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마니차를 돌리다

How to read 라캉 – 2장

진짜와 가짜…

이번 장에서는 진짜가 만들어내는 허구와 가짜로 부터 울려나오는 진실의 변주를 보여준다. 

예전에 순풍산부인과를 보면 웃긴 장면이 나온다. 때에 맞춰 화면에서 웃음소리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대타자에게 웃긴 것을 알리기 위하여 힘들게 웃지 않아도 된다. 환상적이게도 TV가 나 대신 웃어주기(대타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 또한 TV가 대신한다.

상호작용…

상호작용을 상호능동성이라고 하자.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열심히 골프게임을 하고, 매일 페이스북을 하고, 짜릿한 야동을 보고, 김어준의 ‘다스뵈이다’를 유튜브로 킬킬거리며 본다. 이것이 바로 상호능동성이다. 하지만 정작 골프를 치러 가지 않고, 친구를 만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는다. 불의에 대한 저항은 다스뵈이다가 나 대신 한다. 즉 능동적일수록 나는 수동적이 된다. 이것이 상호능동성의 짝패인 상호수동성이다.

상호수동성/상호능동성 = 어떤 일/가짜 활동 = 예정설의 역설

역으로 상호수동성은 이렇다. 티벳의 (통을 돌림으로써 기도를 대신해주는) 마니차, 중국에 있었던 (상가집에서 상주 대신 울어주는) 곡비(哭卑), 80년대의 (드라마를 대신 봐 주는) 비디오 테입 등이 상호수동성의 장치다. 오늘 한 장사의 이문을 따지면서 경문이 들어있는 마니차는 돌림으로써 기도를 할 수 있다. 곡비가 우는 동안 유산상속이나 장지를 마련하는 등의 중요한 일에 몰두할 수 있다. 비디오 테이프가 일일 드라마를 보는 동안 나는 잔무를 처리할 수 있다. 게다가 마니차의 기도는 잡다한 생각들로 지저분한 나의 기도보다 더욱 순수하다. 곡비의 애절한 울음소리에 돌아가신 망자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칠 수도 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된 드라마를 볼 생각을 하면서 흐뭇하다.

여기에서 잠시 생각할 꺼리가 있다. 티벳의 마니차가 나 대신 기도를 해주 것에 대하여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반면 우리는 주일의 연봇돈이나 사찰에 꼬라박는 시줏돈이 우리의 믿음의 크기라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다. 믿음의 파이 또한 가난한 사람에게는 돌아갈 것이 없다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서 우리는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지젝은 가짜활동이라는 강박신경증자의 전략을 거론한다. 어떤 폭발 직전의 긴장상태에 있는 집단에서 강박적으로 행해지는 항상 어색한 침묵 상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그 침묵 상태가 참석자들에게 잠재된 긴장을 대면할 수 있도록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치료 중 강박신경증자는 분석가에게 끊임없이 사건 사고, 꿈, 자기 인식의 말들을 쏟아낸다. 분석가가 진실로 문제 되는 것을 물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분석가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말을 한다. 즉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박적으로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예정설이 어떻게 역사 상 가장 생산적인 활동을 촉발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탱하는지 보여준다.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멸망이 일어나지 않도록(대타자의 고정불변을 지탱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끊임없이 활동한다.

과거의 기원적 진실로의 회귀…

앞의 장의 편지에서 보듯이 나의 감정과 생각, 순풍산부인과를 보면서 느낀 우리의 내밀한 감정과 태도가 타자의 형상으로 전치되는 현상은 라캉의 대타자가 지닌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이 현상은 믿음이나 지식의 경우에도 발생하는데 주체(나)의 지식이 타인에게 전치되는 현상을 지시하기 위하여 ‘안다고 가정된 주체(subject supposed to know)’란 개념을 사용한다. 예전 TV극의 형사 콜롬보는 어찌된 셈인지, 시청자들이 본 살해 사건의 진상을 다 안다. 진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 어떻게 용의자에게 증명할 것인가 하는 점만 그에게 남는다. 이것은 중세교부 철학에서 신의 논증과 닮아 있다.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는 우선 신을 믿고, 그 믿음을 기반으로 신념의 진실성을 입증할 증거를 따진다.

안젤무스의 논증

  1. 신은 정의상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 큰 존재다.(가장 큰 존재다.)
  2.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크다.(상상<실재)
  3. 따라서 신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상상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상상된 가장 큰 존재 보다 더 큰 실재 존재가 존재하지 않으면 상상될 수 있는 존재보다 클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논리다. 상상은 시공을 뛰어넘는다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 정신분석가가 치료 과정에서 갖게 되는 기능을 보자. 환자는 절대적 확신 속에서 분석가가 자신의 비밀을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신분석가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환자의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확신을 체현하는 역할 만 한다. 그러면 환자가 이미 무의식 속에서 알고 있는 것을 분석가라는 인물에게 전가시키는 이 현상을 치료 중에 일어나는 전이 현상의 핵심으로 지적한다. 분석가가 이미 내 증상의 의미를 안다고 가정하면 (환자인) 나는 내 증상의 무의식적 의미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치료가 되었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또 환자가 도달한 증상의 무의식적 의미 또한 진실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있었을 것으로 가정된 과거(the past supposed to have been)의 기원적 진실로의 회귀’라는 것에 대입해 보자.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루터는 기독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을 수행했는데, 그때 그는 자신이 단지 수 세기에 걸친 카톨릭의 타락 때문에 가려진 진실을 드러낼 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루터는 중세 이전 과거에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 결과, 개신교를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수입되고 여기에 부흥목사의 신앙 간증 두 큰술과 빤쓰 서너장을 섞어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개독교라는 변종을 만든다. 스코틀랜드 스커트도 19세기 무렵에 나타난 예전에 없었던 복고풍 패션일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과거의 기원적 진실로의 회귀라는 것은 우리의 추억에도 적용된다. 남자의 나이 스물에 미팅에 나가서 어떤 여자아이를 만났을 수 있다. 서로 사랑하기에는 남자가 그렇듯이 여자 또한 아주 평범했다. 하지만 둘의 구태의연한 만남은 계속되었다. 서로 좋아해서 라기보다,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미지근한 만남 끝에 결국 둘은 헤어진다. 그리고 시간이 가고 해가 가고 세월이 간다. 남자는 문득 자신의 인생이 허전하다고 느낀다. 그러다가 그녀와 열렬히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과거의 기원적 진실을 떠올린다. 자신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좀 괜찮은 파편을 모으고 그럴 듯한 대화와 멋진 장면(이삼십년 전의 기억은 허구에 가깝다)을 가미하여 애정소설 한편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추억은 애잔하고 아름답게 각색된다. 회귀 자체가 (실재하지 않았던) 사랑을 구성하는 것이고, 과거의 기원적 진실이란 허구다. 지금의 현실이 아무 내용이 없다면, 되씹어볼 젊은 시절의 사랑 동화가 더욱 요청되는 법이다.

여기에서 리비도적인 실재를 분석해보자. 사랑했다(exsist)면 추억은 없다, 사랑했던 진실이 있을 뿐. 사랑하지 않았기(un-exsist) 때문에 사랑했다고 주장(insist)하는 것이 추억이다.(참고 : <에일리언> 관객으로서의 라캉)

안다고 가정된 주체의 현상은 이차적인 현상이라는 것, 그것은 상징적 질서의 구성적 특질인 믿는다고 가정된 주체를 배경으로 해서만 출현한다고 한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전가한다. 즉 “나는 믿지 않지만, 우리의 조상(믿는다고 가정된 주체)은 믿었다”고 전가한다. 아이들이 믿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을 위하여 산타클로스 행새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믿는 척한다. “나는 실제로 믿지 않는다. 그것은 내 문화의 일부일 뿐이다”라는 태도는 우리 시대의 특징으로, 전치된 믿음의 전형적인 형태일 것이다. ‘문화’란 실제로 믿지 않고 진정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행하는 모든 것들에 붙인 이름이다. 이것이 우리가 근본주의자들을 ‘야만인’, ‘반문화인’, 문화의 파괴자라며 비난하는 이유다. 그들은 정말 자신들의 믿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을 보면 정말 야만적이지 아니한가?

파스칼은 비신자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무릎을 끓고 기도를 하시오. 믿는 듯이 행동하면 믿음이 저절로 올 것이오”

오래 전 나는 믿음을 갖고자 했을 때, 믿는 척하지 못했다. 믿음은 진실하며, ‘하는 척’하는 것은 거짓이기에, 진실과 거짓이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나는 기독교적 의례들을 거부했다.

하지만 믿음이 진실일까? 그러한 속단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차치하고, 정작 나는 믿음보다 진실이 더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파스칼의 이야기를 읽고 쓴 메모

결국 나는 믿음없는 자로 계속 남아있다.

진실은 허구의 구조를 지닌다…

블로그를 하면서 나는 현실의 나와 다른 가상의 인간을 꾸며나간다. 어쩌면 현실 생활에서의 자기가 자신의 추악한 내면을 은폐하는 가면이고, 역설적이게도 사이버공간에서 나는 진짜 자신을 표출하게 해주는 허구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이 허구가 쏟아내는 진실이다. 

하지만 상징적 가면은 그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의 직접적 현실보다 중요하다. 이런 작동방식은 프로이트가 물신주의적 부인이라고 부르는 구조를 함축한다.

倒錯症(paraphilia)의 두가지 문법 중

1… 물신주의적 否認의 문법

< 대타자가 알지 못하도록 부인하는 것, 실재 너머의 상징적 세계를 위해 날 것의 실재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최소한의 이상화에 참여하는 것 >

오이디푸스期의 주체가 상징적 아버지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에 따른 거세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가 팔루스의 대체물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머니가 거세되었다는 것(즉 어머니 또한 결여를 지닌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否認하는 주체다.

즉 알고 있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식의 행동을 한다.

  • 역겨운 냄새가 나지만, (이웃과 함께 살기 위하여) 냄새가 나지 않는 척 한다.
  • 판사가 무식한 늙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법의 권위를 위하여)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거짓이 진실의 자리를 대신하지만, 이러한 상징적 허구는 실효성을 갖는다. 이러한 거짓 덕에 냄새나는 이웃과 싸우지 않고 함께 지낼 수 있으며, 무식한 법은 가까스로 권위를 지킨다. 바로 이것이 진실이다.

…두번째 문법은 7장에서 참고하십시오

이와 같은 상징적 허구가 이웃과 마을을 형성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현실을 구성한다면, 상징적 거세라는 것은 나를 구성한다.

히스테리란…

라캉이 “상징적 거세”라고 부른 것이 바로 즉각적인 심리적 정체성과 상징적 정체성(대타자 안에서 혹은 대타자에 대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내가 쓰고 있는 상징적 가면이나 타이틀) 사이의 간극이다. 그리고 남근은 이 상징적 거세의 기표다. 만약 상징적 거세라는 간극을 메우기 위하여 대두된 것이 남근(팔루스)이라면, 그것은 생식기관일 수는 없다. 남근은 기표이다. 그것은 상징물들로, 왕이 되기 위하여는 왕관과 왕좌로, 임원이라면 중역실과 명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외부의 부착물들이 바로 상징적 거세에 따른 잉여물이자, 남근이다. 거세는 내가 상징적 질서에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과 상징적 가면이나 타이틀을 받아들이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거세는 직접적인 존재로의 나와 나에게 어떤 지위나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 타이틀 사이의 간극이다. 즉 나는 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아들이어야 하고, 아들과 딸의 아버지이며, 아내의 남편이자, 직장에서는 부장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마땅한 인격과 권위의 탈을 쓰고 억지로 연극을 해야 한다. 이것이 거세의 고통이다.

이러한 간극 때문에 주체는 결코 완전하게 자신의 상징적 가면이나 타이틀과 직접 동일화될 수 없다. 그의 상징적 타이틀에 대한 주체의 질문은 히스테리의 고유한 질문과 같다. 즉 주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와 자식으로서의 나, 아버지로서의 나, 남편으로서의 나, 직장인으로서의 나 사이에, 어디가 나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의 호명에 대하여 “왜 나는 네가 나라고 말하는 그 존재인가?”라고 물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히스테리는 주체가 자신의 상징적 동일성에 의문을 갖거나 그것을 불편하게 느낄 때 발생한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 부터 나를 보호하라”(Jenny Holzer)의 독법

  • 남성쇼비니스트 : 여성은 혼자 내버려두면 자기 파괴적인 광분(히스테리)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반드시 자애로운 남성 지배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내 속에 있는 과도한 자기 파괴적 욕망(히스테리)으로 부터 나를 보호하라”고 한다.
  • 이의 진상 :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욕망은 극단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들이 기대할 것을 욕망하며, 남자들에 의해 욕망받기를 욕망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대안 : 내가 내 속에 있는 진정한 열망을 표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 내가 원하는 것은 이미 내가 원할 것을 알려주는 가부장적인 질서에 의해 부과된 것이다. (히스테리로 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기본조건은 욕망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자율적으로 욕망을 표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즉, 히스테리란 “왜 나는 (내가 아니고) 네가 나여야 한다고 말하는 그 존재여야 하는가?”하는 자기 실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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