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개인 날의 아침에

밤새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긏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꽃잎이 집니다. 지다 못해 빗물과 함께 흘러내립니다. 벚꽃은 들과 길 위로 흐트러집니다. 아스팔트는 가로등불 아래 연분홍으로 젖었지요. 막 시작한 봄이 벌써 가려는지 라디오에선 야상곡이 흘러나왔고, 저의 마음도 빗소리에 젖었습니다.

저의 초라한 이 곳 생활도 끝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일이면 들 저편의 미루나무에 잎이 좀더 무성해지고, 대지 위를 흘러가는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하루가 끝나는 시간에 묵념처럼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리라는 서글픔 같은 것이 저를 압도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4월 17일, 06시 30분. 비가 그치고 낮은 구름 사이로 손바닥 만한 하늘이 보입니다. 잊고 있었던 어린 날의 하늘색입니다. 산과 구릉이 손에 닿을 것 같아서 들이 조붓해 보입니다.

들을 바라보며 춘향이 옥중에서 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던 ‘쑥대머리’를 박애리의 노래로 듣습니다.

쑥대머리 가사 펴기..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 자리여 생각나는
것은 님 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손가락 피를 내어 사정으로 님을 찾아볼까 간장
의 썩은 눈물로 님의 화상을 그려볼까 계궁항아 추월같이 번듯이 솟아서 비취고저 전전
반측 잠 못 이뤄 호접몽을 어이 꿀 수 있나 내가 만일 님 못 본채 옥중고
혼이 되거들면 무덤 앞이 섯난 돌은 망부석이 될 것이오 무덤 근처 선 나무는 상사목
이 될 것이니 생전사후 이 원통을 알아줄 이가 뉘 있으란 말이냐 쑥대
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 자리여 생각나는
것은 님 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쑥대
머리
내가 만일 님 못본 채 옥중고혼이 되거들면 무덤
앞이 섯난 돌은 망부석이 될 것이오 무덤 근처 선 나무는 상사목이 될 것이니 생전
사후 이 원통을 알아줄 이가 뉘 있으란 말이냐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 자리여 생각나는 것은 님 뿐이
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쑥대머리

<오지총 곡, 박애리 노래>

쑥대머리, 귀신 얼굴, 적막옥방 혼자 앉아 생각느니 임 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우리 낭군 보고 지고. 오리정 이별 후에 일자서 없었으니 부모봉양 글 공부에 겨를 없어 그러한가. 연이신혼(宴爾新婚) 금슬우지(琴瑟友之) 나를 잊고 그러한지. 무산신녀 구름되어 날아가서 보고지고. 계궁항아(桂宮恒娥) 추월같이 번뜻 돋아 비치고저. 막왕막래(莫往莫來) 막혔으니 앵무서(鸚鵡書)를 어찌 보며,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드니 호접몽을 꿀 수 있나. 손가락의 피를 내어 내 사정을 편지할까, 간장(肝腸)의 썩은 물로 임의 화상을 그려 볼까. 이화일지춘대우(梨花一枝春帶雨)에 내 눈물을 뿌렸으면, 야우문령단장성(夜雨聞鈴斷腸聲)에 임도 나를 생각할까. 녹수 부용에 연 캐는 정부(征夫)들과 제롱 망태기에 엽뽕따는 잠부(蠶婦)들은 낭군 생각 일반이나 나보다는 좋은 팔자, 옥문 밖을 못 나가니 연 캐고 뽕 따겠나. 임을 다시 못 뵈옵고 옥중 장혼(戕魂) 죽게되면 무덤 앞에 돋는 나무 상사수(相思樹)가 될 것이요, 무덤 근처 있는 돌은 망부석이 될 것이니, 생전사후 이 원통을 알아줄 이 뉘 있으리. 애고 애고 설운지고.

<춘향가 성두본 중>

이런 슬픔이, 이런 사랑이 어딨는지 흐린 아침이 점차 맑아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오후면 밤새 내린 비도 햇볕에 마르고 들에는 바람이 불 것 입니다. 그러면 슬픔이라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도 다 잊혀지고 오후의 긴 그림자가 들 위로 내려설 것 입니다.

5465064420 OTHeRS

2 thoughts on “비 개인 날의 아침에

  1. 좋은 시절은 어쩜 이리도 빨리 지나가버리는 걸까요?
    봄이 온것이 꿈인가 싶었는데 어느새 여름이 다가오고 있네요.
    그토록 밝은 분홍빛으로 하늘 가득 펼쳐지더니, 그렇게나 빨리 흩어져 버리는 벚꽃잎이 야속했어요. ㅜㅜ
    여인님의 글은 한편의 소설을 보는 듯 합니다. ^^

    1. 봄은 여름을 준비하기 위한 것인지 허겁지겁 왔다가 그냥 가버리네요. 이 봄이 다가도록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만 가버리고 이제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라일락이나 아카시아향이 날릴 때가 되었네요. 물론 장미도 피겠지요.

      좋은 계절에 좋은 일 많이 만들기 바랍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