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소에 대한 추억

...TORSO

미술평론을 해 보고 싶다, 그것도 서양화뿐 아닌 동양화까지를 아우르는. 그러나 한 번 시도를 해 볼 짝 치면 하나의 그림을 놓고 평을 하기란 힘이 든다.

그것은 미적 체험이라는 것이 즉응성을 바탕으로 하지 논리적, 수학적 하모니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또 어렸을 적 나를 즐겁게 하였던 화보집들이 다 사라졌거나 누님이 시집가면서 들쳐 엎고 가 버려 더 이상 화보를 펴 보면서 즐거움을 누릴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이상 미술관에도 가질 않게 되었고,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 되어버렸다.

어린 나의 집에는 세계문화대백과사전이 있었다. 무료할 때면 적산가옥의 볕이 드는 창 마루로 나가 책을 펼쳤다. 그리고 책 속에 몰입했다. 어머니는 어린 놈이 무엇을 그리 심각하게 보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나는 책 사이에 있는 흑백의 화보에 빠져 있었다. 그 화보는 그리스 조각상이었다. 그것도 토르소에 매료된 아이였다. 반면 라오콘이나 니케의 여신상, 밀로의 비너스에서는 만족을 얻지 못했다.

머리와 팔과 다리가 잘려져 나가 동체 만이 남은 토르소에서 원초적 생명의 양감을 얻었다. 유방과 허리와 복부에서 하체로 이어지는 곡선 속에 응집되었다가 작열되어 나오는 성적에너지로부터 생명의 약동을 느꼈고, 예술적 완성의 극치를 보았다. 결국 파괴 속에서 나는 완성이라는 이율배반을 보았고, 이러한 이율배반이 인간에게 비극이긴 하여도, 저절로 그러한 자연에게는 한낱 무의미함으로 소실될 뿐이다.

토르소의 아름다움이란, 조각상이 돌에서 빚어져 다시금 돌의 형상으로 회귀한다는 데 있다. 회귀의 과정에서 인위는 자연의 불사력으로 치유되며, 인간 의지의 희미한 편린 만을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워즈워드의 시에서와 같이 ‘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질수록’, 아련한 사랑의 영광이 초원의 빛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분명 그리스 조각상에는 장인의 테크닉 이상의 뭔가가 있다.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것으로 종속시킬 것이 아니다. 눈을 감고 만들어야 되는 명상과 같고 손으로 만지면 영혼의 가벼운 체온을 느낄 그러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다시금 석화되는 토르소야 말로 자연의 부드러운 영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파멸이라는 그로테스크한 심상을 얻는 것이다.

영광과 영혼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면? 만약 내게 그럴만한 행운이 있어 지중해의 어느 곳으로 갈 수 있다면 로마보다는 그리스를 택하리라. 영광의 잔영으로 너무도 볼 것이 많아 자신을 상실하는 그 곳보다 이데아가 발아했으나 폐허가 되어 영혼의 고향으로 변해버린 곳으로 가고자 한다.

파르테논이나 원형극장 보다 오히려 돌이 뒹구는 곳, 폐허로 가서 부셔진 기둥에 등을 대고 옛날에 있었을 신전의 투명한 추녀를 통하여 구릉과 바닷물같이 짙푸른 하늘을 보며, 어느 음유시인의 싯귀 하나를 읊고자 한다.

This Post Has 2 Comments

  1. ree얼리티

    대학교 때 미학개론을 듣는 것 같네요.~~
    토르소의 아름다움이란 돌에서 빚어져 다시 돌의 형상으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순환을 할 수 있는 창작, 그 순환을 지켜보고 싶은 이…
    예전에 아이와 로뎅의 [예술의 숲]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때의 생각이 나네요.
    조각품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만드는 이의 고뇌를 통해 아름답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 그것을 볼 수 있는 시선에 대해…
    파괴 속에서 완성을 보는 이율배반적인 나는 없어진 부분까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1. 旅인

      오늘에야 마침내 과거가 폐허를 떠나버렸으니, 무너지게 마련인 사물의 중심으로 폐허를 다시 인도해주는 저 심원한 힘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마음을 쓸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까뮈의 티파사의 결혼 중에서...>
      사멸하지 않는다면 새로움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토르소가 매료시키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제유적인 특징인 것 같습니다. 단지 가슴에서 복부로 흘러내는 곡선 하나 만으로도 조각상의 전체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죠. 사라져버린(보이지 않는) 얼굴의 입술과 콧날 그리고 이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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