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시간

온다던 장마비는 오지 않고 폭염이 계속 되었다. 어제 서울 기온은 33.4°C였으나 새벽에 내린 비의 탓인지 오늘은 31°C로 다소 낮았졌다. 게다가 낮은 습도와 바람 탓에 견딜만 하다.

어제는 길 위에 서 있으면 나뭇잎이 팔랑거려도 내가 서 있는 자리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광막한 더위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여름의 열기는 오후 네시까지 비등하다가, 아직 열기가 대지를 내리누르고 있고, 하늘 위로 햇빛이 발광하고 있지만, 바람 빠지듯 소멸된다. 손부채질을 하며 서쪽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오후 7시 30분, 기온은 27°C, 하늘을 이미 식어있건만 땅이 식어가는 먼지냄새와 열기가 훅 끼쳐왔다.

요즘 일몰시각은 19:55분경이다. 장마전선이 북상하고 몇십mm의 비가 내린다던 예보는 순연을 거듭했고, 일몰이 시작되는 하늘은 드맑기만 하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시각이 되자, 남쪽 도로 건너편 플러터너스 나무 사이로 전철이 진입한다. 슬라이딩 도어 위의 전광판에는 밝은 낮에는 보이지 않던 열차의 행선지가 주황, 빨강, 초록 불빛으로 떠올랐다. 그 색깔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전구불빛 같기도 했고, 어두운 방에서 오디오를 켰을 때 떠오르는 녹턴 불빛같기도 하고 달콤한 사탕 색깔같기도 했다. 승강장에 있던 승객들이 객차에 올라타고 슬라이딩 도어가 닫힌 후 전철은 밤을 향해 출발한다. 객실의 의자에 앉은 승객들의 피곤한 모습이 플라타너스 사이로 흘러가고 텅빈 승강장은 더 어두워졌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피로에 찌든 넥타이를 풀고, TV를 켜고, 마침내 밥상에 앉아 저녁을 먹게 될 것이다.

서쪽 하늘은 이제 금빛으로 발광하다가 주황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그 빛들이 땅거미가 내려앉은 건물의 유리창 위로 술렁이며 들어차기도 한다.

아직 일몰까지는 30분 가량 남았다. 동쪽 하늘은 서쪽에서 날아오는 빛을 받아 오히려 서쪽보다 밝다. 하지만 나는 노을이 내습하는 모습을 기다렸다.

합정동에 살았던 어린 시절, 절두산에서 가양동과 행주산성 위로 피어오르던 노을을 보며, 영원을 느끼고,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나의 의지와 선택이라고 생각했고, 사랑이나 우정 등의 삶의 가치나 인간의 존엄성 따위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생활의 유한함과 평범성에 무릎을 꿇고, 아득하고 깊은 것들을 사유하기 보다 저녁 밥상을 마주하고 느긋한 저녁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영원, 우정, 사랑, 진실, 아름다움 등등의 것들이 생활과 부딪혀 치사하고 쓸모없는 것들이 되어버리는 이 현실성 앞에 비굴하게 굴복해버리는 이 나이가 그다지 싫지는 않다.

하지만 일몰의 시간이 지난 후 서쪽 하늘을 피빛으로 뒤덮는 노을이 처참하게 아름다운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2016.07월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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