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How to read 라캉 – 0장

시작하면서…

한권의 책을 한달 내내 읽었다. 전에 이미 두세번인가 읽은 책이다. 번역이 난삽한 탓이라고 해야 만 위로가 될 정도로 나의 지적 수준은 책의 내용에 미치지 못했다. 책이 다루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추잡함(외설성)과 인간 주체성이 시작되는 텅빈 곳에서 울려나오는 비명을 감안한다면, 지적 수준이나 이해력이 부족하여 내용을 씹어서 소화하고 지적인 자양분으로 전환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하기엔 역부족인 책을 다시 펼쳤다. 한달동안 4~5번인가 읽었다. 읽을 때마다 줄을 쳤으며,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여백에 연필로 적었다. 다음에 읽을 때면 전에 적었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깨닫게 된 것을 적었다. 물론 다음에 지울 것이 틀림없기에 연필로 쓸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나의 독해력에 자신이 없었다. 그 사이에 책에는 손때가 새까맣게 묻었다.

읽는 것에 물렸지만, 반복강박에 사로잡힌듯 읽었다. 그리고 읽기를 잠정중단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한달동안 읽은 책이란 ‘HOW TO READ 라캉’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2005년에 썼다.

이 책을 읽으면서 숀 호머의 ‘라캉읽기’와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읽으며 적어놓았던 노트를 참고했지만, 이해하기(지식을) 위한 편집적 집착의 끝에 정신이 분열(편집적 분열증)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부끄럽지만 ‘프로이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라캉’의 책이 몇권 사긴 했지만 분명 읽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갖고 있는 라캉의 책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형광펜 등으로 줄이 그어져 있고, 연필로 뭔가 그적거린 흔적이 있다. 분명 읽었다는 증거이지만, 전혀 이해를 못했던 탓에, 아무 것도 읽지 않은 것과 같았기에,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불구하고 프로이트와 라캉을 월반하고 나는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을 읽고 있다. 여기에서 ‘HOW TO READ’에는 두가지의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술적인 방법론’ 즉 (라캉을 쉽게) 읽는(이해하는) 기술과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하나는 ‘어떤 관점(view point)을 가지고 읽을 것인가’일 수도 있다.

라캉을 이해하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는데, 동유럽의 기적이자 라캉 정신분석학의 전도사로 불려지는 슬라보예 지젝은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을 통해 라캉을 설명하는 대신 ‘HOW TO READ 라캉’은 라캉을 이용하여 우리의 사회적, 리비도적 곤경을 설명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중립적인 판정을 내리는 대신 당파적인 독해에 참여할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분명 어떤 관점에서 읽을 것인가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러니까 기초문제도 풀지 못하는 나에게 심화과정으로 넘어간다고 하는 한편, 맘대로(당파적으로) 풀테니까 지적 수준이 안되어 따라오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일단 자크 라캉이라는 문제 인물에 대한 레이먼드 탤리스의 글을 보자,

제도의 탈을 쓰고 ‘이론’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사기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할 미래의 역사가들은 당연히 자크 라캉이라는 프랑스 정신분석가의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의 이론(痢論 theorrhoea 1theory(이론)과 diarrhoea(설사)가 합성된 신조어로 痢(설사 리)자를 사용하여 痢論(똥같은 논리)으로 표기 )을 적용하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들과 한계, 지워지지 않는 영역에 관한 증거없는 주장들을 뒤섞어 그들 나름의 인문학 판으로 짜 놓은 그물 한 가운데 있는 가장 살찐 거미 중 한 마리이다. 현대 이론의 중심에 있는 독단론 대부분이 그로 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다.

– 엘리자베스 루디네스코의 ‘라캉의 전기’에 대해
레이먼드 탤리스가 타임지 고등교육 부록에 게재한 서평 중 –

거의 악담이지만 레이먼트의 글에는 분명 진실이 있다. (프로이트와 함께) 라캉의 이론이 갖고 있는 외설성이야 말로 痢論(개똥같은 논리)의 배경이며, 라캉이 만든 ⌈실재계·상상계·상징계⌋는 공간적 좌표가 없는 가상계이기 때문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영역’이다. 이들 영역은 실재한다는 증거가 없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타자·거세·향락·환상·무의식 등의 낱말들을 재료로 가설(假設)되었을 뿐이다. 이 낱말들은 다시 이 허황한 세계(실재계·상상계·상징계) 위를 떠다니며, 우리의 내면과 이 시대의 증상들이 얼마나 착잡한가를 알려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직면하는 번뇌의 실상이다.

假作眞時眞亦假   헛것이 참된 것을 만드는 때(시간)는 참된 것 역시 헛것이요
無爲有處有還無   없음이 있는 것이 되는 곳(공간)에서는 있음 또한 없음이라.

– 홍루몽 속의 누각 태허환경(太虛幻境 : 아무 것도 없는 꿈 속)의 주련 –

레이먼드의 라캉에 대한 비난은 정확히 태허환경의 주련과 일치한다. 즉, “너희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라캉의 이론은 거짓이다.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가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가상에 기반을 둔 서구 문명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인가? 라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캉이 구축한 가상의 세계(Virtual World)로 들어가야 한다. 라캉의 용어 대부분은 우리의 내면의 영역과 현상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내면을 설명하기 위하여 조작(발명)해 낸 세계이자 그 세계를 건설할 도구인 것이다. 그 세계는 미지이면서도 건설 중이며, 우리는 도구에 미숙할 뿐이다.

라캉이 구축한 가상의 세계가 개인의 내면과 현실 세계를 해석(이해)하는데 유효하다는 점에서, 특히 포스트 모던한 이 시대의 곤경을 해석하는 데 라캉만큼 유용한 도구가 없다는 점 때문에, 슬라보예 지젝같은 작자들이 라캉이 구축한 이런 것들을 이용하여 독단적인 인문학의 한 마당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세계를 설명하는데 유효하다고 과연 라캉과 지젝의 이론이 맞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될까. 라캉의 이론은 거짓되고 텅빈 것이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상과 우리의 내면 또한 (서구의 합리주의에 기반하지 않고) 텅빈 곳에서 울려나오는 거짓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진리나 진실이라면 이해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것은 거짓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의 구조를 밝히고, 텅빈 것을 둘러싸고 있는 외양(베일)을 갈파해 내는 것이 아닐까? 지젝은 라캉을 이용하여 그 작업을 하고 있다. 거짓과 허구 속에 감추어진 좌표를 더듬어 진실의 성전에 당도하고, 세상의 껍질을 벗겨 그 안이 텅비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이 책은 불가피하게 어렵다.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기보다, 책을 읽기 위해 지식을 쌓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사색을 위한 독서보다, 독서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사색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역설과 반전을 경험하게 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래서 이해를 넘어서 오해에 이르게 되고, 앞으로 가기 위하여 걸어온 길로 되돌아가야 했다. 본문이 불과 169쪽(16~184쪽)에 불과하지만,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을 읽는 것처럼 펼치는 쪽 마다 전혀 새로운 이해로 점철되는 이 책은 정신분석학에 해당되는 것인지, 예술비평, 문학, 정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으면서도 아닌 것 같다.

책을 읽으며 필요한 지식을 모으고 사색을 하며, 여백과 메모지에 썼던 생각들을 챕터별로 기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나만의 오독에 근거한다는 것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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