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비디오를 보는 아침

M-net에서 뮤직비디오를 방영하고 있다. 

EXO가 절제되고 화려한 춤을 춘다. 그들의 손짓이나 동작에는 헛짓(본질이 아닌 허울)이 많다. 그들의 춤의 본질, 젊은이들을 열광케 하는 EXO 춤의 본질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가소롭지만 본질은 없다. 그 헛짓이야말로 EXO 춤의 전체다.

망사스타킹을 신은 여인의 늘씬한 다리에 매료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매료된 것이 다리가 아니라, 망사스타킹일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한다.

다음에 방송된 씨스타의 뮤직비디오는 그것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노래를 듣기 위하여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씨스타의 춤을 보기 위하여 노래를 듣는 것이다.

하지만 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몸의 굴곡과 풍만함을 보여주는 것이 춤이라는 점을 우리는 놓치고 있다.

그러니까 뮤직비디오는 우리의 욕망 위에다 허울과 착종된 문법으로 갈증을 문신해내고 있는 셈이다.

“춘추시대 때 위(衛)나라의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 복수(濮水) 근방 뽕밭에서 들었다는 그 음악은 나라를 망칠 음악이다. 예악으로 다스려야 할 정치가 개판 오분전이 되고 백성들이 유랑하게 될 것이며, 윗사람을 속이고 모두 이기심에 입각하여 행동하여도 이를 막을 방도가 없다” 1桑間濮上之音 亡國之音也. 其政散 其民流 誣上行私而不可止也고 예기 19편 악기(樂記)에 기록되어 있다.

This Post Has 6 Comments

  1. 아톱

    예전에는 친구도 그랬고 저도 그랬고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나만의 세계를 독특하게 음악과 어울리게 표현하고 싶기도 했고 진한 드라마를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음악과 어울리는 음악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게 뮤직비디오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그게 아닌 거 같아요.
    그래서 잘 안 보게 되네요.

    1. 旅인

      이성의 산물인 과학이 참단에 첨단을 달리면서 아무래도 그 반대편의 감정들 또한 이렇게 감각적으로 표출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감각적인 세상 속에서 눈길을 끌기 위해서는 더욱 감각적이고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러한 감각의 제국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는 음악이 중심이었는데 이제는 음악이 춤에 종사하고 춤은 몸을 보여주는 그런 것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2. 지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천병희 선생님께서 옮기신 것으로 읽고 있습니다. 하나의 책에 아리스토텔레스 뿐만아니라, 플라톤의 시학 부분도 같이 옮기셨더라구요. <국가> 제 10권의 앞부분을 시학으로 따로 빼내어 옮겼다고 적혀있습니다.

    마지막에 옮겨적으신 ‘예기 19편 악기’ 부분을 읽으니, 오늘 아침 출근길에 읽었던 플라톤의 시학에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생각이 나서 옮겨적습니다.

    “또한 애욕과 분노에 관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동에 수반되는 욕망과 고통과 쾌락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시의 모방은 이런 것들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똑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시들어 없어져야 하는데도 시는 이런 것들에게 물을 주어 가꾸고 있으며, 사악하고 비참하게 되는 대신 선량하고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지배해야 하는데도 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의 지배자로 만들고 있으니까 말일세.” “따라서 글라우콘, 자네가 호메로스야말로 헬라스의 교육자이므로 모든 인간사를 정돈하고 계발하는 데 있어 이 시인의 말을 들춰 배워야 하며 자신의 생활을 이 시인을 따라 정리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호메로스의 찬미자들을 만난다면 그들도 나름대로 가장 선량한 자들이므로 사랑해주고 공손히 대해주지 않으면 안 되네. 그리고 호메로스가 가장 시인다운 시인이며 비극 작가의 제 1인자라는 사실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되네. 그러나 시 가운데 국가 안으로 받아들여져도 좋은 것은 신에 대한 찬가와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찬사뿐이라는 사실도 또한 알고 있어야만 하네. 자네가 서정시를 통해서든 서사시를 통해서든 쾌락적인 무사 여신을 받아들인다면 그 국가에는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인정되어온 법률과 원칙 대신 쾌락과 고통이 군림하게 될 것이네.”

    그나저나 트랙백을 걸고 싶었는데 왜 안되는 것일까요ㅜㅜ

    1. 旅인

      제가 트랙백을 달아보았는데 저도 지현님의 블로그에 트랙백이 걸리지 않습니다. 아직 댓글차단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제 차단이 잠시 풀렸다가 다시 차단이 걸렸습니다.

      제가 이웃분들의 글에 댓글을 달고 싶다면 제 블로그에서 로그아웃을 하고 여인이라는 익명 대신 이류라고 쓰고 홈페이지 주소를 삭제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댓글은 제 블로그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무연고의 댓글이 되어 이웃분이 답글을 달아도 알 수가 없습니다.

      지현님의 글을 보니 원전을 읽어가며 철학에 접근하고 있는 것 같아 몹시 부럽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고 있으나 플라톤은 시조차도 미메시스로 보고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을 디오니소스적인 혼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플라톤의 음악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자는 모름지기 젠틀맨이란 “시로써 마음을 흥탕하게 하고, 예로써 자신을 세우며, 음악으로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하며 원시유가에서는 인간의 칠정(감정)이란 굳이 배우지 않아도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고 이를 억제하는 것보다 어떻게 이런 감정들이 조화를 이루느냐를 더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시의 관저편을 평하며 “즐거워도 질탕하지 않고 슬퍼도 상심을 하지 않는다(樂而不淫 哀而不傷)”고 즐겁고 슬픈 인간이 감정에 대해 긍정을 하면서도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예기의 악기편은 음악과 인간이 감정에 대한 인문음악서라고 할 수 있는데, 상간복상지음은 듣기에는 미칠듯이 좋지만 백성들의 감정들을 뒤틀어놓아 음란과 쾌락을 절제하지 못하여 결국 망국에 이르고야 말게 된다는 가장 극단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락이불음 애이불상은 우리나라의 락이불류 애비불비로 이어지며 정형화되고 재미없는 궁중아악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대중의 음악인 창과 같은 것에는 즐거움에 즐거움이 더하고, 슬픔에 슬픔이 더하여 더욱 짠해지는 것이 우리의 음악이 아닌가 합니다.

  3. 지현

    트랙백도, 댓글도 안된다면 제가 열심히 다녀야겠습니다.ㅎㅎㅎ

    능력이 된다면 헬라스어를 읽어가며 접근을 해보고도 싶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서 먼저 번역을 해주신 분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단어 몇 개만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어원적으로 접근해보려고 노력하고 이러쿵 저러쿵 생각 해보기만 할 뿐 입니다.

    한국어로 시詩라는 단어를 (일단은) 사용하고 있는데요, 그 어원 포이에시스poiesis:제작, 만듦에 근접한 단어를 골라 ‘예술’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리듬, 선율, 글자, 색, 선, 동작 등)가 다를 뿐이지 창작을 해내는 그것에 대한 입장은 플라톤이 시에 대해서 말을 하든, 음악에 대해서든, 그림에 대해서든 동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각각(시, 음악, 그림 등)에 대한 생각이 저마다 달랐다고 해도, 제가 이해하기에는 그렇습니다.(더 배워가다보면 어느순간 이 생각이 부끄러워질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ㅋㅋ)

    디오니소스적인, 그러니까 쾌락과 어떤 즐거움과 행복만을 쫓는 것에 대해서 플라톤은 이를 경계하라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무엇을 미메시스(모방, 묘사, 흉내)하는 것이 정말로 좋은 미메시스라고 할 수 있는가’, ‘디오니소스(쾌락)를 위한 미메시스는 올바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플라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 했던 것 같습니다.

    써주신 원시유가 부분은,
    감정적인 부분은 굳이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는 자연스러운 본성으로부터 있으니 억제보다는 조화를 추구해야한다는 말로 보았습니다.

    공자의 말에서도 음악으로 완성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예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과의 조화를 위한 약속으로 보아, 예를 갖춤으로 자신을 세우고(기준), 마음을 정돈하며 정갈하게 적은 시(아폴론,이성)와 선율(디오니소스,감성)을 조화(외적 조화와 내적 조화)를 통해 자신을 음악(시와 선율의 조화)으로 완성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말이 어버버 나오는걸 보니 앎이 거의 없는 모양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좀 더 공부를, 생각을 해봐야하겠습니다.ㅋㅋㅋ

    제가 여기에 살면서도 부끄럽게도, 우리나라 고전음악보다는 서양의 고전음악에 더 친숙한데요, 정형화 되고 재미없는 궁중음악을 바흐의 음악으로 보고, 감정을 위주로 하는 민중의 음악을 쇼팽의 음악으로 비교하여 보고 있습니다. 무언가 골똘히, 계산적으로 생각해야할 때는 바흐의 음악이 (집중하여 듣지는 않아도) 편하게 느껴지며, 어떤 감정에 대한 위안, 동질감(또는 증폭)은 쇼팽에서 많이 얻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테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보다 남들과 비슷하려는, 평균에 있으려는 조화는 조화지만 감정적 조화에 너무 치중하여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빠르고 큰(자극적인) 자극에만 반응하며 그것에 익숙해져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예술, 문화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문득, 옆에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미메시스 된 것으로부터 위안과 위로를 찾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게 아닐까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덕,인,신뢰)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국가는 오래 전부터도 염려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무언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데, 다들 옛날 이야기들을 까먹었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혹은 서양사상의 어떤 흐름을 타고 이지경이 되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는걸까 슬쩍, 생각해보기도 하고요ㅎㅎㅎ
    동양사상이든, 그리스 고전이든, 사서삼경이든, 불교사상이든, 토테미즘이든, 샤머니즘이든 관심갖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4. 旅인

    일단 이론지를 추구하는 서양철학, 실천지를 추구하는 동양철학, 경험지를 추구하는 종교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지를 추구하는 서양의 경우 언어가 너무 도구화되고 관념화되어 골치가 아프게 되었고 여유가 없다는 점, 동양의 경우는 진리와 같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 대신 철학이 문학적이거나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고 종교적 경험지는 절대적인 체험에 도달하기가 힘들다는 점 등이 단점이 될 것 같습니다.

    원시유가보다 물활론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의 고대사유 자체가 인위보다 자연(감정)을 우위에 두고 있습니다. 중용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天命之謂性)이라고 할 때 性은 아마 인간 본연의 품성(자연)일 것입니다. 동양의 이러한 性을 따르는 것이 바른 실천의 길(率性之謂道)이라고 하고, 이러한 실천의 길을 바로 하는 것이 바로 가르침(修道之謂敎)이라고 합니다. 인위란 자연의 조화와 북돋는 방향으로 가지런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음악으로 완성한다(成於樂)는 것에 대해서 저도 의문이지만, 주자집주에 달린 성리학의 천재들의 주석을 보아도 석연치는 않습니다.

    주자는 “음악이 노래와 춤, 악기의 마디(기준)이 되고 사람의 성정을 기를 수 있으며, 마음 속 나쁘고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거칠고 둔탁한 것들을 녹여낼 수 있기 때문에 배우는 것의 끝이며, 의로움의 정수와 어짐이 익는 것에 까지 이르는 까닭에 스스로 도와 덕에 화합하고 이끌리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이로부터 그를 얻어야 하며 이것이 배움의 이룸이다”고 합니다.

    정자는 “옛사람들의 락이란 성음은 귀를, 채색은 눈을, 영가는 성정을, 무도는 혈맥을 키우지만,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음악으로 완성한다(성어락)를 이룰 수 없다. 이 까닭에 옛날에는 인재를 키우기가 쉬웠으나 지금은 어렵다”고 하지만

    공자의 본의에 대한 이해없이 어거지로 주석을 달았다는 느낌만 강합니다.

    저의 어거지 해석이 더 나은 것 같은데, http://yeeryu.com/797 의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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