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대한 사색

장님들, 특히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이 장님이 볼 수 없는 색이 바로 검은 색입니다. 그리고 볼 수 없는 또 다른 색이 빨간 색입니다.

– 보르헤스의 ‘칠일 밤’ 중 –

검은 색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극명한 빛에 사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풍경이 하얗게 바래던, 어느 여름 정오에야 비로소 알았다. 사물의 경계를 가르는 색들이야말로 바로 검은 색이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실명의 세계는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밤의 세계가 아닙니다”라고 토로한다. 그의 눈(眼) 속에 빛이 하얗게 들끓고 있어서 바깥 세상의 빛과 어둠을 더 이상 읽어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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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해가 무덥다. 해가 뜨는 하늘은 낮았지만 넓다. 하늘 언저리에는 구름이 걸쳐져 있다. 오전 5시를 조금 지났지만, 한낮의 열기와 극명한 햇빛을 이미 다 갖추고 있다. 이제부터 하루는 더위와 퇴약볕의 밀도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정오에서 오후 세시까지 사랑마저도 증오가 되는 집요한 열기가 자리잡을 것이다. 벌써 땅이 익는 냄새가 났다.

플라터너스를 사유하고 있는 중이다. 때로는 미루나무들이 넓은 들 한쪽에서 나란히 서서, 사람들의 외로움 속으로 가지를 기울이며 풍경 속에 아득함을 풀어내는 모습을 사생하기도 한다.

며칠 전, 비가 내렸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는 가지가 한번도 잘리지 않은 채 5층 혹은 7층 높이로 자란 플라터너스가 강풍을 이기는 방식을 보았다. 가지는 풍향에 따라 흔들이고 나부끼는 것이 아니라, 가지는 잔가지와 잎들이 받는 바람을 용수철처럼 흡수하면서 휘어졌다. 그 움직임은 느긋했고 다른 가지들과 부딪하지 않으면서 바람의 힘을 축적했다가 힘을 풀어내면서 뒤틀림을 풀었다. 그래서 플라터너스는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 속에서 출렁거렸다. 수많은 가지가 흔들리지만 가지가 서로 부딪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비바람이 들이쳤던 다음 날 아침, 아스팔트 위로는 플라터너스의 잎들이 널려있었다. 지난 겨울에도 지지 않았던 옅은 갈색의 고엽(枯葉)들이 떨어져 내렸다. 플라터너스의 잎들은, 가지가 잘린 플라터너스 가로수의 잎에 비하여, 형편없이 작았다. 가지가 잘려진 플라터너스처럼 잎이 크다면, 잎의 증산작용을 감당할 물을 뿌리가 빨아올려 공급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가지가 잎의 무게 때문에 부러질 것이다. 매년 가지가 잘려나가는 도로 가의 플라터너스들의 큰 잎들이 오히려 기형적으로 웃자란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나무 사이에서 알지 못하는 벌레와 때 이른 매미가 울어대기 시작한다. 그러자 새들도 울었다. 하지만 새벽은 벌레소리와 새소리 때문에 오히려 적요했다. 아침 햇살이 쳐들어오고 교차로의 신호등 불빛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밤의 발등 위로 노랗고 붉은 빛을 드리웠던 상점의 네온사인 불빛은 꺼지고 간판들이 민낯을 드러낸다.

나는 개천의 저 쪽, 들의 북쪽 끝으로 가서 하루종일 남쪽을 바라보았다. 들은 개천에서 끝났다. 개천 너머로 또 다른 들이 남쪽으로 펼쳐지지만 아득해서, 그 들 위에 세워진 건물들의 지붕과 나무들의 우듬지만으로 들의 넓이와 동향을 짐작할 뿐이다.

북쪽 들의 남쪽으로는 미루나무들이 개천의 뚝을 따라 동서로 늘어서 있다. 바람을 담기 위한 모습인지 바람을 피하기 위한 모습인지는 모르겠으나, 미루나무는 길고 고독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늬바람 때문에 동쪽으로 약간 고개를 숙인 채 묵상하는 표정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시각이 오후 제 오시, 들에 그림자가 하염없이 길어지기 시작하면, 들 위로 발광하는 햇빛 속에서 뚜렷하게 짙은 색깔로 미루나무는 우뚝하다. 미루나무의 짙은 실루엣으로 부터 저녁의 묵상과 여름날의 들이 식어가는 평화를 읽을 수 있는 법이다.

그 시간에 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들거나 창문을 열고 저녁이 다가오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법이다. 그때 교차로 위에는 초록빛 좌회전 화살표가 켜진다. 집으로 가는 차량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좌회전, 남쪽으로 다급하게 달려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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