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묵한 하늘

그런 날이 있다. 내일에는 남도를 여행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 벌써 일주일 넘도록 보지 않은 하늘이었다. 겨울이 끝났고, 들 저쪽에는 전철이 가속을 시작하고 있다. 이토록 세상이 나와 무관하리라곤 생각치 못했다.

새벽에는 비가 내렸을 것이고, 낮은 곳에 고인 하늘이 우묵하다.

나의 임무는 묵묵히 들 저쪽을 바라보는 것이었지만, 때로 조르조 아감벤의 신학에 대하여… 차마 죽지 못하였거나 살지 못한 처참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곳은 저지대, 때론 물새들이 날았다. 아침 8시 23분, 저공비행을 하는 새의 깃털 사이로 스치는 고요.

이토록 평화스럽다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낮은 땅에 고인 하늘이 우묵하다. 거기의 그 날에는 아무런 잠언없이 전신주 하나가 봄바람에 흔들렸다.

This Post Has 2 Comments

  1. 후박나무

    봄이지만 차가운 바람과 흐린 하늘의 느낌이
    지금의 글과 사진의 느낌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전신주…그리고 우묵한 하늘
    뭔가 좀 우울하고 쓸쓸하기도 하구요.

    1. 旅인

      이 사진을 찍은 곳의 풍경은 황량하기도 하지만 늘 조용하고 평화롭기도 합니다. 하지만 늦은 저녁 불을 켜고 달려가는 전철을 보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피로한 밤을 달려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날은 봄이 고인 물 위를 흔드는 바람과 함께 오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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