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면 말이야

그러고 보니……
욕심을 다스리기 보다, 욕구를 충족시키고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해 왔는데
이 나이에 어떻게 욕심으로 부터 마음이 고요해지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어제 하루종일 바람부는 들 가운데 높이 선 플라타너스가 바람에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았어.

“흔들리는 것은 네 마음일 뿐” 어떤 선사는 말씀하지만, 플라타너스의 가지의 움직임은 세찬 바람이 불어도 오히려 잔잔했어. 바람따라 세차게 흔들린다면 가지가 꺾이거나 서로 부딪힐테지.

바람이 불면 대신, 플라타너스는 아스팔트 위로 홀씨를 왈칵 쏟아냈어.

떨어진 홀씨는 니코친에 찌든 필터솜처럼 엉켜 누렇게 아스팔트 위로 굴러다녔어. 홀씨를 아스팔트 위가 아닌 다른 먼 곳으로 떠나보내기 위해 봄바람은 어제 그렇게 불었던 모양이야.

불어라, 바람.

하루종일 플라타너스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둥치에 아로새겨지는 빛의 이름들은 무엇일까 생각했던 것 같아.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슬플 정도로 하늘은 푸르렀어. 사물들 위로 하오의 햇빛은 집요했지만 바람 탓인지 낮 최고 24°C, 그런 날이면 말이야…

그런 날이면 말이야…

This Post Has 10 Comments

  1. 후박나무

    사진에 담긴 안개 낀 아침 풍경이 참 서정적입니다.

    욕심으로부터 마음이 고요해지려면 얼마나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요?
    오지 않을 미래의 일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

    1. 旅인

      서정적이지만 맑은 날 바라보는 저 상자집과 주변의 풍경은 을씬년스럽기만 합니다.

      한번도 자제해보지 않았던 저로서는 고요한 마음이 어느 싯점에 가능한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저도 후박나무님처럼 아득한 일처럼 느껴지기만 합니다.

      생각이 생각하고 눈이 눈물을 흘리고 몸이 춤을 추고 배가 밥을 먹는 어느 날, 문득 마음이 고요해 있으려나요?

  2. 아톱

    이번에 방을 구하면서 제 자신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느꼈었어요.
    나이가 들면 욕심이 좀 줄어들까요?

    사진과 같은 아침을 늘 맞이할 수 있다는 것도 복인 거 같습니다.
    홍천의 어느 절이 생각나는 군요.

    플라터너스가 뭔지 몰랐는데.. 몇번을 다시 읽고선 내일 한 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旅인

      플라터너스는 서울의 거리에 가지가 잘려져 전봇대 모양으로 서 있는 껍질을 헐벚는 가로수입니다. 흉물스럽게 생겼지요. 하지만 가지가 잘려지지 않았을 때 이렇게 멋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 곳의 풍경은 산을 빼고는 대충 허물어지는 풍경입니다. 저 사진의 풍경도 맑은 날 보면 그다지 볼 만하지는 않습니다.

  3. 위소보루

    홀씨가 왈칵 쏟아진다는 구절과 하오의 햇빛이 집요하다는 표현이 무척 좋습니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슬 가득한 아침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논밭에서 건초를 태우는 냄새가 나는 것도 같습니다.

    1. 旅인

      이제 이슬이 장미넝쿨 위에 맺히는 오월이네요.

      간혹 이 곳의 새벽에는 도시의 북서쪽에 있는 피혁공장에서 무두질에 쓰는 크롬이 섞인 공해물질을 배출해내는 탓인지 아침의 축축한 공기 속에는 머큐로크롬 냄새와 같은 것이 섞이곤 합니다.

      다행이 저 사진을 찍는 아침에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홀씨가 너무 날려서 먼지 같았던 하루였습니다.

  4. 흰돌고래

    몇일 전에 엄청난 홀씨들이 허공을 떠돌아 나니고 아스팔트 위로 나뒹구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같은 날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정도로 심하게 씨들이 날리는 걸 처음 봐서 첨엔 황사가 심한 줄로 착각했지 뭐에요.
    플라타너스 씨들이었나봐요.

    하오가 언젠지 몰라 검색해봤네요. ㅎㅎ
    나무둥치에 아로새겨지는 빛의 이름들을 알게 되신다면, 제게도 알려주세요 🙂

    1. 旅인

      아마 그 빛의 이름을 제가 지어주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오를 기준으로 해가 떠오르는 아침 나절을 상오, 해가 지는 오후를 하오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오가 벌써 사용하지 않게 된 낡은 단어가 되어버린 모양입니다.

      홀씨들이 아스팔트 위에 누런 솜처럼 엉켜있습니다.

      5월에 부는 바람은 여름을 몰고 온다고 하더군요. 바람이 심하던 날들에 홀씨들이 멀리 멀리 날려갔기를 바랍니다.

  5. 리얼리티

    바람부는 날… 나무를 바라보면
    나뭇잎 사이사이로 바람이 왔다갔다 하는 모양새가 보여서
    잊고있던 이야기까지 생각이 나서 목이 아플정도로 쳐다볼 때가 있어요.
    저 많은 잎들이 한결같이 움직이는 모습에…대단하네…하면서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에 있다는 건…자유네요.

    1. 旅인

      자연 속에 비닐봉지 하나 만 굴러다녀도 결코 자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 곳은 인공과 자연이 난잡하게 얽혀 있는 곳이라서 엉성하고 들떠있습니다.

      아침 안개가 그런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을 뒤덮어 감춰주었던 아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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