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후에

일요일 날, 아내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TV만 보고 있다가 머쓱하여 서랍을 정리하기로 했다. 서랍 속의 파일을 뒤지다가 미농지 위에 파란 볼펜으로 써 내려간 오래된 편지를 발견했다.

위의 편지가 바로 그 편지이다.

편지를 보면서 젊고 보잘것 없지만 아름다웠던 날들이 떠올랐으나, 거실을 청소하고 있는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젊은 시절 내가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는 것을 모른다.

그보다는 내 젊은 시절에 관심이 아예 없으며, 설령 친구들이 나의 얘기를 한다 해도, 아내는 나의 꼬라지와 주변머리를 내세우며 분명 여자 친구란 있을 리가 없다고 오히려 나를 변호할 것이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죽은 듯 살아가는 남편이라는 인간에게는 사랑이란 부재하리라고 단정하던지, 남들이 다들 여자를 사귀고 있기에 형식적이나마 사귀어 봤으리라는 정도로 생각할 지도 모른다.

편지를 읽으면서 젊은 시절에 대한 자괴감을 느꼈다.

사랑하고 삶을 즐기며 지낼 계절에 정신적 폐병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삶에 대한 부조리에 대한 혐오를 즐겼는 지 모른다.

뫼르소가 “오늘 엄마가 죽었다.”를 무덤덤한 마음으로 말하고,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대지의 냄새를 그리워하는 이방인이 되기를 바랬거나, 길거리에서 따귀 한 대를 맞았다고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전락’의 주인공의 명증한 인식을 정각의 경지로 오해했을 수도 있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을 만화책처럼 읽으며, 인간의 치졸함과 허위에 대한 증폭감에 갈채를 보냈다.

그랬다. 초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남루함에 대한 명료한 인식, 냄새 나는 빤쓰를 뒤집어 보듯 투명하게 보는 것이 필요했다. 어차피 인간에게 영혼은 없으니까를 부르짖으며……

그때는 나의 명료한 정신, 삶에 대한 자명한 인식이야말로 죽은 자처럼 인생을 살기보다, 절망을 고통으로 씹으며 악착같이 사는 진실의 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도 인간도 너무 뻔하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염세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절망적인 인간과 피폐한 자의식과 타락한 세상을 넘어섰기에 자연은 우울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찌든 공해에도 불구하고 처절할 정도로 순결했다.

그러한 자연과 세계의 변경에서 진실과 허위와 자연과 기교가 교차해 가며 세상이 짜여져 가는 것을 보는 것 또한 가치가 있었다.

결코 시적인 눈으로 운문의 삶을 보낼 수 없었다.

거친 삶의 누항과 시들어버린 영혼, 불면의 정신의 아우성을 보면서 산문적인 정신 만이 내게 필요했다.

생이 내게 던지는 달콤한 노래 소리나 사랑의 엘레지나 영웅의 서사시는 무의미하거나 공허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젊은 시절의 교오함에 불과하며, 나 또한 황야의 이리와 같이 생활에 깃든 은은한 향내와 그로부터 발원한 위대한 것들을 사랑했다.

소품과 같은 지상의 양식을 읽으며, 메날크에 대하여, 동방의 시장거리에 대하여 추상하거나, 삼포 가는 길을 읽고 남도를 방황하거나 했다.

심장은 차디찼고, 정신은 헤어져 너덜거렸어도, 대지와 지평을 너머 구름과 빛은 계절을 그려내고 찬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대지와 하늘의 변함없음과 천변만화는 종교적 열정이 없다 하여도, 그 자체로 담마파다와 베다이며, 아가이며, 시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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