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를 다녀와서

산문은 하나로 열려 있으니…

선암사 산문(三門)은 일주문 밖에 없다.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나 금강문, 불이문이 없이 막바로 범종루이다. 일주문 또한 기둥과 다포식 공포 위의 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주문 기둥 옆으로는 한팔 길이의 벽이 있다. 선암사는 일주문에서 불이문에 이르는 정역(淨域)이 없이 막바로 산사에 들게 되어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일주문 아래 승선교 앞의 홍예교(아취형 다리)를 건너 다시 승선교를 건너 물이 흐르는 강선루 아래로 산에 들면 물을 세번 건너게 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예토의 더러움과 삿된 것은 씻김을 받은 바, 별도로 결계에 들기 전 삼문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선암사에만 피는 매화일진데

절에 온 아이가 물었다. 이것은 무슨 나무예요? 아이의 아버지가 대답한다. 매실나무다. 나는 속으로 대답한다. 그것은 매화나무란다. 열매 쪽에서 보면 매실이 맞고, 꽃으로 보자면 매화가 맞다고 한다. 하지만 문인화 밖에서 실물로 매화나무를 본 것은 처음이다. 문인화를 통하여 상상한 매화나무란 가지가 벌어져 커다랗고 거친 나무였다. 하지만 무우전 담을 따라 몇백년을 자랐다는 선암매는 상상의 십분의 일로 작았다. 가지는 뒤틀렸고 거친 나무 껍질 위로는 골동품에 피는 녹청같은 이끼가 끼어있다.

봄이라서 꽃이 피는 것이지만, 매화에게는 봄이 온 것이 아니다. 엄동을 뚫고 매화가 맹렬하게 봄을 피워냈기 때문에 매화꽃이 피고 봄이 온 것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깨치려면 동백이 붉고 선암매가 하얗고 붉게 피어나는 봄볕이 맑은 날 다시 와야할 것 같다.

아름자리에 대한 불만

수도승이 조주스님을 찾아와 물었다.
스님, 세상에서 가장 다급한 일이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은 다급하게 일어나며 말씀하셨다.
허~ 참! 오줌이나 눠야겠다. 이런 사소한 일도 나처럼 늙은 중놈이 직접해야 하다니…
하시며 뒷간으로 달려갔다.

정호승 선생의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는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아니 그의 정감에 공감할 수 없다. 눈물을 곱씹으면서 가기에는 순천까지는 너무 멀다. 또 버스를 타고 선암사에 당도하여 숲길을 걸어오르다 보면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 슬픔의 뿌리를 잃어버리거나, 오던 길에 목놓아 울고 집으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기진하여 일주문 앞에 퍼질러질 것이다.

영화를 보러 갔다가 화장실 앞에 붙여진 ‘아름자리’라는 표찰을 보았다. 그 후 해우소라는 낱말도 싫어졌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변기 앞의 표어를 축약하여 아름자리라고 했겠지만, 그 이후 ‘아름답다’라는 낱말에서 지린내가 나는 것 같다.

화장실, 해우소, 해우실, 정방, 서각, 세수간 등은 아름자리와 같은 낱말들은 똥이나 오줌, 그 더러움을 기휘함에 다름 아니다. 아무리 향기나는 낱말로 똥 오줌을 감싼다해도 곧 그 낱말은 더럽고 냄새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이름을 바꾸기 보다 뒷간을 깨끗이 쓰는 것이 먼저이다. 괜히 있던 낱말을 더럽히고 새 단어로 그 더러움을 덮을 생각을 말아야 한다.

해우소에 잠시 앉아본다. 오래전 쌍계사의 해우소에서 똥 누던 생각이 났다. 앉으면 산골의 풍경이 들어오고 개울소리가 가득한 데, 해우소 밑에서는 아침에 깔아논 풀이 마르며 인분과 뒤섞이는 향기와 냄새가 났다. 그때 내 속의 더럽고 묵은 것이 풋풋한 햇 것과 뒤섞이고 삭아서 두엄이 된다는 것, 땅을 기름지게 하고 또 먹을 것을 자라나게 할 것이라는 느긋한 믿음이 있었다. 더러운 것이라서 물에 씻겨 직선적으로 처리되는 현대적인 야박함이 아닌, 아아! 순환의 지극함이여. 본시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아니함(不垢不淨)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똥과 오줌’이다.

선암사 해우소는 안에 쓰여 있는 대변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똥과 몸을 멀리하는 데 기능이 모아져 있다. 변소의 깊이가 깊다. 그 깊이만큼이 똥과 몸은 멀다. 또 냄새가 나지 않도록 통풍이 잘된다. 그만큼 기능적이다. 기능적인 만큼 실컷 울기에는 뭔가 2% 부족하다.

위의 글은 선암사 해우소의 정면에 가로로 붙은 현판 글이다. 뭐를 ‘싼 뒤’라고 읽어야 하나 엉덩이를 ‘깐 뒤’라고 읽어야 하나 알 길이 없다고 누군가는 너스레를 떤다. 우리는 화장실을 뒷간이라 쓰고 뒤깐이라고 읽는다. 저 글처럼 사이시옷을 초성 ㄱ에 붙여 ㅅ+ㄱ의 복자음으로 쓰고 ㄲ으로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몸의 뒤를 위한 조그만 공간이라는 뒷간이 걱정을 없앤다는 해우소나 몸을 치장한다는 화장실이나 변을 보는 장소라는 변소보다 훨씬 좋은 이름이다. 아니면 집의 곁에 있다는 측간도 좋다.

선암사 해우소라는 말보다 선암사 뒷간에 가서 실컷 울어라가 더 마음에 든다.

범종과 목어 등…

당목이 종의 당좌를 때리면 쾅! 소리가 터져나오지만, 남은 울림은 범종의 내륙 안쪽으로 깊숙히 배어든다. 청동의 속살에 깃든 울림은 사무쳐서 시차를 두고 으아앙 울음이 되어 새어나온다. 그 소리를 들으면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자비가 고해 속에 허우적대는 중생에 대한 가없는 슬픔인 것인지, 무명한 중생에게 깨달음의 열락이 흘러넘치는 것인지 나는 분간치 못한다.

그래서 범종이 쾅하고 울면 준열한 계율같고 으아앙하는 여운은 위로같기도 하지만, 결국 둘도 아니어서 단지 소리로 올올하여 삼천대천 세계로 울려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암사의 당목의 굵기는 왠만한 나무의 밑동 만하다. 사바세계의 하루가 깨고 지는 것을 삼천대천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서른세번 타종을 해야 한다. 스님이 서른 세번이나 타종하기에 당목의 무게는 묵직해보였다. 스님은 쇠사슬에 드리워진 당목을 춘향이 속곳이 보일 높이까지 그네를 태운 후 허공에 당목을 풀어놓는다. 당목은 종의 청동 속에 뿌리라도 내릴 듯 타원의 호를 그리며 당좌를 두들겨 부순다. 금극목이 아닌 목극금의 형세이다. 오행상극의 이치를 거스리는 힘이야말로 두꺼운 청동에 소리를 매겨 기어이 종을 울게하고 여운이 시방삼세로 넘치게 할 것이었다.

당목으로 종을 깨져라 칠 때, 그 소리가 구리의 것인지, 나무의 것인지, 아니면 구리의 것이자 나무의 것인지, 그 반대인지 나는 차마 알 수 없다. 소리는 자성이 없는 것이라서 결국 나무와 구리와 시간이 버무려져야 나는 것일진데, 버무려진 범종의 소리는 흐트러져 문득 공(空)이 되어, 산사의 밤을 토해내고 아침을 만들어낸다.

목어와 법고와 운판의 소리가 이와 같으니, 산사에서 하루를 열고 닫는 소리의 이치 또한 그러하다.

편백나무 숲에서 본 것은

선암사처럼 가람과 갖가지 나무가 섞이고 산의 능선이 포개져 아늑하면서도 아득한 곳이 다시 있을까 싶지만, 이슬비가 내리는 아침에 편백나무 숲으로 갔다. 거기에서 세상의 초록들이 겹치고 포개지면서 아침 안개와 구름을 뚫고 흘러내리는 빛 속에서 생명의 숨결들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초록의 아침에 편백나무 숲에서는 나무들이 빛을 숨쉬기 위하여 하늘로 하늘로 뻗어올라 자신에게 할애된 몇평의 하늘에 가지를 펼치고 잎을 벌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하여 나무의 밑동은 그늘지고 습기에 젖어 찼다. 둥치에는 이끼가 피고, 그늘과 습기를 따라 양치식물들이 자랐다.

편백나무 둥치들 사이로는 여름 신록이 연두빛으로 스며들었다.

바람소리가 들리는 낮에

시원한 바람소리는 나뭇잎들이 입맞춤하는 소리일 것이다. 간혹 바람의 기별을 개울소리로 착각하는 오후가 있었다.

누군가 등을 밝히면

일요일 오후가 되자 템플스테이를 왔던 사람들이 심검당을 빠져나갔다. 안채와 바깥채의 방들이 텅빈 채, 밤이 왔다. 나 홀로 머물던 심검당에 밤이 오자, 안채의 마당 안에 등이 조용히 켜졌다. 그리고 밤이 더욱 적막해지자 화장실과 세면장으로 통하는 바깥채의 방 하나에 불이 켜졌다. 방 앞에 신발은 놓여있지 않았다. 묵은 소변을 풀러가는 야밤에 댓잎이 서걱거려도 방문에서 스며나오는 불빛은 따스하기만 하다.

태고종이라 선암사

템플스테이를 가기 위하여 남도의 절 이름들을 펼쳐보았다. 선암사의 이름을 보았을 때, 조정래 선생과 태백산맥이 떠올랐고 또 태고종이 떠올랐다. 그리고 태고종 사찰에 가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절 살림의 한켠을 보고 싶어 조계산에 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선암사에서 본 것이 태고종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닐 것이나, 느낌은 그냥 좋았다.

오래된 사찰이 잘 매만져진 모습은 이런 것이구나, 늙으신 스님이 새벽의 적요를 깨치며 법당 앞과 계단을 빗질하는 모습이 이름답고, 전각 속에는 그늘이 만든 먼지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전각에 살며시 빛이 들어 밝고 아늑한 느낌이다. 게다가 전각 뒤나 요사채 뒤에 사다리나 의자, 잡동사니 등이 나름대로 가지런하여 어수선하지 않다. 절을 돌보는 스님이나 사람들이 참으로 바지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공양간에서는 스님이 직접 공양을 준비하고, 스님이 먼저 공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나 신도, 스님 구분없이 배식을 받는 모습 또한 편안했다. 게다가 먹어 본 절밥 중 가장 맛있었다.

선암사에 머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전각들이 예쁘고 전각과 뜨락 사이로 매화, 솔, 편백, 오동, 은행, 그리고 대나무, 풀 등이 자라고 전각 사이로 골목과 통나무 벤치가 있어 아름답고 여유가 있고, 외곽을 수목과 개울 그리고 산능성이가 옹위하고 있어 빛과 그늘과 안개 그리고 물소리, 새소리 등이 법당 안 목탁소리를 더욱 그윽하게 하지만, 늙은 스님의 얼굴에 천진한 웃음이 가득하고, 젊은 스님들은 조용하지만, 조계종 스님들이 보여주곤 했던 권위라는 강고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스님들의 그러함이 정말 좋았다. 스쳐지나며 가벼이 목례라도 하면, 스님들은 깊숙히 허리를 숙여 합장을 했다.

비구냐 대처냐는 외양이고 실상은 수행이자 신도에 대한 봉사이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은 말(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밀고 나가야 할 것이다.

스님께서는 불교는 심경이다. 금강경 등 부처님 말씀이 머리에 아무리 많이 들어있으면 뭐하겠느냐 결국 마음에 내려와야 한다고 하신다.

그래서 분별심이 사라진 보살은 내가(我相) 중생들을(人相) 번뇌로 부터(衆生相) 깨달음으로 인도했다(壽者相)는 생각을 갖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계종의 종정이셨다가 열반을 하신 성철스님께서는 1947.10월에서 1950.03월까지의 봉암사 결사 도중, 보살계를 한다고 신도 수백명을 봉암사 절방에 모아놓고 스님들을 천대했던 이조시대의 관행을 바꾼다고,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고 자랑하셨다.

“당신네가 여태까지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께는 절했지만 스님네 보고 절한 일 있나? 생각해 봐 스님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당신네 스승이고 신도는 스님에게 법을 배우는 사람이야 그러므로 신도들은 제자고 스님은 스승인데 법이 거꾸로 되어도 분수가 있지 스승이 제자보고 절하는 법이 어디 있어, 이조 5백년 동안에 불교가 망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야 부처님 법에는 신도는 언제나 스님네한테 절 세번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 부처님 법대로 할려면 여기 있고 부처님 법대로 하기 싫으면 오지 말아 그렇다고 꼭 우리 말대로 하라는 말 아니야 하기 싫은 사람은 나가면 돼.”

이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 똘똘 뭉쳐진 고함이 없는 선암사가 마음에 들었다.

템플스테이와 다담 등

템플스테이 동안 묵은 심검당의 방은 분명 스님들이 거처했던 요사채일 것이다. 다른 사찰의 경우 대부분 방과 화장실을 함께 구비함에 따라 템플스테이를 위한 새 건물을 짓거나, 기존의 요사채를 개조하여 민박집처럼 꾸민 것이 대부분이다. 선암사의 경우 구들만 허물고 난방 만 새로한 탓에 요사채의 정취가 그대로다. 대신 심검당 바깥채 한쪽에 별도로 공동 세면장과 화장실을 가설했다. 시설이 깨끗하고 관리가 잘되어 방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방과 화장실을 함께 구비한 경우보다 정갈하고 좋았다.

게다가 제공된 템플복도 새로 빨아 다림질된 것이어서 좋았다.

요사채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탓에 여닫이를 열면 입구자 형태의 안마당에는 이미 꽃들은 지고 풀이 한창 자라고 있었다. 바깥채에는 대나무가 물확 옆에서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는 스님과의 다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나이에도 낯가림을 하기 때문이다.

다담 때 스님이 내어준 차는 선암사 ‘야생 작설차’란다. 선암사 후원에 자생적으로 자라난 야생차로 일본의 녹차를 들여다 키운 보성의 녹차와 다르다고 한다. 선암사 소개자료를 보니 스님들은 곡우 이전에 차잎을 따서 가마솥에 8~9번 덖어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까 야생 작설차 우전이다. 이 차는 80g에 15만원 한다고 한다.

차 맛을 모르는 나에게도 구수했다. 5번 우려내도 맛이 같다고 한다.

스님과의 다담에 9명이 참여했고, 나와 대구에서 온 남자 외에는 여자였다. 이들은 다음날 모두 집이나 직장으로 돌아갔고 나는 하루를 더 묵었다.

스님 말씀이 구수해서인지 사람들은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나도 웃었다.

다음날 아침 편백 숲 트래킹 중에 비가 그친 풀 숲가에서 스님은 “미소는 반야심경에 나왔듯이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라고 했다. “미소는 가장 영험한 주문이고 가장 밝은 주문이며 이 보다 더 좋은 주문은 없으며 이와 나란히 할 주문은 없습니다”고 말씀하신 후, 노래를 하시겠다며 찬송가를 부르셨다. 염불을 외던 중이 부르면 노래가 늘어진다고 하셨지만, 그 찬송가는 듣기 좋았다.

스님의 법명은 등명이라고 하신다.

부처님께선 열반에 드시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자기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 자신에게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自燈明 法燈明 自歸依 法歸依)

스님의 법명이 자등명 법등명의 등명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편백나무 숲 아래로 난 길을 따라 걷는 스님의 저고리 자락이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렸다.

결국 배낭에 채워갔던 책을 읽지 못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산사의 적요함과 바람소리, 개울소리, 새소리에 쫓기고 실상을 가늠할 길 없는 스님 말씀을 쫓다가 그만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2016.05.28~2016.05.30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