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의 글은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흔적으로 얼룩져 있다.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의 <시인의 말> 중 첫번째 구절 : 2006년 여름 기록

“여기는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밤이라고 쓰고 거기는 지도를 만드는 사람들의 어두운 골방이라고 믿는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비정하고도 성스러운 이 세계 앞에서 경악했고 그 야설(夜雪)을 받아내느라 몸은 다 추웠다. 어두운 화장실에 앉아 항문으로 흘러나온 피를 닦으며 나는 자주 울었다. 나는 그것을 간직했다.”

○ “칼의 노래”의 <책 머리> 중 두번째 구절 : 2001년 봄 기록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 만하지는 않았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이 없었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김경주의 글에는 김훈의 글 냄새의 흔적 뿐 아니라 무수한 타인의 얼룩이 있다.

이런 타자의 말들로 얼룩진 것을 비난하기 이전에…

타인의 얼룩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기에 아직도 젊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가 밖으로 싸돌아다니기에 바쁘기를 바란다.

시인이라는 명칭은 너무 고상하다.

시인이라는 말보다 시를 써서 떼돈을 벌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사람들이 고리타분한 시를 거룩하게 읽고 외우기보다 대중가요처럼 시를 읽고 흘려버리기를 바란다. 그래야 시가 대중화되고 우리말에 자리를 잡게 된다.

김경주의 시집에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특징이 있다.

– 재미있고 그럴 듯하다. 상상력이 부럽다.
– 다작이다. 왠만한 소설책보다 활자수가 많음에도 값은 6천원, 무척 싸다.
– 시의 형식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시에는 형식이 없음을 그는 지적한다.
– 시의 가능성에 대하여, 말(言)이 과연 말(語)가 될 수 있느냐를 묻는다. 그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때 문법의 무력함을, 말도 되지 않는 수사학적 현란으로 대체한다.
– 그의 시는 실험적이다. 실험의 결과는 독자의 반응이다.

이것 말고도 많은 특징을 열거할 수 있겠지만, 그만 생략한다.

이와 같은 것이 가능한 것은, 그가 고답적인 시인의 자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문단에서는 금기시 되는 사항일 수도 있는 대필작가를 했다고 떳떳이 말한다. 대필작가는 늘 1차적인 고객의 Needs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탓인지 몰라도 다른 시들이 시인의 자기만족과 시적 완성도를 향하여 수렴하고 있어 세속적인 현실에 무감각할지 모르지만, 김경주의 시는 독자들의 입맛을 위하여 확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이런 작업은 김경주 홀로 개척한 것이 아니라,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시도하는 작업들을 극단화하고 하나의 흐름으로 모아가는 테크닉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좋은 현상이다. 시에도 프로가 있다는 이야기며, 후생들을 위하여 또 다른 길도 있다고 말하는 일이며, 우리말을 이렇게 사용하여도 된다는 제시다.

이렇게 시가 대중화되고 많이 읽히고 돈이 되기를 바란다. 이러다 보면 다양한 우리 시의 틀이 만들어지고 시가 자유롭다는 것, 그리고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성공을 아직 속단하기에는 멀다.

– 이 시집은 2006.7.14일 출간 이후 (언제까지인지 모르지만) 1만 3천부가 팔렸다.
– 1만 3천부를 팔아 얻은 인지세는 5백만원을 조금 상회한다고 한다.
– 일반적으로 베스트 셀러의 기준은 인구의 1%가 구매, 즉 50만부 정도가 된다. 하지만 시집의 경우는 이 정도의 숫자라도 공전의 히트라고 한다.
– 한두곡의 히트 음악을 듣기 위하여 CD를 사는 것처럼, 한두편의 시를 읽기 위하여 우리는 시집을 산다. 그래서 우리는 CD나 시집을 사기보다 인터넷을 검색한다.
– 가수가 먹고 살기 위하여 예능으로 나가듯, 시인은 시보다 잡지에 기고를 하는 등의 일로 벌이를 챙겨야 한다.

우리는 시인을 비난하기 이전에 시인에게 감사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김경주는 이 시집 하나로 문단의 기린아로 자신의 자리매김을 한 것 같다. 나는 그의 후속시집 ‘기담’과 ‘시차의 눈을 달랜다’를 사서 읽었다. 그의 시에 중독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만큼 짜릿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