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카뮈;Camus;A.Camus;Albert Camus

그의 生에 대한 열광들을…

<결혼, 여름에서>책세상, 2008, 개정 1판 6쇄

2009년의 여름을 보내며,

까뮈의 태양은 나의 태양과 다르다. 다른 태양을 지닌 그가 위대하다고 내가 그 반대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번 여름 또한 태양은 내게는 몹시 가혹한 편이었다.

티파사에서의 결혼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깜깜해진다.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이미 내 삶은 내 것이 아니었다고 뇌까리면서도 ‘지극히 빈약하나마 가장 끈질긴 기쁨을 얻었던 삶에의 추억들… 여름철의 냄새, 내가 좋아하던 거리, 어떤 저녁 하늘’을 그리워 하던 뫼르소처럼 말이다.

하지만 티파사에서 그는 지금 행복하다고 온 몸으로 말한다.

오늘에야 마침내 과거가 폐허를 떠나버렸으니, 무너지게 마련인 사물의 중심으로 폐허를 다시 인도해주는 저 심원한 힘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마음을 쓸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사랑과 욕정을 만나기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우리는 교훈을 찾는 것도 아니요, 위대해지는 데 필요하다는 그 어떤 쓰디쓴 철학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태양과 입맞춤과 야성의 향기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를 온통 휩싸는 것은 자연과 바다의 저 위대한 무분별의 사랑이다. 폐허와 봄의 결혼 속에서 폐허는 다시금 돌들이 되어, 인간의 손길로 닦여진 저 반드러운 손때를 이제는 다 버리고 자연 속으로 돌아와 있다.

나는 전라의 몸이 되어 아직 대지의 정수로 향기가 배어 있는 몸을 풍덩 바닷물에 던져 땅의 정기를 바다에 씻어야 한다. 그리고 그토록 오래 전부터 땅과 바다가 입술과 입술을 마주하고 열망하던 포옹을 나의 피부 위에서 맺어주어야 한다.

제밀라의 바람

세상에는 정신 그 자체를 부정하는 하나의 진리가 태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정신이 사멸하는 곳이 있다. 내가 제밀라에 갔을 때, 그곳에는 바람과 태양이 있었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훗날에’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나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 다음에는 또 다른 삶이 온다고 믿는 것이 내게는 즐겁지 않다. 내게 죽음이란 닫혀버린 문과도 같은 것이다. 죽음이란 그저 내딛어야 할 한 발짝 발걸음이 아니라 끔찍하고 추악한 모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항상 놀랍다고 여겨지는 사실은, 우리에게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세련된 의견이 분분하면서도 죽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은 매우 빈약하다.

죽음에 대한 나의 모든 공포는 삶에 대한 질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도시는 다른 어느 곳으로도 인도해 주지 아니하며 어느 고장을 향하여 트여 있지도 않다. 그곳은 다만 갔다가 되돌아오게 마련인 곳이다.

나는 바로 이 살가죽에 세계가 써놓은 필적을 판독하곤 했었다.

생명의 어떤 무게

저 고인 물처럼 쓸쓸한 하늘

단순한 것은 무엇이나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알제의 여름

무언가를 배우고 교육을 받고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이곳에서 얻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 고장에는 교훈이 없다. 이곳에는 약속받을 것도 없고 엿볼 만한 것도 없다. 이 고장은 베푸는 것, 그것도 아낌없이 다 베푸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 침묵들은 그것이 그늘에서 생긴 것이냐 햇빛에서 생긴 것이냐에 따라 그 질이 다르다.

… 여름 저녁의 침묵이 일품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피의 고동치는 소리가 오후 두시의 태양의 폭력적인 맥박과 하나가 되는 곳, 세계와의 혈연 관계가 실감되는 저 영혼의 고향을 찾는 것이다.

내가 한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죄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람들이 삶에 대하여 죄를 범한 일은 없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삶에 대하여 죄를 범한다는 것은 아마도 삶에 대하여 절망하는 것이라기 보다 어느 다른 삶에 희망을 두고 이 땅 위의 삶이 지닌 거역할 수 없는 위대함을 기피하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 희망은 체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막

산다는 것은 물론 표현한다는 것과는 어느 정도 반대되는 것이다. 토스카나파의 대 화가들에 의하면 산다는 것은 침묵과 불꽃과 부동 속에서,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증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가들은 어떤 미소나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부끄러움, 후회나 기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뼈가 튀어나오고 들어간 모습과 끓는 피의 얼굴을 그린다. 영원한 선(線)들 속에 딱 고정되어버린 그 얼굴들로부터 화가는 정신의 저주를 영원히 추방해버린 것이다. 희망이라는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육체는 희망과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니까 말이다. 육체가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피의 고동소리뿐, 육체만이 아는 영원은 무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오토가 그린 성 프란체스코 성인의 저 내면적인 미소가 바로 행복에 대한 욕구를 지닌 사람들의 삶을 정당화해준다고 말한다 해도 그것 역시 독신(瀆神)이 될 수는 없다.

지성이 아름다움 속에 몸을 던지면 허무로 식사를 하게 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 속에서 부활하여 무덤을 나오는 그리스도의 시선은 인간의 시선이 아니다. 그의 얼굴에 행복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보이는 것은 다만 성난 듯 맹렬하고 영혼 따위는 담겨 있지도 않은 어떤 위대함뿐인데 나는 그것이 살려는 결단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자는 백치와 마찬가지로 별로 말이 없는 법이니까. 이 같은 순환현상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적어도 그들은 육체가 제시하는 하나의 해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답이란 반드시 썩어지게 마련인 하나의 진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쓴 맛과 고귀함을 동시에 지닌 진실인데 그들에겐 그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가슴으로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늘이 피렌체 들판의 포도 나무와 올리브 나무들을 엄청나고 말없는 슬픔으로 뒤덮어가기 시작하는 어떤 저녁, 나는 이 진실이 자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행복이란 한 존재와 그가 영위하는 삶 사이의 단순한 일치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서도 역시 진리가 썩어서 없어질 수 밖에 없다니 이보다 열광적인 것이 또 있을까? 비록 내가 진리를 원한다고 한들 결국은 썩어 없어지지 않는 진리를 무엇에다 쓸 것인가?

그 이상한 사막은 자신의 목마름을 기만하지 않은 채 사막 속에서 살아갈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아는 사막이다.

미노타우로스 또는 오랑에서 잠시

플랑드르의 어떤 거장들의 그림에서는 놀라운 규모의 한 주제가 줄기차게 되풀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벨탑의 건설이 그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풍경들이며 하늘로 기어오르는 바위들, 일꾼들과 짐승들과 사닥다리들과 괴상한 기계들과 밧줄들이 우글거리는 절벽들이다. 더구나 인간은 거기서 공사장의 초인간적인 규모의 크기를 헤아리게 하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랑 시 서쪽 산마루 위에서 눈길을 던지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편도나무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감탄해 마지않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힘으로는 그 무엇의 기초도 마련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힘 있는 것은 둘밖에 없습니다. 칼과 정신이 그것입니다. 결국에 가서 칼은 언제나 정신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하고 나폴레옹은 퐁탄에게 말했다.

우리가 비극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비극적인 것과 절망을 혼돈하고 있다. “비극적인 것이란 불행을 향하여 한바탕 크게 내지르는 발길질 같은 것이리라.”라고 로렌스는 말했다. 이야말로 건전하고도 당장에 적용할 수 있는 생각이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발길질을 받아 마땅한 것들이 많다.

명부의 프로메테우스

오늘날의 인류는 오로지 기술만을 필요로 하고 오로지 기술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인류는 그의 기계들 속에서 반항하며 예술과 예술이 전제로 하는 것을 한갓 장애물로, 속박의 표시로 여긴다. 그와 반대로 프로메테우스의 특징은 그가 기계와 예술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늘의 인간은 정신이 잠정적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육체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신이란 것이 과연 잠정적으로 죽을 수 있는 것일까?

사슬에 묶인 영웅은 신들의 천둥번개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그의 조용한 믿음을 잃지 않고 지니고 있다. 바로 이렇게 하여 그는 그의 바위보다도 더 모질고 그의 독수리보다 더 참을성이 있는 것이다.

헬레네의 추방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의 위협 앞에서, 자기에게는 오직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은 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단 한 가지 우월성 외에는 그 어떤 우월성도 없다고 말했다.

우리들에게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자존심이란 바로 제 한계에 대한 충실함이요, 제가 타고난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력 있는 사랑이다.

스스로 인정하는 무지, 광신의 거부, 세계와 태두리짓는 한계, 사랑받는 얼굴, 그리고 끝으로 아름다움,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게 되는 우리의 진영이다.

수수께끼

나는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에다가 이름을 붙여보았다가 앞서 한 말을 취소도 하고 했던 말을 되풀이하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다가 물러서곤 한다. 그런데 남들은 나보고 결정적인 이름들을, 아니 단 하나의 이름을 대라고 오금을 박는다. 그러면 나는 불끈하여 대든다. 이름 붙여진 것은 이미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내가 말해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이런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이며 마땅히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만으로도 우리의 삶을 채우고 우리의 노력을 다 바치기에 충분하다.

티파사에 돌아오다

우리의 생명이 마르지 않는 한, 이 두가지 사실을 오랜 시간 잊은 채 살아갈 순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며, 감탄하는 것이다.

저녁이 되어 몸을 들여놓고 쉴까 하여 찾아드는 요란한 불빛의 카페들에서 나는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낯이 익은 얼굴들에서 내 나이를 읽어내곤 했다. 나는 다만 그 사람들이 나와 함께 젊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젊지 않다는 것을 알 뿐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그저 운이 없는 것이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니까 말이다.

아름다움이 존재하는가 하면 모멸당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해내기가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그 어느 한쪽에 불충실하고 싶지는 않다.

가장 가까운 바다

서로 사랑하면서 헤어진 자들은 고통 속에서 살지 모르나 그것이 절망은 아니다.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눈에 눈물 없이 이 귀양살이를 참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기다린다. 어느 날이 와서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