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무리

……떠 다닐 수 있는 것에 대한 허전한 묵상

여기는 아스팔트 위, 8월이 지글거리며 익는다. 길 위에서 나는 일한다. 일이라기 보다, 어쩌면, 생이라는 것에 쓸데없이 끌려다니다,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왔고, 품을 팔게 되었다. 일당을 정산한 후, 까맣게 내린 밤을 따라 집으로 가는 여벌의 시간은 헐겁다. 나의 노동 1어떤 자들은 근로라고 했지만, 부지런히 일한다는 뜻의 근로보다, 힘겹게 몸을 움직여 밥을 빌어먹는다는 뜻에서 노동이라는 낱말이 서글픈만큼 좋다 이란 이렇게 하찮은 것이다. 8월동안 하루에 300ml의 보온병에 냉수를 대여섯번 씩 채웠다. 몇 모금의 갈증으로 보온병의 찬물은 바닥이 난다. 새로 채운 물은 8월의 태양과 열기에 달궈진 육신의 빈 속으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나는 허기와 같이 갈증이 시작되는 그 허황한 빈 곳을 알지 못한다. 그 허황한 빈 곳에 채워진 물이 넘치는지 몸의 거죽으로 배어나와 땀이 되었다. 기진할 정도로 땀을 흘린 이번 8월에는, 소변이 마려워 다급히 고이춤을 풀어도 나오는 오줌은 마른 한숨 같았다.

오후 4시가 되면 속옷과 겉옷 그리고 땀에 절은 몸은 34°C 22016.08.21일 14:32분 36.5°C의 온도를 기록했고 내가 서 있는 아스팔트 위는 복사열 탓에 40°C를 상회할 수도 있다 의 여름에 굴복하고 만다. 아침부터 정오를 지나 최고온도에 다다르는 오후 4시까지, 버텨나가기 위하여 이를 악물었나보다. 오후가 되면 입 안이 얼얼했다. 더위의 무한함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나날들의 16시, 아스팔트의 화끈거리는 복사열 위로 나무와 건물의 흐릿한 그림자가 흘러들기 시작한다.

그때가 되면 참새들도 지쳐 입을 벌리고 핵핵거린다. 입맛을 잃었는지 모이를 주어도 몇알 만 쪼아먹은 뒤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간다. 덥다. 한모금의 물을 먹고 땀을 닦아내며 한줄기의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7월과 8월의 뜨거운 길 위에서 바람과 그 무리(等屬)를 보아왔다.

바람

해류가 바다 속의 길(道)이나 골, 온도 그리고 염분의 밀도에 따라 흐르듯, 바람도 공기 속 길을 따라 흐른다. 길 건너편에는 동서로 난 길(골)을 따라 바람이 무시로 불었고 나무들은 가지를 벌리고 바람을 맞이했다. 나무들은 팝 컨서트에 온 젊은이들이 손을 들어 박수치는 모양으로 가지를 흔들었다. 길 건너 나무들은 8월의 바람에 열광하는 듯 했다. 정작 내 주변의 나무들은 숨 죽인 채 8월의 염천을 노려보고 있다.

계절이 바뀌려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야 한다. 금년 8월에는 비가 오지 않았고, 바람의 방향에도 두서가 없었다. 때론 북서, 때론 동남, 때론 동, 서를 가리지 않았다. 바람은 잔잔했고 부는 시간도 짧았다. 바람이 멈추면 숨이 턱턱 막혔다.

나무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는 서 있는 까닭에, 역설적으로 바람의 무리다. 나무가 없고, 풀이 없다면 바람의 영혼이 대지 위를 스쳐지나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바람과 나무의 관계’나 ‘바람부는 오후에 대한 에세이’를 미루나무만큼 그윽하게 쓸 수 있는 생명체란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는 바람을 우아하게 맞이하고 표현할 줄 안다.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는 주책없다.

나비

나비는 바람의 무리가 아니라, 공간 또는 시간의 무리다. 나비의 나는 모습을 보면, 나비의 궤적은 점선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나비는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면서 이동하는 특이한 생명체다. 그래서 날개로 공기를 밀어내며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접으면 여기에서 사라졌다가 날개를 펴면 저기에서 나타나는 식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존재이다. 미친 듯한 봄바람 속에서도 그토록 유유히 날아다닐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작은 것이란 하찮고 불쌍하다. 참새의 다리는 가늘다 못해 투명하고, 심장의 크기는 콩알보다 작을 것이다. 참새들을 보면서 죽어서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접기로 했다. 참새가 날아갈 수 있는 최대거리는 백미터 쯤이나 될까? 참새가 바람을 품고 활공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선회를 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벌레처럼 날개를 퍼덕여서 직선으로 몇십미터를 날아가 폴싹 앉는 것이 고작이다. 멀리 날 수가 없는 탓에 텃새인 것이다. 아마 반경 1Km 정도의 공간에서 3~5년 정도를 살다가 죽고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놈들은 먼지처럼 난다. 바람의 무리라기에는 오히려 땅의 무리, 먼지처럼 보인다. 모이를 먹으러 떼지어 오는 녀석들의 모습은 바람결에 날려온 먼지다. 또 쌀알을 쪼아먹은 녀석들은 갈색 날개를 파다닥, 건너편 화단으로 먼지처럼 사라진다.

비둘기를 이제는 ‘하늘의 쥐’라고 한다. 먹성에 개체수가 많아진 탓이다. 지켜본 바로는 비둘기는 평화롭다. 배고픈 놈들은 우리가 참새에게 주는 모이를 탐하기는 해도, 참새들에게 해코지를 하는 일은 없다. 참새들도 비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비둘기와 머리를 마주하고 함께 모이를 열심히 쪼아 먹을 뿐이다.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는 모습이나, 둥그렇게 활공을 하며 내려앉는 모습은 우아하다. 그 모습을 보면 공기가 지닌 질량의 우아함이 어떤 것인지 추리할 수 있다. 모이를 먹지 못하도록 쫓아도 비둘기는 성내거나 마음에 새겨두는 일이 없다. 참새들은 우리가 준 모이를 열심히 받아먹으면서도 우리와 늘 거리를 둔다. 비둘기는 모이를 준다면 내 손바닥에라도 뛰어들 것 같다.

하지만 바람의 무리라고 하기에는 비둘기들은 너무 살쪄있다.

이 동네에는 까마귀와 제비 등 다른 새는 드물다. 누군가 그러는데 주변에 매가 산다고 한다. 매 뿐 만 아니라 수시로 헬리콥터가 내 머리 위를 스쳐지났다. 헬리콥터도 바람의 무리가 아닌 것 같다. 중력의 무게를 프로펠러로 어거지로 거스르며 기어이 기어이 날아가는 그런 땅의 무리같다.

매미

매미는 뜨거운 햇볕을 향해 우는 태양의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자 매미가 울었다. 어렸을 적에, 잠자리나 매미 심지어는 파리의 날개라도 떼어낸다면, 바람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바람이 눈물을 흘리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나무가지에 깃들어 바람에 자지러지게 울고 굼벵이로 천적(거미, 사마귀, 말벌 등)을 피해 소수의 해(3년, 5년, 7년, 11년, 13년, 17년 등) 동안 땅 밑 어둠 속에서 살다가, 햇빛 좋은 어느 여름날, 나무를 타고 기어올라 태양를 향해 한달동안 자지러지게 울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이 서글픈 곤충 또한 바람의 무리라고 해주자.

폭염의 열기가 꺽인 어느 날이었다. 근무가 끝나갈 무렵인 오후 7시 40분, 해가 졌다. ‘배미향의 저녁스케치’를 듣다가 문득 주변을 에워 싼 어둠의 기척을 느꼈다. 라디오의 소리를 낮췄다. 대신 밤벌레 소리가 들렸다. 가을일지도 몰랐다. 벌레들은 밤공기를 깨물어먹거나 어둠을 갉아먹는 소리를 냈다. 매미가 바람의 무리라면 어둠을 갉아먹는 이 벌레들이야말로 태양의 무리일 것이다.

노래

고대에는 시(詩)를 바람(風) 3311편의 시경 중 160편은 각국 여러 지역의 민중들이 부른 민요이다. 노래가 채집된 지역이나 국가 이름을 따서 豳風, 鄭風이라고 시를 분류했다 이라고도 했다. 그 바람은 들(민중)에서 노래가 되어 제왕의 침전으로 흘러들었다. 어느 한 개인의 노래라면, “시경의 노래를 전반적으로 평하자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 4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라고 공자께서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세유의 노래(La Marseillaise)가 민중 속에서 울려퍼질 때 혁명의 바람이 프랑스를 휩쓸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민중 속에서 소리 높게 울릴 때, 거기에는 결단코 사악함이 없다. 개인이 사악한 것이지, 민중이 사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래는 가볍고 바람처럼 세상의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간다. 바람이 불면 풀이 눕고 나무잎이 흔들리며, 세상은 그 노래를 듣는다.

바람둥이를 한자로 쓴다면, 風人일 것이다. 하지만 풍인이란 나그네이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며 저 마을의 노래(소식)를 이 마을에 전하고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얻는 사람, 바람처럼 거처가 없는 사람이 바람둥이이지, 성적인 문제로 바람을 피우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을 것 같다.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은 후, 간혹 지하로 내려간다. 밤 11시부터 국악방송에서 하는 황윤기의 ‘세계음악 여행’을 듣는다. 듣다보면 나른해서 정신과 육신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경계 속으로 음악이 내 몸에 젖어든다.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을 적시던 기타의 선율이 흔들리며 소멸되거나, 파두를 부르는 여가수의 낮은 목소리 속에서 흘러나오는 한숨, 이런 소리들이 마지막으로 사라질 때의 그 미묘한 떨림을 만날 수 있다. 듣다보면 소리에 생명이나 영혼이 없다고 단언할 수가 없다. 내 속에 영혼 따위가 없을 수는 있어도 말이다.

바람의 무리에 속하는 줄 알았으나, 나는 대지와 대지의 특정한 좌표에 매여있는 사람이다. 이 도시의 빌딩과 그 너머로 간헐적으로 바라보이는 산과 들의 윤곽 너머를 더 이상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여기까지 떠밀려 온 것이다. 그리고 자유나 사랑 그리고 진실이라든가 우정 등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저녁이 무너지는 밤에, 바람을 맞이하며 라디오를 듣거나, 지하로 내려가 세상 구석의 슬픈 노래를 들으며, 내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것들이, 아스라하고 그립고 또 그만큼 아름다웠던 것이라고, 속삭이면서도, 지금의 나를, 예전보다 더 아끼게 된 것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아마 더 이상 너를 그리워하거나 사랑할 나이가 아닌 탓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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