도날드, 찬청, 가라오케, 나이트클럽, 스텐드 바, 상업건물,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영어가 안되도 흥정은 가능하다. 한국말로 얼마하면 대충 눈치로 감잡고 계산기에 금액을 쳐넣은 뒤 보여준다. 고개를 흔들면 다시 10% 디스카운트한 금액을 쳐넣은 뒤 보여준다. 그리곤 더 이상은 안된다는 시늉을 하며 손을 흔든다. 그러면 장사란 증말 짜증나도록 무서운 것이란 걸 느낀다. 그래서 골목 뒤 스텐드 바에 가면 서양여자가 유방을 늘어내놓고 술을 따라준다. 늘씬한 양년 가슴 한번 주물러주고 싶겠지? 그러나 만지면 작살이다. 허기가 져 나가면 부산집, 금성반점, 이화원, 기타 등등 한국음식점이 지천이다. 이 곳을 벗어나 동쪽으로 가면 침통이 있고 남쪽으로 가면 야우마테이이다. 한마디로 홍콩 트리아드(삼협회)를 상징하는 거리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조용하다. 조금 더 가면 몽콕이 있는 바, 야시장과 사창가, 그리고 해적판 CD, 복제품 등으로 유명하다. 더 가면 이제부터 높은 산모퉁이를 돌아 신계로 발을 드리우나 나도 잘 모른다.

3) 섬

홍콩에서 제일 큰 섬은 란타오이다. 이 섬은 지국총 지국총 배를 저어가면 한시간 거리이다. 어떤 이는 이 곳에서 살며 홍콩으로 출근하기도 한다. 반면 섬이 몹시 험하여 크긴 커도 개발이 안되어 인구는 불과 사만이었다. 바로 옆에 長州(청짜오)라는 조그만 섬이 있는 데 인구가 거의 같다. 란타오는 大嶼山(큰섬 산)이라고도 하는 데 한마디로 섬 그 자체가 산이다.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산. 최고봉이 물경 869M이니 옆을 지나며 보면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이 곳에 보련사라는 절이 있으며 세계최대의 청동불상이 있다. 그러나 가서 보면 1924년에 건립된 절로 운치가 없고 중들도 황색법의에 적색가사를 둘러 싸구려라는 느낌이 든다. 통상 인도의 산야신의 경우 황의를 입고 소승 또한 법의를 노란색으로 한다고 볼 때, 한국과 일본의 승려들만 잿빛 법의를 입으나 운치면에서는 잿빛 승려복이 나은 것 같다. 보련사에서 한참을 내려가면 수상족이 사는 타이오가 있다고 하나 가 보질 못했다.

또 자주 가는 섬으로는 에버딘에서 바라보이는 난마섬이 있는 데 섬이 조그맣고 수풀이 우거지며 주변으로 바라보이는 바다풍광이 좋아 산책을 하러 많이 가며, 한시간 반 정도 산보 후 부두에서 해산물을 사먹고 집으로 돌아오기에 안성맞춤이다.

또 배를 저어가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듯한 평주(핑짜오)를 옆으로 하고 다다르는 곳이 아까 말한 청짜오이다. 거기에는 장보자라고 하는 해적이 온갖 보물을 숨겨놓았다는 동굴이 있는 인구 사만의 어촌이다. 이 곳에 닻을 내리면 이런 곳이 홍콩에 있을까 하는 낡고 누추한 거리가 보인다. 향수를 느끼기에 적당한 이 곳은 섬은 작아도 경사도가 완만하고 모든 것들이 푸근하여 그런지 인구가 많다. 산보하기도 자전거를 타기에도 적당하여 휴일이면 해변에 앉아 바다를 보거나 산책을 즐긴다.

이러한 섬들은 섬의 풍광보다 일상과 홍콩의 번잡함을 잠시 옆에 제쳐놓고 배를 타고 간다는 것이 더욱 좋다. 배를 타고 가면 무수한 섬들이 방파제가 되어 바다는 잔잔하며 홍콩 서안을 벗어나면 각국의 배들이 홍콩 내해에 닻을 내리고 있다. 그 배를 보면 이방의 언어로 금방이라도 속삭이는 것 같고 가끔은 뱃전으로 선원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섬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돌아오면 홍콩의 명멸하는 피곤한 불빛이 우리를 맞이하곤 한다.

4) 그 외…

가끔 차를 타고 멀리 간다. 아니면 전철을 타고 까오룽통에서 구광열차를 바꿔타고 몇정거장을 지나가면 신계의 농촌풍경을 맞이할 수 있다. 때론 타이포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멀리로 간다. 그러면 한적함. 한국의 시골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한적함을 만난다. 추엔완에서 투엔문까지 버스로 간다, 그러면 골든 코스트가 눈 앞에 드러나며 바다가 심심했던지 몇 척의 배가 심드렁이 스쳐지난다. 장군오로 가면 터널을 지난 후 넓은 분지에 아파트들이 동화처럼 나타나며, 사이쿵에서 해하로 가는 길은 섬과 바다와 산의 연봉들이 짙은 햇살 속에 흐느적거린다. 야자수와 해송과 그 사이로 소들이 어슬렁거리고 가끔가다 동화같은 집들이 나타나고 해변에선 사람들이 바베큐를 즐긴다. 추일의 오후, 서서히 해가 지고 해풍이 속살거린다. 그리고 아름다운 저물녘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우리는 이 곳의 이방인일 뿐이라고. 그래서 추억도 없고 이 대지와 바다에 남겨둘 情도 없고 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질 뿐이며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절거린다

6. 추일서정

벌써 3년을 넘게 이 곳에서 살았다. 처음 왔을 때 짧은 영어가 부끄러워 입도 제대로 떼지를 못했다. 이제는 이 짧은 영어실력으로 싸우기까지 한다. 영어가 늘어서? 아니다. 산다는 것에는 염치 체면 폼이 다 시들어버릴 수 밖에 없다. 때론 사람들은 매너리즘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지만 매너리즘이란 인간이란 생명체가 지속적인 긴장상태를 완화하기 위하여 작동할 수 밖에 없는 방어기제 임 또한 이해해야 한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긴장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인간은 미쳐버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으로 전철과 버스에서 한국신문을 보기가 부끄러웠고, 할 일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것이 심드렁해지고 그냥 보통사람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들자 아 여기는 홍콩이지? 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 되뇌어 보던 소리를 더 이상하지 않게 되었고 그냥 이 곳은 내가 사는 곳으로 변해버렸고 더 이상 이 곳에서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고 까지 여기고 외국의 생활에 심드렁해져 버렸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이방인이며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결론일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이 홍콩을 둘러본다. 한국은 겨울이건만 여기는 가을이다. 모든 것은 그대로이다. 내가 오기 전과 내가 살던 때와 향후로도 같을 것이다. 나 하나 오고 간다고 흠집잡힐 것이 없다. 그러나 이 곳을 접어놓고 한국으로 돌아가기에 내 마음이 선뜻한 것이다. 그리고 추억이나 삶의 깊은 의미가 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방인으로 사는 것은 한 발짝 벗어나 외로움과 벗하며 사는 것이다. 체제와 그 땅에 애착없이 약간은 붕떠서 창 밖에서 길거리를 보듯이 지나는 것이다. 그래서 홍콩에서 보는 모든 것이 약간은 불투명하고 어떤 때는 마음 속에 여유도 있다. 이제 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살냄새가 나고 시장거리의 구정물을 조심하며 살아가야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서로 욕설을 하며 싸우거나 집값이 얼마 올랐으며 이 돈으로 시장에서 살 것이 없다하고 실업율이 어쩌고 매일 TV에서 썩은 정치이야기와 살인사건, 때론 백지영과 오양류의 짜릿한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정작 돌아갈 생각을 하니 홍콩의 추일은 깊어만 가고 내가 너무 늙어버려 새로운 생활을 감내하기에 너무 지쳐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아님 내 자신이 영원한 이방인으로 정처없이 배회하기를 바라는 지도 모른다.

이제 북창으로 하버의 날은 저물고 있다. 멀리 떠나려는 유람선이 허연 배를 드러내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 더 있으면 구룡의 빌딩에 네온이 하나씩 점등될 것이고 홍콩의 네온이 바다 물 위에 어릴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추운 가슴을 웅크리고 거리를 거닐거나 관광객들은 명멸하는 네온을 보고자 해안을 배회하고 남국의 야자수 밑에 싸구려 징글벨이 울려 퍼지고 정박해 있던 배들은 고향을 향하기 위하여 굵은 닻줄을 끌어올릴 것이다. 그리고 어디엔가 네온의 그림자가 사라져 버린 그 곳에 등대가 불을 밝히우면 아이 하나가 나와 소리칠 것이다. 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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