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의 가을

나는 변경에 살고 있다. 변두리라는 말이 정확하지만, 이제는 변두리라는 누추하고 초라한 이미지는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지하철은 내가 내리는 역에서 나누어진다. 나누어진 철로는 몇 정거장을 못 가 서울의 끝에서 멈춘다. 3군데의 역이 집에서 등거리에 놓여있다. 집에서 이삼백 미터만 걸어가면 주택가는 끝나고 숲과 들이 있다. 그렇지만 봄철 귀청을 시끄럽게 하던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이 곳에서 들을 수 없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 시침처럼 느리게 변해가는 나무와 숲의 색조의 미묘한 움직임 또한 볼 수 없다. 간혹 집으로 돌아오는 토요일이나 휴일 담배를 사오다가 길 옆의 나무 위에 내려앉는 햇빛과 반투명으로 일렁이는 이파리의 환호성을 들을 수가 있을 뿐이다.

나는 도시민이다. 그래서 아쉽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나무들이며, 꽃. 풀들의 이름을 알 수 있고, 들 위에 가득한 침묵과 바람소리, 새들이 비상하는 소리와 깊은 겨울 못의 어름이 깨지는 신음을 들을 수 있으리라. 아니면 숲에 낙엽이 지고 조용히 부패하는 냄새와 때론 골을 가득 채우는 연기냄새에 탐닉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무엇을 느꼈을까?

도시에 있으면서 습기차고 쓰레기에 뒤범벅이 된 좁아터진 골목에도 늦여름의 지글거리는 석양이 내려앉고, 김치찌개 끓이는 냄새와 동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보았다. 전신주에 풀칠로 걸린 시네마 극장의 이본동시상영의 벽보와 골목으로 흘러 드는 개숫물과 웅덩이 옆으로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넝마주이가 휴지통을 뒤지고, 걸인들이 한푼 줍쇼 라고 웅얼거리던 것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다만 고층 빌딩의 유리면 위로 호마이카 칠 한 석양이 반사되어 도로와 골목 위로 뿌옇게 내려앉고 우리는 빛인지 안개인지 조차 모를 광막 속에서 지친 오후를 향해 집으로 바삐 돌아갈 뿐이다. 밤이면 어디에선가 하늘을 향하여 장명등을 켜며 나 여기 있노라고 건물이 올라선다. 그러면 그 옆에도 또 그 바로 옆에도 빌딩과 건물이 올라선다. 도시에는 암흑과 빛의 조화로 찬란한 영광이 있고 빨간 십자가들이 도시의 빛 속에서 투쟁적으로 일어선다. 나는 높은 아파트의 베란다 창틀 사이로 그러한 도시의 정경을 보았으며, 하루가 지는 모습에 흐뭇해 했다.

때론 이 곳에서 무엇을 하는가 하고 묻곤 한다. 그러나 세상의 다른 곳에 있다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법은 없다.

어느 책에서 ‘그들은 가난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라는 구절을 읽었다. 나는 그 글에서 절실함을 느꼈다. 자유의 필요충분 조건으로서의 가난이 아니라. 가난이 그들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자유는 그들이 바라던 것은 아니다. 예속된다고 하여도 가난하지 않기를 바랄 뿐, 배고픔과 절망의 끝에 놓여진 자유를 선택하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가 무슨 뜻에서 그 글을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구속의 대가로 돈을 벌고 있으며, 도시의 변경에 있고, 이 곳을 떠나지 못하리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절망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라는 말은 멋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자유의 다음은 이라는 질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러나 가을이 오고 나는 어느 평일 날 낙엽 지는 들로 나가 개암나무의 둥치로부터 새어 나오는 늙은 계절의 냄새와 메마른 대지의 촉감 그리고 멀리 사라져 버리고 희미한 빛만 남는 길과 하늘이 그렇게 드높다는 것을 다시금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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