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떠난 후

위의 그림은 영화 ‘경주’1개봉 : 2014년, 감독 : 장률, 출연 : 박해일, 신민아에 나온 만화다. 박해일이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신민아의 집에 걸려 있었다.

이 만화는 1924년 중국에서 발간한 ‘우리들의 7월(我們的七月)’ 2이 잡지는 ‘우리들의 X월’식으로 발간했다 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풍자개(豐潤 : 號 子愷, 1898~1975)가 그렸고, 만화에 나오는 ‘人散後, 一鉤新月天如水’라는 글귀는 송나라 때 시인 사일(謝逸 : 1068~1112)이 당시에 유행했던 천추세(千秋歲 : 아주 오랜 세월)라는 곡에 붙인 가사(宋詞)인 여름풍경(夏景)의 마지막 구절이다.

나는 시(詩)보다 사(詞)를 좋아한다. 송나라 강기(姜夔)는 그의 백석도인시설(白石道人詩說)에서 대체로 보아 詩는 기상, 체면, 혈맥, 운도를 갖추고 있다. 기상은 온화하며 정이 두텁기를 바라는 바, 자칫하면 저속해 진다. 체면은 넓고 큰 것을 지향하지만, 자칫하면 황당한 것이 된다. 혈맥은 시의 안으로 관통하기를 기대하나, 자칫하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운도란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태평한 것을 추구하지만 자칫하면 경박해진다 3大凡詩, 自有氣象, 體面, 血脈, 韻度. 氣象欲其渾厚, 其失也俗 ; 體面欲其宏大, 其失也狂 ; 血脈欲其貫穿, 其失也露 ; 韻度欲其飄逸, 其失也輕. 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시(관저)는 “즐겁다고 막가면 안되고, 애가 끊어지게 슬퍼서는 안된다”(樂而不淫 哀而不傷 : 논어 팔일편)는 원칙에 입각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시로는 사람의 정감은 끝까지 밀어부칠 수가 없다. 송사(宋詞)는 곡(曲)의 새끼(子)인 가사(歌詞), 즉 곡자사이다. 강기가 詞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시란 법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 반면, 사람의 정한을 풀어놓은 것이 노래(歌)이며… 사람의 뜻을 간절하게 다하는 것이 가락(曲)이라고 한다. 4守法度曰詩, 載始末曰引, 體如行書曰行, 放情曰歌, 兼之曰歌行. 悲如蛩螿曰吟, 通乎俚俗曰謠, 委曲盡情曰曲.  그래서 나는 격식을 차리는 한시보다 마음을 더듬는 송사를 좋아한다. 송나라의 시인 사일은 ‘아주 오랜 세월’이라는 간절한 가락에 여인의 한숨같은 정한을 녹여 ‘여름풍경’이라는 가사를 붙인다.

그의 노랫말은 이렇다.

        千秋歲

夏景

楝花飄砌  蔌蔌清香細
梅雨過  蘋風起
情隨湘水遠  夢繞吳山翠
琴書倦  鷓鴣喚起南窗睡
密意無人寄  幽恨憑誰洗
修竹畔  疏簾裏
歌餘塵拂扇  舞罷風掀袂
人散後  一鉤新月天如水

이 ‘아주 오랜 세월'(千秋歲)이라는 곡에 붙인 가사 ‘여름풍경'(夏景)은 찾아보아도 번역된 것이 없다. 그래서 내 멋대로 풀어본다.

멀구슬나무꽃 섬돌 위로 떨어지고, 푸성귀들의 풋내음이 싱그럽습니다
장마가 지나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네요
마음은 상수를 거슬러 올라가고, 꿈은 오나라 산의 푸르름을 둘렀으니
음악도 책도 지겹고, 남쪽 창 가에서 졸다가 자고새 울어 문득 깨어납니다
은밀한 마음 맡길 이 없고, 깊은 한은 누구와 함께 떨어낼까요
대나무 밭을 가꾸고, 방 안을 치웁니다
노래는 남아 부채로 띠끌을 날리고, 춤이 끝나니 바람이 소매를 흔들어 대는군요
사람들 떠난 후, 고리같은 초생달 하늘이 꼭 맑은 물 같아요

영화에서 박해일은 풍자개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 흩어진 후 초생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고 해석한다. 사일의 마지막 구절만으로는 여름날의 풍경을 상상할 수 없으나, 텅빈 탁자, 발이 올려진 들 창 밖 하늘에 기운 달이 보이는 풍자개의 그림에서는 모였던 사람들이 돌아간 미지근한 저녁 여름의 선선한 바람을 떠올릴 수 있다.

초생달5만화 속의 달은 초생달(新月)이 아니라, 그믐달(朔月)이다. 그믐달은 해가 뜨기 전 동녘에 보이다가 해가 뜨면 사라진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 시간에는 보이지 않는다.은 해가 지고 난 후 잠시 하늘에 보였다가 은하수를 건너 서쪽 하늘로 사라진다. 초생달이 한조각 배 같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니 하늘이 맑은 것과 관계는 없고 초생달이 하늘을 물 삼아 조각배처럼 떠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사람들 흩어진 후 바라보니 한조각 초생달, 하늘이 꼭 물 같구나”라고 읽힌다.

이 노래가사에는 여름날에 한 여인의 고요한 일상 속에 깃든 외로움과 그리움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여름풍경도 압권은 역시,



사람들
떠난

4 thoughts on “사람들 떠난 후

  1. 최근 들은 이야기중에 너무나 좋아서 곱씹고 곱씹으며 눈물이 찡했던 말이 있어요.
    사랑이란,
    온 존재에 사방으로 열려있는 상태를 이름이다.
    사방으로 다 열려있는 상태..
    사랑이란 온 존재에 사방으로 다 열려있는 상태..

    (사랑방을 떠올려보며)
    여인님 블로그/홈페이지가 네이버나 다음처럼 접근성이 좀더 쉬웠으면 좋겠다 오늘도 혼자 보기 아까워 아쉬워만하고 갑니다~
    허걱 앞장 글에 댓글 submit 누르는데 계속 커넥션이 안된다고하여 여러번 시도했더니 본의아니게 댓글 테러를…

    1. 정말 오랫만입니다. 오늘 낮에 자전거를 타고 낡고 누추함이 저지대를 따라 스며든 골목과 골목들을 누볐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사는 것에 대한 헛헛한 그리움이 있었는 지 모릅니다. 첩첩한 연립주택들과 도로변의 무너지는 슬레이트 지붕 그리고 자전거 바퀴 높이의 반지하 창틀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그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햇빛을 바라지만, 이 도시에 서식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늘에 그늘을 포개가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늘에도 불구하고 벗꽃은 피고 있었지요.

      엔도 슈사쿠의 < 사해 부근에서>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
      당신은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한번 그 인생을 스쳐가면 그 사람은 나를 잊지 못하게 됩니다.
      왜지?
      내가 그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그때 창 밖에서는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는 군중의 고함소리가 합창처럼 들려왔다.
      =====================

      (열려있는) 그런 사랑과 (예수의 끝없는) 이런 사랑에 대하여,
      나의 사랑이란…
      사람들 떠난 후
      한숨처럼 남는 그리움이나 아닐까 싶습니다.

      앞장의 댓글은 하나 만 남기고 청소를 했습니다.

  2. 여인님의 글을 읽다 울컥했습니다.
    두해 전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국문과을 나오셨지만 전공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오신 아버지가 몇해전 부터 한시를 짓고는 하셨거든요.
    그리운 아버지… 꿍에도 안오시네요.

    비가 며칠 계속되고 바람이 매서웠는데 오늘은 정말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간만에 공원에 나가 점심을 먹었어요. 익숙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나는 과연 행복한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 얼마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까지는 정신이 없네요.

    여인님의 글은 편안합니다.

    건강하시죠?

    1. 그 사이에 큰 변화를 많이 겪으셨네요. 이제 생활이 자리잡고 안정되셨기를 바랍니다. 여기도 어제는 비로 하루종일 궂더니, 아침에는 해가 납니다, 그래서 공기가 맑아진 듯도 합니다.

      슬픔이 그만 사라지고 그리움 만 남을 즈음 아버님께서 웃으시며 한번 찾아주실 테지요.

      이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게 된 여벌의 시간을 제가 살고 있는 것이라서 편안하게 느껴지실 뿐이겠지만, 살며 느끼는 것이 일체개고라서 간신히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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