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의 시선

To Vlemma tou Odyssea

Theodoros Angelopoulos

연극과 같은 영화인 ‘율리시스의 시선, 1995’ 중 마지막 독백은 이러하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다른 이의 옷을 입고
다른 이의 이름을 씀으로
내가 오는 걸 누구도 모르리
당신은 나를 보고 안 믿겠지만
징표를 보여주겠오
그러면 나를 믿을거요
당신 정원에 있는 레몬나무와
달빛 비치는 창문을 말해주겠오
육체의 증거와
사랑의 증거도
서로 포옹을 한 채
몸을 떨며 옛방으로 갈 때
사랑을 속삭이며
여행이야기를 들려주겠오
밤이 새도록
며칠 밤이 걸리더라도
서로 포옹을 한 채로
사랑의 속삭임 속에서
한 인간의 모험과
끝없는 얘기를 해 주겠오

오디세우스(로마명 율리시스)는 트로이로 간 지 20년 만에 아내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아내 페넬로페와 결혼을 하고 왕이 되려하는 구혼자들 때문에, 아내조차 모르게 변장한 채 이타카로 귀환한다. 구혼자들을 처단하고 페넬로페와 만나지만, 아내는 오디세우스가 그녀의 남편임을 아직도 의심한다. 그래서 페넬로페는 “우리 침대를 원래 있던 곳으로 옮겨놓으라”고 주문한다. 오디세우스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침대는 방에서 자라나고 있던 나무를 베어 만든 것으로, 뿌리가 땅에 박혀 있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은 재회한다.

1994년 늦은 가을의 여행은, 단벌의 옷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살아갈 수 없는 발칸의 현실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35년만에 돌아온 나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핀도스 산맥을 넘었던 탓에 옷은 술과 땀, 그리고 먼지에 절었다. 역과 이정마다 추억들로 질척거렸고, 여인과 관계를 갖거나 사람과 우의를 맺었던 탓에,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발칸의 현실은 세기와 세기에 걸쳐 종교와 민족이 서로를 저주하고, 세계대전이 휩쓸고 지나면서 왕조와 체제가 엇갈린 탓에 사람들은 망명과 피난을 선택하거나, 머물지 못하고 그 곳을 떠돌고 있었다. 저격병은 조준경 위로 나타난 값싼 목숨의 뒷덜미를 향하여 탕! 방아쇠를 당기곤 하는 그 땅, 조물주가 만든 큰 혼돈 속을 뚫고, 마나키스 형제가 남긴 현상조차 되지 않은 세 권의 필름을 찾아나설 수 밖에 없었다. 가는 길마다, 마나키스 형제가 겪었던 개인사와 나의 젊은 추억이 착잡하게 얽히고, 내전과 포격으로 그 곳의 현실은 뼈마디를 꺾는 것처럼 아팠다. 대지는 황폐했고, 문명은 무너져 내렸고, 잎이 진 늦가을 풍경은 잿빛이었다. 적의 눈길과 총질이 두려운 사람들은 햇빛보다 안개를 기다리며, 폐허의 그늘 밑에서 죽어가야 할 자신의 삶의 어느 하루를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마나키스 형제의 미현상 필름을 찾기 위하여, 그리스의 플로리나에서 택시를 타고 출발한 나는, 알바니아의 고리치아, 마케도니아의 모나스티르에서 열차를 타고 스코페를 지나 불가리아의 소피아, 노비 이스카르, 체르벤 디아크, 니코폴을 지난 후, 다뉴브 다리를 건넌다. 루마니아의 터뉴 마그렐리와 로시오리 드 베디를 지나 부쿠레슈티에서 환승을 한 후 흑해의 콘스탄차에 당도한다. 하지만 야나키스가 유배되었던 필리포폴리스는 가지 못했다. 당연히 에게해로 흐른다는 에브로스강 또한 보지 못한다. 매달리던 여자를 콘스탄차에 버려두고 레닌의 거대하지만 조잡한 이데올로기로 급조된 전신상이 실린 바지선에 올랐을 때만 해도, 나는 여행이 아픈 것임을 알지 못했다. 콘스탄차에서 출항한 바지선은 바다 곁으로 난 수로를 따라 다뉴브강으로 올라갔다. 다뉴브강에서 강의 흐름을 잊었다. 다뉴브는 게르마니아(독일)에서 동쪽으로 흑해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시속 5노트인 바지선의 속도로 거꾸로 서쪽에 있는 게르마니아로 흐르는 것 같았다. 게르마니아로 거꾸로 흐르는 강의 이름이 도나우일지도 모른다. 강의 길이는 2,860km, 해발 3~4천m에서 강물이 발원한다고 해도 강의 경사도는 제로에 수렴하는 0.1도이다. 어디에선가 물이 차오르고 어디론가 물이 빠지는 것일 뿐, 결코 흐르는 것이 아니다. 승선한 지 3~4일이 지날 무렵, 트란실바니아 알프스와 발칸산맥 사이의 협곡, 아이언 게이트(鐵門)에 당도했다. 밤이었고, 거기서 부터 세르비아였다. 3국 국경수비대의 경비선이 바지선 위로 써치 라이트를 비추며, 어디로 가며, 누가 탔느냐고 물었다. 게르마니아로 가며, 아무도 없다고 했다. 날이 밝았다. 나는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베오그라드는 음울했지만, 별 일 없어보였다. 하지만 보스니아 전선에 일이 있는지 특파원들이 죽치는 도시의 술집은 소란스러웠다. 영화보관소 소장을 소개시켜 준 친구 니코는 사라예보로 간다는 나에게 허가증이 없으니 사바 강과 지류를 타고 가라고 했다. 사바 강을 거쳐 드리나 강을 거슬러 올라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1992년부터 시작된 사라예보 포위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건물들은 포격에 무너졌고, 폐허의 그림자 속에서만 사람들은 간신히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저격수가 도시의 이곳 저곳에서 도로 쪽으로 총구를 내놓고, 조준경 위에 시민이 보이면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Pazite, Snajper!’(스나이퍼 조심)이라는 푯말들이 시내 곳곳에 보였다. 마침내 나는 필름을 보관하고 있는 이볼 레비를 만났다. 그에게 “필름을 가둬둘 권리가 없다”고 소리치며, 여행에 지친 나는 포격당한 건물처럼 무너졌다. 식은 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90년 가까이 현상이 불가했던 필름은 마침내 현상되어, 금세기 초부터 갇혀있던 ‘시선’이 해방되었다. 그리고 그 날(1994년 12월 3일), 시내에는 안개가 끼었다. 안개 탓에 저격병도 어쩔 수 없는 이 날, 사라예보 시내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시민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춤추거나, 연극무대가 열렸다. 나는 이볼 레비의 가족들과 강 가로 산책을 갔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안’ 병력인지, ‘발칸의 도살자 밀로세비치’의 부하들인지 모를 병력이 강 가의 안개 밑에 움크리고 있었다. 나를 남겨두고 안개 속으로 걸어들어간 이볼 레비의 가족들은 “조물주가 만든 혼돈” 탓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에게 학살당하고 만다.

나는 피로와 눈물과 배신을 뒤로 하고 세 권의 필름을 학살의 땅에서 구출해 나온다. ‘아비델라 마을의 베짜는 사람들, 1905’이 그것이다.

참고> 율리시스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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