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오는 풍경

들과 길 위에 서서 햇빛에 익고 바람에 마르는 가을을 보내는 일은 좋다. 햇볕은 맑고 따갑지만 대신 바람이 오후의 열기와 그늘에 깃든 서늘함을 비벼댄다. 밤과 새벽 사이, 새벽과 아침의 사이, 오후와 저녁 사이, 저녁과 밤의 사이, 그 분간할 수 없는 변경에서 밤과 새벽, 저녁, 그리고 또 밤이 어떻게 뒤섞이며 시간을 잠식하는가를 보기 또한 좋아한다. 낮과 밤, 밤과 낮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무수한 사이와 사이 속으로 흘러드는 풍경의 변화없이 밤과 낮으로 이분되는 단조로운 하루의 무료를 상상할 수 없다.

며칠동안 노을이 좋았다. 구름 한 점 없던 어제는 해가 조용히 졌다. 서산 아래로 해가 지자 들에는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어둠이 가라앉은 들 위의 나무의 우듬지나 구릉 위의 이삼층 건물의 지붕 위에는 아직도 햇빛이 남아 극명하게 밝았다. 맞은 편 산은 빛과 길어진 그늘로 산능성이와 골짜기들이 더욱 깊어져 전설처럼 아득했다.

저녁인지, 밤이 오는 것인지, 아직 오후인지를 가늠할 수 없는 17시 43분 즈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 때문에 결국 그르게 된다는 것과 사랑이야말로 세상에 대한 증오와 적의라며 교차로에는 붉은 신호가 켜졌고, 차들은 무료하게 서서 저녁이 오는 풍경을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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