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프라즈나파라미타의 노래의 미주

프라즈나파라미타의 노래의 미주

1. 본 반야심경은 小本 반야심경이다. 일반적인 불경의 형식을 갖춘 大本 반야심경의 중요 부분만 발췌하였으나, 대본의 내용이 전혀 희석됨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독자의 심경에 대한 집중력을 강화하는 발췌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관계로 대본은 불경에서 소외되고 있는 반면, 이 소본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으로 불교경전 중 가장 사랑받는 경전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반야심경의 가르침이 부처님이 아닌 관자재 보살과 사리자 사이에 대화였음을 알리기 위하여 대본의 내용을 앞뒤에 요약 첨가하였다.

2. Sunyata(空性)는 Rupa(色)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단지 물리학적 술어와 언어적인 영역을 떠나있어 경험할 수는 있으나 말로 할 수 없는(不立文字)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나는 불생불멸 등의 空觀論적인 단어를 물리학적인 술어로 치환하여 시간, 공간, 질량(존재의 흐름)의 개념으로 대치한 후 부정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또한 Sunya(空) 자체가 분별된 자아로는 경험(인식)이 불가한 만큼 칸트가 『物-自體』와 같은 불가지한 존재(상태)라고 확대 해석하여 언명하기에 다소 무리가 따르나『神, 絶對存在, 道』등의 언어로 조작하여도 된다고 보았다.

반면 가장 해석에 있어 힘든 점은 현대어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뉴턴의 물리학적 실체를 근본으로 하고 있으나 불교의 언어는 상태(諸行無常의 行)를 이야기하고 있지 존재를 말하지 않아 현대어와 서로 사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3. 不은 범어로 Neti이다. 이는 아니다(Not this)로 동양문화 전반에 흐르는 烘托(烘雲托月法)의 대표적인 예다. 홍탁이란 동양화에서 그리고자 하는 대상(달)을 그리지 않고 달 주변에 안개를 그림으로써 달(실체)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심경에서는 空(그려내고자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空을 말로 할 수 없으니까 『아니다.』를 읊어대는 것이지 결코 부정 그 자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즉 방편의 언어로서의 부정일 뿐이다. 이른바 감성의 형식(시간과 공간)이 없는 상태에 어떻게 오성의 범주(사고패턴)가 자리하며, 이러한 이성의 사유가 불가한 상태를 어떤 언어로 노래한단 말인가(言語道斷)?

프라즈나파라미타의 노래, 즉 반야심경은 초기 반야경전이 아니라고 추정된다. 적어도 龍樹(나가르주나)가 中論을 만든 후 나가르주나의 학문에 정통한 後人이 空觀思想에 입각하여 저술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경전의 이름은 서유기에도 나오는 데, 천축에 가는 삼장법사가 외우는 「智度經」이 본 반야심경이라고 보여진다. 반야(智) 바라밀다(度)이라는 경전 속의 구절을 보더라도 그렇다.「智度經」이라는 유마경, 미륵경 등에 준하던 평범한 명칭은 본 경전이 본문 260字의 짧은 문장에도 불구하고 반야사상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으며, 600권에 이르는 반야부 경전의 머리말 역할을 할 수 있고 반야부를 대표한다는 측면에서 그 명칭에 권위를 부여하기 시작하여 지도경에서 반야심경, 반야바라밀다심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등으로 변한다. 특히 제목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과 같이 10字가 되면 본문과 합쳐 270字로 동양(특히 중국)에서 좋아하는 3의 배수가 되어 수적 배열상 완벽성에 도달한다고 본다.

숫자가 나온 김에 글자의 수를 대비해 본다면,

      부정의 단어 : 공(7)+불(9)+무(21)+이(2) = 39
      긍정의 언어 : 색(6)+시(8)+유(01)+즉(2) = 17

엄청난 숫자의 차이가 있으며 이 중 긍정의 언어 有는 앞에 無자가 있어 있지 아니하다 즉 없음의 강조구문이 된다. 반면 不異(다르지 않다=같다)가 2번 나오는 점도 특징이다. 이를 고쳐 표를 만들면,

      부정의 단어 : 공(7)+불(7)+무(21)+이(0) = 35
      긍정의 단어 : 색(6)+시(8)+유(00)+즉(2) = 16

와 같이 변하며, 공+불 14번, 색+시 14번으로 동일 숫자를 기록하지만 무는 21번에 유는 한글자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며 부정의 언어는 기수로 긍정의 언어는 우수로 변환됨을 볼 수 있다. 특징적으로 이들 부정과 긍정의 단어들은 다 空을 지향하고 있다.

4. 한자로 전환을 하지 않은 것은 唐 玄藏이 본 心經을 漢譯하면서 梵語를 소리나는대로 音譯을 하였다. 따라서 이를 굳이 한자로 개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범어의 소리는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이며, 내용은 『가는 이여, 가는 이여, 저 언덕으로 가는 이여, 저 언덕으로 아주 가는 이여. 깨달음이여 영원하여라!』이다. 眞言(만트라)의 특성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증진시킴으로써 믿음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다.

5. ‘이해의 지평’을 열기 위하여 단어의 변조마저 서슴지 않았다. 이는 말하는 자가 알고 있으나 당시의 문명 수준에서는 단어의 부존재로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으나 현재 해당하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은 해당언어로 번역을 하였고, 원문의 단어가 古語로 현대에는 그 의미를 상실했거나 의미가 변조된 것 혹은 단어의 에너지 저하가 있는 것들은 다시 살려내고 색깔을 입혀야 했기 때문이다. 예로 呪는 현대어에서는 무속적인 언어인 바 노래로, 공관론적 단어의 물리용어로의 대체, 空 개념이 가진 고착성(비어있음)을 탈피키 위한 범어로 회귀(Sunya) 등이 있다.

나의 사견

반야경전의 위치는 대승의 초기경전으로써 현상세계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지혜(무상정편지)를 얻는다고 보고 있어 경전이 무척 건조하고 재미가 없는 반면, 불교고유의 훈향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또한 識(자아 등)을 중심으로 하는 唯識과 비교해 볼 때, 유식이 심리적(인식론적)인 측면이 강조된 반면 반야부는 空(본체)을 중심으로 하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어프로우치를 하고 있다. 결국 아얄라식(여래장)이나 Sunya(공) 는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겠으나, 접근방식 상의 차이 상 심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유식계열은 힌두 요가계통의 사상과 혼효되고 있으며, 반야부는 치열하게 제법무아, 제행무상 등의 모든 실체의 고정성에 대하여 불교 자체의 틀로써 부정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부정은 부정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空(Sunya)를 말하기 위한 대긍정의 방편적 부정인 것이다.

(ver.20090407)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다리우스 09.04.16. 23:21
    인상깊게 잘 보겠습니다.
    ┗ 旅인 09.04.17. 13:06
    이런 생각도 있을 수는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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