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회;council;ecumenical council

예수는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 예수 자신에 의해서도, 하느님에 의해서도 아닌, 바로 인간들에게…

325년 예수는 그리하여 하느님이라고 인간들에게 비준을 받는다.

그리하여 예수는 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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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기독교에 대하여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니케아공의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독교인이 박해받던 AD180년경 리용의 주교인 이레나이누스는 이단반박(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통하여 이단을 극복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초기 교부철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의 최대의 목표는 당시 융성하였던 미트라교나 조로아스터, 헬레니즘의 전통에 기원한 다신적인 토착종교 등에 대한 대항이 아니라 기독교 내의 이단인 그노시스파의 제거에 있었다. 그는 그노시스적인 분파주의가 기독교 전교에 암적이며, 특히 주교의 권위를 헤치고 기독교의 통일성을 저해한다고 보았다. 그의 의도대로 초기 기독교 당시 소아시아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창궐하였던 그노시스는 3세기경 소수파로 약화되었고 그 후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탄압 속에서 교세를 확대해 가던 기독교는 4세기에 들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는 데, 다름아닌 콘스탄티누스1세가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인정한 사건이다.

콘스탄티누스1세는 그 후 기독교 내부의 교리 상의 문제에 직간접으로 중재에 나서게 되었는 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대한 유명한 판결이 내려진 325년의 니케아공의회(The Council of Nicaea: 1차 공의회)이다.

이 회의는 318명의 주교가 장로, 수행원을 대동하여 약 1,500여명이 보스포러스 해안의 소도시인 니케아에 모여 5월20일에 회의를 열어 2개월 후인 7월25일에 끝났다. 이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의제(Agenda)는 여러가지였으나 318년에 제기된 아다나시우스의 ‘성자와 성부는 동질’이라는 주장과 아리우스의 ‘성자는 성부보다 낮은 이질’이라는 논쟁이 벌어진 결과. 이 회의에서 에우세비우스의 주장대로 ‘동질’이라는 판결이 내려지고 니케아 신조(Creed of Nicaea)가 성립된다. 즉 공의회를 통하여 예수는 하나의 유한한 예언자적 지위에서 신으로서의 신격을 비준받게 되었다.

※ 아리우스는 로고스(Logos: 성령)와 함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다른 피조물과 같이 無에서 창조되었기에 영원할 수가 없으며 신과 마찬가지의 신성을 가질 수 없다. 신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점을 가지지 않는 반면 이들은 시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앞서 말한 이레나이누스 주교에 의해 만들어져 200년대부터 소박한 형태로 세례식 등에서 사용되던 사도신경(사실은 그노시스파를 제거하는 목적으로 작성)을 이 니케아 신조는더욱 도그마화 하였으며, 기독교를 정교화하고 강력한 교권을 확보하는 무기로 활용하였다.

니케아신조의 내용을 보면,『우리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일체의 사물들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성부 한 하나님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부의 본질로서 비롯된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오. 빛 중의 빛이시오. 진정한 하나님 중에 하나님이시니. 그는 창조되지 않았고, 성부와 동일 본질로서 잉태되셨으니, 그를 통하여 천상과 지상의 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는 우리 인간들과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성육신 하시고, 인간이 되심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제3일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으니,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는다. 그러나 그가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 잉태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무에서 그가 비롯되었다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서로 다른 본질 혹은 정수라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그가 창조되었다거나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면 교회는 저주하는 바이다. 아멘』이라고 되어 있다.

분명 니케아공의회는 그노시스와 오소독스 간의 대립이 아니라 기독교 정통파 내의 교리 상 분규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 후 그노시스파를 척결하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하게 된다.

니케아공의회에서는 성부와 성자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으나 성령에 대한 판결이 유보되었기에 성령에 대한 논의는 381년 제2 기독교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회의(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2차 공의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다만 위(位)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계획하신 분이시고, 예수님은 그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예수께서 이루어 노으신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일을 하시노라,』고 하여 聖 삼위일체의 교리가 정립된다.

이러한 신조(Credos)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적 정통주의는 제국의 지원 하에 교권을 확립해나가기 시작했다. 니케아공의회 1년 후에 콘스탄티누스1세는 정통주의적 가르침에 도전하는 모든 저서를, 즉 이단적인 기독교인들의 저서들은 물론이고 예수에 관해 언급하는 이교도 저자들의 책도 몰수하고 소멸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교회에 고정된 수입이 할당되도록 조치하는 한편, 331년에는 새로운 성서사본들을 만들도록 교회에 위탁하였으며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미증유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로부터 4반세기 전인 303년, 이교적 황제 디아클레아티아누스가 모든 기독교 전적들을 파괴한 상태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새로운 판본을 위탁하였을 때, 정통주의자들은 산재해 있던 자료들을 그들의 교리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대로 취사 선택하여 개정, 편집, 재집필할 수가 있었다.

신약성서의 핵심적인 판본들 대부분이 이 때에 만들어졌을 것이며, 예수의 캐리그마 또한 독특한 형태로 주조되었을 것이다. 특히 현존하는 5천개의 초기사본들 중 4세기 이전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의 사본들은 초기 박해와 디아클레아티아누스 때 분서당했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콘스탄티누스 때 경전화(Canonize)하는 과정에서 더욱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분서되고 말았으며, 그노시스 문서에 대한 훼멸은 더욱 심하였다.

– 이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