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즈 와이드 셧’과 함께 라캉을

How to read 라캉 – 3장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라는 이 부분은 위험하다. 지옥인 이웃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전에 미쳐버릴 수가 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며, 이해를 한단 말인가? 지젝 또한 프로이트와 라캉이 제 정신이 아니듯이 미쳤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미치게 하려고 이 부분을 쓴 것이 틀림없다.

그럼 왜 타자(Other)는 대문자로 쓰는가? 물론 미쳤기 때문이다로 이 장은 시작된다. 그렇다. 이 장은 소타자이던 대타자이던 간에 어떤 미친 것, 괴물들에 대해서 말하고, 주체인 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다.

지젝은 대타자의 핵심적인 신비는 익명의 상징적 질서가 주체화되는 지점에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성함이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인간의 삶보다 더 큰 인격, 모든 주체에게 초월한 존재로 다가오는 인격화된 대타자가 아닌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역사, 우리에게 필연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대의Cause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나와 다른 인간존재로서의 기이한 주체가 아니라, 어떤 제삼자, 현실적 개별 인간들의 상호작용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주체를 갖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 발생하는 치명적인 수수께끼는 ‘이 불가해한 주체가 내게서 무엇을 원할까‘하는 물음이다.

타자, 지옥으로서의 이웃…

“인간은 타자로서 욕망한다”라는 말은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은 ‘탈중심화’된 대타자, 상징적 질서가 구조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대타자(이 안에는 소타자들도 있다) 즉, 이 불가해한 주체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묻고 나는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그 물음에 답을 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나의 욕망을 형성해 나간다. 아무도 자동차를 갖고 싶어하지 않으면, 나는 자동차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폭스바겐에서 내가 딱정벌레 한 마리 사주 길 욕망(광고)하기 때문에, 딱정벌레를 사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문장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주체(나)는 타자 자체를 욕망하는 존재로 경험하는 한에서만, 타자를 불가해한 욕망의 자리로 경험하는 한에서만, 불투명한 욕망이 그, 그녀(타자)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경험하는 한에서만 욕망한다. 타자는 수수께끼 같은 욕망으로 나에게 말을 걸 뿐 아니라,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 즉 내 욕망의 수수께끼를 나에게 직면시킨다면서 미궁으로 나를 밀어넣는다. 한번 아래의 사례를 보자.

유혹과 스토킹의 사이

예쁜 ‘G’irl는 멋진 ‘B’oy로 부터 “사랑한다”는 말은 듣는다. 흥분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폭력적이고 외상적이다.

  • 폭력적이라 함은, B라는 불가해한 이웃의 침입일 뿐 아니라, G는 자신과 자신 속에서 B의 사랑을 촉발한 불가해한 x 사이의 간극을 느끼게 되는 히스테리적 상황을 맞이했고, — B야! 사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녀자가 아니야.
  • 외상적이라 함은, G 자신이 부인하고 있던, 누군가에게 유혹받고 싶다는 (추잡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 그래, 나는 추잡하다. 어쩔래?
  •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폭력적이고 외상적인 침입이야말로 G를 짜릿하게 한다는 것이다. — 흥분이 되지 않는다면? B라는 그 자식은 스토커가 되고 마는 것이지.

욕망하는 존재‘인 B가 사랑한다고 자신의 ‘불투명한 욕망‘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G는 유혹받고 싶다는 야한 ‘자신의 욕망의 수수께끼‘에 직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웃은 그런 존재다. 지옥이거나, 아니면…

위의 예문을 통하여 이웃(B)은 나(G)를 히스테리화하는 불가해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존재의 핵은 이웃의 욕망, 나에게 뿐 만 아니라 이웃 자신에게도 수수께끼 같은 욕망이다. 이러한 이웃의 괴물성, 참을 수 없는 강도와 불가해함으로 다가오는 욕망의 궁극적인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라캉은 사물(Das Ding)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인간이 아닌 괴물 즉 사물들로 둘러싸인 이 세상에서 법의 궁극적인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잊지 않게 하는 것, 이웃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으로, 법은 이웃의 괴물성에 대한 일종의 방호벽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사물로서의 타자가 지닌 이 심연을 맞이(회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당신은 내 아내입니다, 내 주인입니다. 내 친구다”라는 ‘정초적 말(founding word)’을 사용한다. 즉 어떤 이웃을 불가해한 이웃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하여 특정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에게 “당신은 나의 “아내다”, “주인이다”, “친구다”라고 부르고, 나는 아내, 주인, 친구로서 그들을 대하며,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나를 남편, 하인, 친구로 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다른 놈과 눈이 맞아 놀아난다거나, 주인이 품삯을 주지 않거나, 친구가 배신 때리기 놀이를 한다면… 그는 다시 인간이 아닌 것, 즉 사물로 되돌아가게 된다.

라캉은 우리는 실천적 안티 휴머니즘을 인정해야 한다고,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라고 부른 차원을 넘어서는 윤리, 인간성의 지극히 비인간적인 핵심과 대면하는 윤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잠재된 괴물성, 보통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로 포괄되는 현상들 속에서 폭발하는 악마적 차원을 두려움 없이 고려하는 윤리학을 의미한다.

제 3의 차원 : 안 죽었거나 안 인간이거나…

肯定(1차원)He is dead.He is human.
否定(2차원)He is not dead.He is not human.
不定(3차원)He is undead.He is unhuman.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이전에는 긍정과 부정(negative) 두가지 차원 만 있었다,

  • 죽었거나, 살았거나(죽지 않았거나),
  • 인간이거나, (인간이 아닌) 신이나 짐승이거나

칸트는 제 3의 차원을 연다, 정의할 수 없는(indefinite) 차원.

  • 안죽음 :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괴물과 같은 산 죽음(living dead)
  • 비인간 : 인간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인간 존재에 내재한 어떤 끔직한 과잉에 의해 표지된 인간

이로 인하여 칸트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은 단지 이성적 존재, 동물적 정욕과 신적 광기의 과잉에 맞서 싸우는 이성의 존재였다. 하지만 칸트 이후 맞서 싸워야 할 과잉은 주체성 자체의 중핵 바로 그것에 내재해 있다.] 결국 [칸트와 함께 광기는 인간존재의 핵심 자체가 무제한적으로 폭발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말을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까, 나(我)와 내가 아닌 타자(他我)이 있다. 그리고 제 3의 차원인 내가 아닌 나(非我)가 있다면? 위의 정의할 수 없는 차원의 ‘비인간’이란 단지 이웃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의 핵심 즉 나의 주체성 자체의 중핵 속에 있다는 것이 된다. 무의식의 주체인 나와 미쳐서 결코 내가 아닌 나와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쓸린 나, 바로 그것 아닌가?

환상과 무의식 그리고 주체…

이 끔찍한 타자의 심연이 과도하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외상적 충격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우리는 타자의 욕망과 대면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안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환상이 타자의 수수께끼 같은 욕망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환상의 역할…

실재계의 외상에 대한 필터 역할, 욕망을 상연하는 스크린 역할을 함.

상연하는 욕망은 주체(나)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

욕망의 근원적 질문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또 근본적인 차원에서 환상은 내가 타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다.

환상은…

  • 주체의 인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객관적이 아니다
  • 주체가 의식적으로 경험한 직관에 속하는 어떤 것, 즉 나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 주관적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주관적이라는 범주

‘즉, 사물이 내가 보는 방식으로 보이지 않음에도 실제적이고 객관적으로 내게 보이는 방식’

따라서…

  • 환상의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것은 무의식에 남게 됨
    – 나의 가장 내밀한 주관적 체험 — 주관적인 것
    – 사물이 실제로 나에게 보이는 모습 — 객관적인 것
    – 내 존재의 핵심을 구성하고 보증하는 근원적 환상
  • 환상을 통하여 상징계에 진입함에 따라 의식할 수 있게 됨

<밑의 파란 글씨를 위의 표와 비교할 것>

아이는 딸기 케이크를 먹는(상연되는 욕망은) 동안 자기가 맛있게 먹는(자신의 욕망이) 걸 엄마 아빠가 만족스럽게 보고 있었다는(타자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점이다. (이를 통하여) 딸기 케이크를 먹는 환상은 실제로는 이와 같은 부모가 준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아이와의 동일성을 형성하려는 시도에 관한 것으로, 그것은 부모를 만족시켜서 자신을 그들의 욕망의 대상(근본적인 차원에서 내가 타인에게 어떤 존재인지를)으로 만들어준다(알려준다).

성적 향락은 실재적이다. 그것은 아찔한 강도 때문에 외상적인 어떤 것이며, 우리로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성관계가 작동하기 위해서 얼마간의 환상이 상연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외상에 대한 필터 역할)

결국 나는 내 가장 내밀한 주관적 체험, 사물이 ‘실제로 나에게 보이는’ 모습, 내 존재의 핵심을 구성하고 보증하는 근원적 환상을 빼앗기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그것을 의식적으로 경험하지도, 확신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환상의 너머, 의미의 세계(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한 무의식이다. 경험했지만(알지만) 나는 모르는(기표화되지 못한), 모르는 앎의 세계다.

무의식이란 :모르는 앎…

구분안다
(인식)
모른다
(인식불능)
아는 것
(지식)
아는 것을 안다
(의식)
아는 것을 모른다
(무의식)
모르는 것
(무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의식)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비의식)

환상을 통과(상연)하지 못한 관계로 경험(아는 것)을, 상징화하지 못한(모르는) 것이 무의식이다.

그리고 무의식에 남아 있는 것은,

  • 내 가장 내밀한 주관적 체험
  • 사물이 ‘실제로 나에게 보이는’ 모습
  • 내 존재의 핵심을 구성하고 보증하는 근원적 환상
  • 외상
  • 상연되지 아니한 욕망 등

표준적인 관점에서, 주체성을 구성하는 차원은 현상학적 (자기) 체험의 차원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주체는 주체가 (자기) 체험하는 핵심 측면(그의 근원적 환상)이 그에게 접근 불가능하게 될 때, 원초적으로 억압될 때 출현한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무의식이란 접근 불가능한 현상이지 내 현상학적 체험을 규제하는 객관적인 메카니즘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실체가 우리의 내면적인 삶(외면적 행위로 소급될 수 없는 환상적 체험)의 징후를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주체를 만나게 된다는 통속적인 생각과 반대로, 인간의 주체성을 특징짓는 것은 그 둘을 분리하는 간극이라는 것, 환상이란 궁극적으로 주체에 접근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라캉이 말한 것처럼 이 접근 불가능성이 주체를 ‘텅 비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통해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체험하는 주체라는 표준적인 관념을 완전히 뒤집는 어떤 관계성을 갖게 된다.

이 이상한 관계는 텅 빈, 비현상학적인 주체와 주체에게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현상들 간의 관계다. 다시 말해 정신분석은 주체 없는 역설적 현상학을 공식화시킨다. 즉, 주체의 현상이 아닌데 주체에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 말이다. 그렇다고 주체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주체는 정확히 배제의 양태로, 분리된 모습으로, 그, 그녀의 체험의 핵심을 받아들일 수 없는 대행자로서 거기 참여한다.

주체에 대한 어쩌고 저쩌고…

지젝에게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현실적 개인의 ‘나’가 아니라,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다. 이 텅 빈 장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의 반대편, 모든 규정된 것들의 부정성이다.

지젝은 바로 여기, 아무런 내용물없는 텅 빈 장소에 주체를 위치시킨다. 즉 주체는 공백이다. 지젝은 코기토를 자기 자신에서 세계의 나머지 부분이 축출될 때 남게 되는 텅 빈 공간으로 설명한다.

–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중에서

나는 이 글을 이렇게 새긴다. 코기토 이전에는 실재계도 상징계도 없다.

Cogito(나는 생각한다)로 틈(간극)이 생기고 그 틈은 실재계와 상징계를 나눈다. 주체는 그 틈을 메우(표현, 사고 등)기 위하여 상징적 질서 즉 언어를 더듬는다. 하지만 상징적 질서(언어 등)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틈을 메우지만 결코 메워지지 않는다. 이것이 결여이며, 결여를 감당하는 것 또한 주체다.

…이러니 사람이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가 쉽겠는가?

만약, 상징계가 실재계를 완전하게 재현한다면 : 자연상태 즉 생각이 없는 상태

  • 상징계도 실재계라는 경계는 없으며 : 실재계=상징계
  • 생각(Cogito)마저 없다
  • 그러므로 주체는 없다 :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계가 실재계를 불완전하고 재현하기 때문에 : 언어상태 즉 생각이라는 사태가 발생

  • 결여에 따른 생각의 발생 : 생각한다
  • 그러므로 주체가 출현 :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틈(주체)의 도표…

생각을 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그 생각(틈을 메우는 방식)이 주체를 결정한다.

실재계상징계
주체여호와이다, 대타자 중 하나다, 나는 믿지 않는다, 이미 죽었다,
무당의 돈벌이 수단이다, 필요없다, 없으면 윤리가 무너진다.
에이즈주체인류 타락에 대한 징벌이다, 면역결핍이라는 의학과제다, 제약
회사에서 만든 가짜다
, 짐승들에게서 옮았다.
빨갱이주체나라를 말아먹는 놈들이다, 이승만이 만든 가짜다, 김일성이를
숭배한다, 서로 증오하기 위한 단어다, 민족을 둘로 가르는 단어다.
  • 나(주체)는 신(실재)을 믿지 않는다(상징)
  • 나(주체)는 에이즈(실재)를 제약회사에서 만든 가짜(상징)라고 생각한다.
  • 나(주체)는 빨갱이(실재)가 서로 증오하기 위한 단어(상징)라고 생각한다.

즉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나(주체)이며, 빨갱이가 서로 증오하기 위한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주체)다. 그러나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는 모른다.

강간이란…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강간이 그토록 외상적인 충격을 주는 것은 단지 그것이 난폭한 외부적 폭력이어서가 아니라, 희생자 안에서 부인된 어떤 것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1. 페미니스트에게는…

  • 강간은 외부로부터 강제된 폭력이라는 최소한의 공리
  • 하지만 여성의 분열되고 히스테릭한 위치를 해소치 못함(성적으로 학대받고 착취당하는 것을 불평하면서도 그것을 원하고 남자의 유혹을 유도)

2. 정신분석가에게는… 

                  강간 피해자1강간 피해자2
꿈은 거칠게 다루어지고 심지어 강간당하고 싶다.남성 쇼비니스트 중심의 생각에서 자유롭다.
반면에 강하게 꿈을 부인한다.부인할 꿈이 없다.
외상은 강하다약하다

두 사람이 강간을 당했다고 할 때 ‘외부의’ 사회적 현실로 “그녀의 꿈 재료’를 실현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피해자1에게 훨씬 외상적이다.

 3. 강간범에게는…

이 놈들은 강간하는 것을 꿈꾸지 않는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신사의 환상을 갖는다. 강간은 자신의 무능함으로부터 실제 삶 속에서 그런 파트너의 발견으로의 폭력적인 이행이다.

꿈이란…

꿈과 현실의 대립에서 환상은 현실의 편에 있으며, 외상적인 실재와 대면하는 것은 바로 꿈에서 다. 이것은 꿈이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 자체가 자신의 꿈을(꿈 속에서 드러나는 실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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