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대한 단상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었다. 그런데 아뭇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필집 속의 단 한편의 제목도…

몇번인가 읽은 후, 숙부를 따라온 수줍은 사촌동생이 우리와 할 말이 없자 방구석에 앉아 그 책을 읽었다. ‘어떠냐?’ 내가 묻자 ‘참 좋아요.’하고 다시 책에 고개를 박았다. 녀석은 돌아가기 위하여 현관에서 신을 신으면서도 그 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그 책 가져다 읽어 다시 사면 되니까…’하곤 주어버렸다.

그 후 여행 중에 동반할 책을 찾다가 년전에 사촌동생에게 주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다시 사야지 하고 몇해를 보낸 후 서점에서 그 책을 찾아 보았다. 점원은 너무 오래된 책이라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지 못했다.

장 그르니에는 까뮈의 스승이다. 내가 기억하는 섬의 내용은 그냥 빛이었다. 모든 글자와 단어들은 빛을 향해 꼬리를 곰실거리며 헤엄치는 올챙이들. 그 이상의 단어는 그 책에서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외 지중해의 냄새와 명상과 같은 경험과 자유 그런 단어들이 부록으로 실려 있었다. 해와 바다와 자유와 여행, 이런 낱말에 미혹되지 않는 중생은 얼마나 될 것인가.

까뮈의 실존주의적 경향과 장 그르니에의 사상적 편력을 서로 결부시키고 싶지 않다. 그리고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만큼 기억 속의 앙금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섬은 고독이다. 고독을 통해서만 자신을 바라보고 타인을 먼 발치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혼자 여행을 갔을 때만 창문을 열고 하늘에서 바다로 떨어져 내리는 폭양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명상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르니에 그는 인간의 실존을 찾는 부류가 아닌 신비 체험으로 가기 위한 도구인 빛에 취해 있는 라(Ra)의 사제이며 영원한 이교도였다. 그래서 그는 빛이 가득한 식민지인 북아프리카로 갔고 거기서 오만한 제자 까뮈를 만났으리라. 그러나 그 둘이 묶을 수 있는 하나의 테두리는 이웃과 자신이었고 못내 절망하면서도 강렬한 대지의 훈향과 저들 인간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은 아무 글도 쓴 적이 없었다. 그들은 전혀 독자들을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이야기만을 주절거린 수다장이였다. 그러나 그들의 수다는 이방의 세계와 빛을 이야기했기에 신비와 모호에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이다.

홍콩 섬에서 2000.12.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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