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운전사

1980년 05월, 광주란 나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그 해 오월, 합정시장 건물 위에서 당산동도 아닌 영등포에서 터져 나와 한강을 건너온 함성을 들은 적이 있다. 드높았던 그 함성은 그만 5월15일 서울역 회군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서울역 회군에 대한 과오를 놓고 젊은 학생들의 지리한 논의는 그 해 겨울부터 시작된다. 서울역에서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광주 사태도, 군부의 재집권도 없었을 것이라는… 그래서 서울의 봄은 민주화라는 꽃으로 만개했으리라는 회오는 학생운동의 전략에서 비롯하여 우리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고 내재된 모순이 무엇이며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전략방안과 연대할 민중이란 어떤 세력인가를 도출해내기 위한 사회구성체 논쟁이 시작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는다. 나는 11월 3일 박정희의 장례일에 입대했다. 그 해 가을은 스산했다. 11월인데도 얼음이 얼었다. 12월12일에는 군사변란이 벌어졌다. 가파른 시절에도 자대 배치가 되었고 세모가 지났다. 1980년 새해가 되자 미국에서 교수를 하던 사촌형님이 안식년을 맞이하여 동경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형님은 혹시 정도영(전두환의 이름을 잘못들었을 것이다)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는 우리에게 그 사람에 다음 대통령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서울의 봄,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불온한 조짐을 읽었다. 시내로 몰려나간 그들은 그만 서울역에서 회군을 한다. 전두환은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국보위 설치 등의 조치를 내리고, 영장없이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2699명을 구금한다.

이러한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5월 18일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 폭행으로 진압한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5월 20일 오전에 택시를 타고 광주로 진입한다. 23일까지 한국에 잠입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을 취재하여 광주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는다.

한츠 페터가 참상의 현장을 담고 있던 그 시각, 나는 KBS, MBC, 그리고 조 중 동에서 보도했던 대로 불온세력이 국가전복을 획책키 위하여 광주의 금남로에서 군경과 대치하고, 경찰서의 무기고를 털어 광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총질을 해대는 것이라고…,

우리 군인들이 노리쇠를 후퇴전진한 뒤, 자국의 민간인을 향하여 조준 사격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무조건 믿었다. 그때만 하여도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 이 세상이란 것을 나는 용납하지 못했다. 복학 후에도 심지어는 취직 후에도 우리 군대에 의하여 광주의 시민들이 대검에 찔리고 총알을 몸으로 받으며 죽어갔다는 오욕의 참상을 믿지 않았다.

1988년 광주청문회가 열리고 광주학살의 참상을 알리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시작했다. 제목이 ‘어머니의 노란손수건’이었나? 나는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자행되었던 흑백의 기록들을 보면서, 더 이상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광주청문회에서 회자되었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에서 실체가 무엇인가를 줄 곳 생각했다. 국가란 결코 실체가 아니며 허상이라는 것을 나는 간신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애국이라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오직 사람과 오직 밥그릇이야말로 실체이며 다른 것은 헛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광주민주항쟁 관련 영화로는 ‘꽃잎’, ‘화려한 휴가’, ’26년’ 그리고 이 ‘택시운전사’가 있다. ‘꽃잎’은 보지 못했다. ‘화려한 휴가’는 코미디와 신파의 짬뽕이어서 광주항쟁의 현장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복수극 ’26년’은 전두환에 대한 미움에 짜증을 잔뜩 풀어놓아 스트레스 지수만 상승했을 뿐이다. 이 ‘택시운전사’는 약간 신파적이긴 하지만, 1980년 5월 광주의 긴박감과 처절함을 어느 정도 맛보게 해주었다.

광주민주항쟁의 사태의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당시를 말해줄 영화 한편 없었다는 점이 답답했는데, ‘택시운전사’가 내 갈증의 일부를 해소해준 것 같다.

참고>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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