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짜오長洲에서

이제 그리운 곳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처한 현실의 피곤함이 지난 시절의 아픔들을 여과해내고, 생활의 마지막 현에 매달려 애잔하게 떨리던 것, 푸른 하늘에서 불현듯 보게 된 흰구름 그리고 가을, 이름 모를 꽃의 잔잔한 향기, 싸구려 좌판에서 맛 본 국수의 미지근함과 남방고추의 짜릿함 같은 하찮은 것들을 우려내고, 골목길의 웅덩이를 지나며 이렇게 곤핍한 생활이 있구나 하고 스스로를 자위하며, 아픔을 감내토록 하는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추억들에는 절실함이 없다. 아련함과 흐릿해진 기억의 바닥에서 추억의 조각들과 헛된 감상들을 건져 그럴 듯한 것을 만들고 믿어버릴 수 있는 자유가 있기에, 인생은 그래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친구의 등을 두드리며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선창가인 청짜오(長洲)에서 시작하고 싶다.

배의 창 옆으로 홍콩의 건물들이 하나씩 스러져 간다. 홍콩 아일랜드의 서쪽 끝, 빅토리아 로드가 언덕을 넘는 길을 좌현으로 두고 앞으로 계속 나가면, 케네디 타운 옆의 다섯평 짜리 섬, 소청주(小靑洲)가 애처롭게 바닷바람에 흔들린다. 드디어 빅토리아 하버 속에서 움추렸던 바다는 가슴을 편다. 비록 섬들에 갇혀있는 남지나해의 끝자락일지라도 제법 잦은 듯 슬픈 듯 파도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섬 그늘에 부딪히는 실금같은 파도에서 풀어져 흘러오는 것 같기도 하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면 섬과 바다와 내륙의 거친 선분들을 하늘이 갈무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수면에 일렁이는 빛과 하늘에서 내리는 빛이 맥놀이지면, 땅과 바다는 그림자 되고 출렁이는 빛이 보일 뿐이다.

빛의 소근거림을 보면서 고물 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졸거나, 선미의 스크류가 만들어내는 포말의 자취를 더듬으며 졸음을 지우기 위해 잿빛으로 지워져 가는 홍콩을 바라봐야 한다.

배는 우현으로 바다가 넘나들 것 같은 섬, 팽짜오(坪洲)를 지난다.

상념 속에는 섬의 골목길로 남지나해의 따스한 바닷물이 맑게 흐르고 소라와 불가사리가 푸른 산보를 하고, 배가 지날 때면 샌달을 신은 소녀가 치마자락에 바다를 함뿍 적시며 골목에서 나와 안녕하고 손을 흔들어 주리라.

팽짜오의 언덕 위에는 외로운 건물이 하나 있다. 그리고 종탑에서 댕그랑 소리가 나는 듯 했다. 건물의 모습이 사라지기 이전에 배는 사십 분의 항해 끝에 청짜오의 들어선다.

긴 땅이라는 이름의 청짜오(長洲)에는 장보자라는 해적의 동굴이 있다고 하고 인구가 사만이지만, 섬은 아주 작다. 그럼에도 부두에서 섬 양쪽 끝으로 난 길, 프라야 스트리트 외에는 한적하다.

부두에 내리면 붉은 벽돌과 시멘트로 지어진 이 삼층 건물들이 만을 따라 이어진다. 건물이 끝난 남쪽은 해물요리로 유명한 소식리(小食里)이다. 거기에는 수조와 타포린 천막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그림자 밑으로는 합판으로 만든 원탁들이 놓여 있다. 북쪽으로는 자전거 대여점이 있는 주택가로 이어진다. 부두에서 벗어난 사람들과 길을 거닐던 사람들이 합류하며, 좁은 프라야 스트리트는 잠시 인파가 넘쳐난다. 거리에는 싸구려 좌판이 있다. 부채며, 끈끈이, 장난감 등을 팔거나, 만두나 국수 등속의 것들이다. 거리의 인파와 아는 자들의 해후의 소란스러움, 거리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육칠십년대의 향수를 느끼게 되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모든 모습이 정겨워지는 것이다.

인파와 광동어의 소란스러움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골목길을 통하여 오분 정도 걸어 섬의 동쪽으로 간다.

어두컴컴하고 한 사람이 지나도 좁을 골목을 지나면 퉁완비취(東灣海灘)다. 리펄스베이의 단정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모래의 색은 약간 흐릿하지만 백사장의 양끝에 있는 언덕은 아늑하게 백사장을 안아주며, 파도 저 편에 홍콩이 보이고, 한 쪽 언덕바지에는 바다로 창을 낸 외로운 호텔이 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이 호텔에서 몇 날 며칠을 밀려오는 파도와 음울한 구름을 보며 마음 속에 침잠하여 모든 번잡한 것들을 지우고자 했다. 아니면 빛이 고운 어느 날, 창을 열고 하늘의 다양한 변주를 보고자 했다. 그러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외로움이 있느냐고 누가 물었다.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정말 외로움을 느끼면 절망할 것이고 미쳐버릴 것이다.

단지 삶의 향기와 같은 외로움스러운 것, 자유가 지닌 하나의 속성,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아니할 고독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늘에는 가을이 비켜가는 데, 11월이 되어도 남지나해의 체온은 식을 줄 몰라 언덕을 오르자 땀이 난다. 이름 모를 나무 그늘을 지나고 도가사당을 지나 섬의 남쪽으로 간다. 섬이 작을 지라도 걷기에는 길은 멀다.

사십 분 만에 도착한 섬에서 여수를 느끼기 어려운 것인가? 아니면 타향에 오랫동안 기대어 살아온 관계로 나그네의 한숨이란 습성이었기에?

남쪽 언덕에서 내려보는 바다는 광대했다. 서녘으로 질 준비를 하는 태양은 금빛 때를 털어내고 반사되는 빛으로 바다는 오히려 검게 보였다.

오후의 지리한 열기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가을이야!
그래 곧 어둠이 내리겠지.

아아! 돌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어둠이란 돌아감의 티켓이다. 객지에 어린 불빛과 어둠 속을 울리는 파도소리와 바람소리, 천공의 성좌와 두려움과 신화를 떨쳐버리는 행위가 돌아감이다.
침침한 등불과 익은 살 냄새와 진부한 이부자리로 기어들고, 오늘의 판박이 내일을 기다리며, 안락함을 만들어 가는 것이 돌아감이다.
돌아가기 보다는 머뭄이, 머뭄보다는 나아감이 그래서 애절하게 돌아가기를 원할 때까지,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 수 있다면……

젤소미나는 길에 버려졌다는 것보다, 머물려고 했기에 슬픔을 맞이했던 것이 아닐까?

바람맞는 언덕에서 갈대를 본 것 같았다.

북회귀선의 아래에 놓인 이 땅에 갈대라니?
가을 오후의 햇살에 언덕 위의 잡초들이 노랗게 바래고 있었다. 아마 조금 만 있으면 코스모스도 피리라.

나는 발 길을 돌렸다.

깊은 밤까지 홍콩으로 가는 배는 있건만, 부두 곁의 해선주가(海鮮酒家)에서 짙은 양념으로 버무린 조개와 생선들을 먹기 위하여, 해면에 비치는 등불을 바라보기 위하여 선창으로 갔다.

생선 국물을 차오판(복음밥)에 올려먹으며, 이국의 언어를 듣는다. 의미는 몰라도 생활의 일부분이 된 광동어의 소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제방에 부딪히는 저녁 파도 소리가 빗줄기처럼 몰려오고, 눈처럼 소복하게 쌓인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그리움이 없다는 것이 슬펐다.

그렇다고 현전하는 것에 매몰된 것도 아니며, 과거와 추억이 없을 정도로 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면서, 얼마나 값어치없는 삶을 살아왔기에 그리움이 이다지도 없다는 것인가?

술을 한 잔 마시고 어둠으로 채워진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차갑거나 미지근하거나 뭔가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싶었기에……

그것들은 실체가 없이 머나먼 해원이나, 가슴 속 깊숙이 가라앉아 발아하거나 점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섬 저편, 불빛이 바다 물에 발을 헹구고 있다. 그 빛 속에 아늑함이 배어 나온다.

아내는 음울한 나의 상념과 뭔지 모를 것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고도우가 될 지 신이 될 지는 나 조차도 모른다. 아내 또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저 하늘 끝에서 뭔가가 내려와 주기를 간구했을 지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 지 알 수 없기에, 저들은 돈을 갈구하고, 신에 빠지며, 애증과 분노를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것은 해방. 산다는 것으로부터의 해방. 거창한 것이 아니라, 시골 길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편지를 나르거나, 석양이 질 녘에 등대에 올라 점등을 하거나, 머나먼 길 위에서 편지를 쓰고, 지금과는 약간 다른 생활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내에게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거나, 뜨락이 넓은 창 마루에서 앉아 차를 마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행복인 지, 아픔인 지, 허무함인 지 또한 모른다.

배가 왔다. 수은등 밑에 유령 같은 동체 속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간다.

자리를 잡고 앉자. 돌아감에 대한 거부감이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기적을 울리고 출항을 한다.

나는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오.
다시 이 곳에 오게 될 지는 기약이 없는 사람이라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안녕이란 말 밖에는 없다오.
안녕~

내 대신 어린 딸이 앙증맞은 손을 흔들며, 안녕~ 하고는 고개를 돌려 웃는다.

어둠 속에서 갈매기가 지나는 지 끼륵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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