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녀에게 보낸 편지

이제 봄인 것 같다.

너도 느꼈는 지 모르겠지만, 어제 우리가 산보한 저수지의 습기 찬 뚝 길 위로 새싹이 오르고, 목련 꽃봉오리 위로 고양이 털 같은 빛이 구르는 데, 하늘아래 내려앉은 저수지 건너편 집들은 동화나라와 같이 아스라해 보였다.

우리의 산보는 회복기에 접어든 환자의 병실 창문을 넘어 들어 온 아침 햇살처럼 뿌듯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참으로 오랜 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아침에 깨어나 책가방을 챙기다가 아무런 이유 없이 학교 가기를 포기했다. 마당을 배회하거나, 책을 읽거나, 몽상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밤이 오자 불현듯 네게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열어둔 창 틈으로 비릿한 온기를 담은 찬 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영혼이 열기에 들뜨는 것 같았지만 정신은 투명했다. 아니 내게는 영혼이 없을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몇 장의 편지를 쓰고 찢었다. 사실 나의 편지란 것이 무의미한 것이며, 유해한 단어와 뜻이 없는 언어의 낭비임을 너도 잘 알 것이다. 아무 의미가 없는 편지에서는 단어와 단어가 낱낱이 깨어져 나갈 뿐이다. 무수한 단어를 쌓아놓았다고 그 속에 진리나 사랑이나 철학이 저절로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런 지향점 없는 나의 목소리는 단지 푸념일 뿐이고, 이런 푸념이 시장거리의 째진 목소리가 아닌 온건하고 그럴 듯한 단어로 포장되어 그럴듯해 보인다는 것 뿐이다. 더 이상도 아니다.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그의 말이 진실이나 선함을 지향하지 않듯이……

편지를 쓴 나 자신은 씁슬했고, 너는 내 편지 속에서 너에 대한 사랑이나 젊은 이의 꿈이나 이상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해 왔다고 여겨진다. 그런 것들을 찾지는 못했으리라.

사랑이라든가 우정, 믿음이라는 것은 느낌으로 다가가야 함에도, 나는 그 실체를 찾으려 하는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강 가로 나가 강물이 흐르는 것을 본다, 저녁 노을로 하늘이 붉어질 때까지. 강둑에서 너의 이름을 되뇌어 보거나, 노을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결국 분석이나 논리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고, 피폐한 영혼은 나를 사색과 명상으로 이끌지 못함을 알았다.

때로 내가 선과 악, 진실과 허위, 열정과 허무 사이를 끊임없이 방황하며 중음의 어두운 공허 속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천형이기도 하고, 아니면 남들은 마주하지 못한 심연에서 초월을 꿈꾸는 것이기도 하리라.

아니면 있지도 아니한 사랑을 찾아보겠다고 방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야기 한다. 통속적인 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이제 이야기는 환멸에서 시작하여 고독과 자존심을 지나 멀리 나가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글들을 쓰기 위해서는 약간의 분노와 젊은 시절의 절망(약간은 과장된 의미이지, 진정한 절망은 아니다)이 필요하며, 객관적이면서도 음울한 산문정신이 필요한지 모른다. 아니면 우리는 명료한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데, 아이 씨팔!이다. 그것은 대상이 없는 부르짖음이지만 자명하며 적절한 詩語이기도 하다.

환멸이란 단어는 지난 여름, 뜨거운 폭양 아래서 네가 내게 던진 화두였다. 환멸이란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모든 환상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진실이 드러날 것이며 진실이 너를 편케 하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단어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나의 여자친구는 온갖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단순히 네가 나에게 한 말에 대해서 비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나는 어리석게도 네가 내게 가질 환상이 무엇인지를 모르겠고, 내 스스로가 가식적으로 행동한 것이 있는 것인지 또한 반성은 해 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데 온전한 나를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말을 왜곡하지 않고 말한다면 분명 너의 환멸은 꼴도 보기 싫은 재수없는 놈이라는 함의를 갖는다고 보자. 가슴이 아파도 모든 사안들을 노골화시켜야, 바닥으로 내려가야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무더운 여름과 가을을 지나며 이 환멸이라는 단어를 놓고 깊은 사색을 했다. 어떻게 하면 환멸이라는 단어의 실체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너희들이 말하는 자존심의 치유를 할 수 있을까를 놓고…… 나는 나에게 자존심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환멸을 느꼈다는 네 말에 우스우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네가 단어를 잘못 선택했거나, 다른 여인들이 쓰던 신랄한 언어의 표절을 통한 후련함을 얻기 위해서 환멸이라는 단어를 썼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극단적으로는 미친 개에 물렸다고 치부해도 됐다. 다시 너를 만날 수 없으며, 만나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다. 너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걱정했을 수 있으나, 그것을 억지로 부인해 왔는 지도 모른다.

지난 여름 송정에서 올라와 네게 전화를 하고 너의 어머니가 너를 바꾸어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무런 기대감이나 애착이 없이 단지 초조감이나 공허감에 전화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공중전화 부스 유리 위로 굵은 빗줄기가 부딪혀 흘러내렸고 어두운 도로 위로 빗소리가 아우성이었다. 6월말과 7월초의 투명했던 여름을 보상하듯 비는 억수로 내렸고 전화기 저 멀리로 아득하게 발걸음 소리와 문소리가 어둠 속에서 반짝이더니 네 목소리가 들렸다. 할 말이 없었다. 침묵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만나자고 했고, 너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그 때 나도 나 자신에 대하여 환멸을 느꼈다.

네가 나를 좋아하고 있으며, 나를 떠날 수 없고, 환멸이라는 단어는 잠깐 동안의 기분이었을 뿐이었으며 그 후로 후회하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단호한 너의 목소리에서 뚜렷하게 혐오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내가 갖고 있던 오해로 부터 깨어날 수 있었다.

환멸의 순간, 명료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였다. 그래서 내 자신을 조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노골화시켜 나갔다.

고2 여름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었고 마당의 참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전화가 왔고,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위험하시다는 소리를 했다. 어머니가 집에 계신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새벽에 횟감을 마련키 위하여 남대문 시장으로 가신 것을 확인한 후, 아버지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절망과 비통에 빠져들었고 무수한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혼선을 빚으며 아우성쳤고, 불현듯 내게 다가온 불행을 어떻게 감내할 것인가 하면서 차창 밖을 보았다.

우습게도 7월의 하늘은 아름다웠고 아침 햇살은 싱그러웠다. 머리 속이 정지했다. 병원문을 들어설 때는 의무감에서라도 슬퍼해야 할 텐데…하고 걱정할 정도가 되었다.

병실에 들어섰다. 어머니는 내가 보기에 말짱했으나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을 주었다. 혈연의 유대가 지닌 치졸함을 느끼면서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치졸함을 느끼면서도 허위에 찬 안타까운 표정을 짖고 있음을 알았다. 모든 것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내 속에 있는 윤리와 진실이 작열하는 태양 속에 벌거벗겨지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제 몽상과 같은 도덕률을 구할 수 없으며, 나 자신이 지닌 허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이나 삶의 의미나 우정이나 모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하수구 저 밑 공허가 입 벌린 곳으로 하염없이 말려들어감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손을 굳건히 잡았다.

그리고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으며, 뚜렷하게 모든 것들과 작별을 고했고 황무지를 배회할 뿐이었다.

모든 것과의 결별은 때론 저주이고 축복이기도 했다.

친구들과의 우정이나 연인과의 사랑, 이런 것으로부터 초월할 수 있었지만, 그 속에 깃든 감미로움에 도취할 수는 없었다. 단지 불모지 위로 하늘과 태양, 그리고 낙조, 대지의 향기 만이 나를 진무하였고 끝없이 외로웠다.

따라서 네가 느낀 환멸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공허와 풍자 그리고 젊은 시절에 깃들 수 없는 음울한 산문에 네가 다가설 수 없었고 내 속에 비밀을 네가 풀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내 이야기가 비약이라면 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너와 만났던 기간 동안 내 스스로가 좋아한다 사랑한다를 주입시키기는 했어도 한번도 그 상태에 매몰될 수가 없었고 질투나 애증 따위로 가슴 아프지 않았다. 단지 자극과 반응에 입각한 공교로운 기교 즉 사랑놀이 만이 있었을 뿐이다. 연인에게 이보다 절망적인 사랑은 없을 것이고 빌어먹을 일이고 재수없다는 데 절대적으로 동감이며, 발로 걷어차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사랑이 감미로운 것이라고? 나는 육신과 정신의 뚜렷한 이분법 속에 있었고, 나의 마음을 그 놈의 빌어먹을 정신이 조소를 머금은 채 음산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음산한 미소 속에서 과연 사랑을 창조해 낼 수 있는가? 절망과 허위와 갈증의 변경에 서서 그들의 불멸과 지평의 끝에 아스라히 바라보이는 진리와 사랑, 그리고 아름다움과 선함의 찬란한 금자탑을 서글픈 눈으로 보아왔다.

너에게 묻고 싶다. 고독하냐고?

나는 고독하지 않다. 사물들과 결별함으로써 사물 속에 깃들지 못하게 되었고 외로움을 해소치 못하는 상태를 만나보았는가? 들여다 봄. 제 삼의 나. 어머니의 손을 잡을 때, 뚜렷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픔도, 기쁨도, 흐느낌도. 그 어느 것도 제 삼의 나는 아무 갈증 없는 눈으로 쳐다본다. 아마 입맞춤의 절정에서도 무덤덤한 눈으로 또 바라볼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는 황량함 만이 있다. 이것이 고독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고독이라는 차원은 이미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롭지 않다.

약간의 결여감. 바쁘지 않은 일상의 여유 속에서 건져내는 외로움, 품위 있는 찻집에서 홀로 마시는 커피 등이 고독이라면, 삶의 사치이고 즐길만한 것이지.

어제 저수지를 산보하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저 걷기만 했지? 뚝 길 옆에 있던 동네는 저수지의 수위가 조금만 올라가도 침몰할 듯 했다. 오솔길 옆에 웅덩이들이 가로놓여 있었고 찬 바람 속에서도 올챙이들이 와! 하고 웅덩이 이쪽 저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때 동네 저 쪽 어디에선가 누군가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를 듣자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고요함이 주변에 감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성악가가 되기 위하여 연습하는 것이었을까? 반주 없이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동네를 돌아나올 동안 내내 계속되었고,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정적을 깨치고 싶지 않아 포기했다. 우리는 저수지의 마지막 끝에 다다랐다. 저수지의 건너편 유원지가 보였다. 물이 가득한 저수지 위로 하늘빛과 구름들이 내려앉았고, 유원지의 동그랗고 높다란 허니문 카는 하늘을 뒷짐지고 정지해 있다. 봄날이 가고 있었다. 나는 고즈넉함에 빠져들고 있었다. 혼자 그 길을 산보했다면 그런 고즈넉함을 맛볼 수 있었을까?

시외버스에 올랐을 때, 차디찬 봄바람에 시달린 몸은 다소 피로했고 버스 안은 따스했다. 너는 말했다. “피곤해. 나 좀 잘게.” 네가 눈을 감자, 나는 너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너의 향기를 기억할 수 있고, 새로운 땅에 갈 수도 있으며, 뚜렷한 느낌으로 네가 내 옆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서서히 엷어졌다. 네 체온이 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부드러움으로 밀려들어 왔다. 차창으로 비치는 저녁 햇살 속에 네 얼굴은 은빛 실루엣으로 내 품 속에 녹아가고 나는 더 이상 홀로 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사랑한다는 말 이외의 단어는 찾지 못했다.

1978. 3월말의 어느 날에…

추신: 더 이상 이야기를 끌어갈 필요가 없어 여기에서 줄인다.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요.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이는 황무지의 서시에 해당한다. 무녀 씨빌은 먼지만큼 많은 세월의 수명을 신에게서 받았으나 젊음을 담보 받지 못하여 늙어 쭈그러들었고 결국 조롱에 갇혀 지나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황무지는 죽음과 재생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과연 무녀는 죽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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