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 앙겔로풀루스의 영화

그의 영화를 다 보고 싶었어. 잰 체하며 이야기하기에 가장 적당한 영화거든. 하지만 두 편만이라도 본 것은 다행이야. 그의 영화는 너무 심각하거나 너무 과장되었어. 심각해야 된다는 것 때문에 과장된 그런 영화지. 어떤 내용인 지는 모르지만 ‘율리시스의 시선’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더군. 그래서 꼭 보고 싶어.

그의 영화는 모두 길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더군.

1. Eternity and A Day

영원과 하루의 마지막 장면

관람실 안에는 나를 포함, 세 사람인가 네 사람이 있었어. 한참 영화가 상영되고 깜빡 졸다가 깨어났을 때 세번째 앞 줄에 앉았던 여자가 가방이며 옷이며 주섬주섬 집어들더니 “질기다, 참. 이 재미없는 것을 아직까지 보고 있니? 졸리지? 너희들도 집이나 가.”라고 말하는 듯 쿵쾅거리며 나갔어. 시계를 봤어. 아직도 영화는 아직도 1시간 10분이나 남았더군. 30분 쯤은 더 졸아도 괜찮을 것 같았어.

<영원과 하루>

둘 중 넌 무엇을 고를래?
나는 하루를 고를꺼야.
왜?
영원은 지루할 꺼 같아.
하루는?
모든 날들 중 단 하루같거든.

<영원 그리고 하루>

이 하루는 영원이 끝나는 마지막 하루, 아주 오래 기다렸던 하루였고 흘려보내선 안되는 아껴 써야만 하는 하루일 것 같아. 영원보다 더 긴 하루.

이 영화는 두 시인에 대한 이야기야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시인과
모국어를 모르고 모국어로 시를 쓰고 싶었던 시인에 대한
즉 불행했던 시인들을 이야기했어

바울이 편지를 보냈던 도시, 데살로니키는 중력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논문같았어. 건물들이 기울고 문짝이 비틀어지는 것 정도가 아니었어. 벽에 칠한 칠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질 것처럼 비늘을 이루고, 균열이 침식한 도시의 색은 잿빛이었어. 안개 속에 소실된 거리의 끝으로 가보면 거대한 싱크홀 속으로 도시가 추락하고 있을 것만 같았어.

개를 누구에겐가 맡기려고 나타났던 노시인은, 개 대신 도시의 외곽에서 만난 아이와 거리를 배회하게 되지. 내전 중인 알바니아 난민 아이랬어.

사랑을 모르는 시인은, 아이에게, 모국어조차 모르면서 무작정 고국으로 돌아온 19세기의 시인, 솔로모스에 대해서 이야기했어. 외국어로 시를 쓰다보면 마려운 오줌처럼 모국어로 된 시를 쓰고 싶을 것 같긴 해. 모국어를 모르는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하여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글쎄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단어들을 샀다는 거야

23000원 짜리 단어와 520원 값어치의 단어들로 시를 쓴다면…
문학도 자본주의적이 되는 것이지, 원가가 23520원인

크아악 투에이!

아이를 알바니아로 데려다 주기 위해 노시인은 국경으로 갔어. 국경에는 고압의 전류가 흐르는 높은 철책이 있었어. 국경의 관문에는 그리스 병사들이 담배를 피고 있는데, 높다란 철책에는 월경을 시도하다 감전된 시체들이 널려있었어. 날이 밝았다면 나는 그들이 자신의 삶을 볕에 말리고 있다고 생각했을꺼야. 하지만 날은 흐렸어. 눈발이 간간히 뿌리기도 했지.

문득 철책에 널려 있던 시체 중 하나가 움직였어. 매달려 있기가 지겨운 엑스트라가 움직였을 지도 몰라. 하지만 앙겔로풀루스의 교묘한 연출일지도 몰라, 국경선의 철책에 감전된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있는 장면이 과장이며, 현실이 아니라는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아이를 시체들이 널려 있는 국경선 너머로 보낼 수는 없었을거야. 시인은 아이를 데리고 데살로니키로 돌아오지. 밤이 까맣게 몰려온 항구에서 시인은 아이를 배에 태워 보내. 내전이 한창인 알바니아로 말이지. 가보았자 거기에는 아이의 할머니는 물론, 아무도 없는데도 말이야.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시인은 자신을 사랑했던 아내를 떠올리며 마지막 하루를 맞이하는 것 같았어. 영원 그리고 하루 중 마지막 날을 말이지.

참고> 영원과 하루

2. Landscape in the Mist

Eleni Karaindrou의 Adagio

엘레니 카라인드로우의 아다지오가 흘러나와. 알비노니나 사무엘 바버의 ‘아다지오’ 모두 처절하긴 하지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까지는 밀고 가지 못했어. 2분 26초라는 짧은 시간에 아다지오라는 속도로 절망에 당도할 수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아. 음악이 지닌 처절함의 무게에 비하여 시간이 짧다는 것은 그런 점에선 다행이지.

안개는 풍경 속에서 나오지만, 풍경을 삼켜버리지. 안개 속의 풍경은 안개가 걷히면 풍경이 드러날 것이라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무엇이 나타날 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불안이기도 하지. 누나와 동생은 그리스 내륙을 가로질러 자신들의 아버지가 있다는 게르마니아(독일)로 가고 있었어.

아버지가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을 엄마는 후회하지만, 아빠를 찾아 떠난 아이들이 탄 기차는 그만 도시를 벗어났어. 아이들은 열차가 게르마니아로 가냐고 물었지만, 승객들은 아이들에게 대구하지 않았어. 설령 관심을 갖는다고 해도 이미 기차는 ‘아무 곳’이란 곳으로 떠나고 말았던 거야.

세상이 아이들의 상상보다 너무 넓다는 것을 단지 불행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은

“사랑하는 아빠,
우린 낙엽처럼 여행하고 있어요.”

라고 말했어.

땅에 껍질처럼 붙어 있다가도 바람이 불면 날려가 마른 땅 위를 구르는 것.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몰랐던 것 같아.

아이들은 가는 길 위에서 멈춰선 것들을 보았어. 눈이 내리는 것을 보는 정물화된 사람들, 극단을 잃은 유랑극단의 사람들이 바다가에서 옷을 말리며 꼼짝도 않고 바다를 바라보는 행위. 광야에서 길은 외줄이었다가 갈라지고 또 갈라졌어.

길 위에서 아이들은 트럭에 올라탔고, 전날밤 식당 여자 종업원에게 무시를 당한 트럭 운전사는 누나 불라를 짐칸으로 데려가 강간한 후, 트럭을 몰고 떠났어. 동생 알렉산더는 뭐가 뭔지 모른 채 울기만 했어.

그 후 불라는 오레스테가를 만나 연정을 느끼지만, 그는 동성애자였어. 불라는 세상의 사랑이란 것이 폭력적이거나 공허한 것을 안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즈음 알렉산더는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던 것 같아.

“태초에 어둠이 있었어. 그 후에 빛이 만들어졌지.”

우리는 태초를 빛으로 알고 있지만, 아이들은 태초가 어둠이었다는 것을 안 모양이지? 결국 거룻배를 타고 국경을 넘은 아이들을 캄캄한 어둠이 노려보았어. 몇발의 총소리가 나고 그만 조용해졌어.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왔지.
안개만 가득했어.
아침 바람에 안개가 밀려가는 지 언덕에 흐릿하게 나무 한그루가 보였어.
그 나무 쪽으로 안개와 같은 아이들이 걸어가고 있는거야.

거기가 게르마니아였을까? 아니면 천국과 지옥, 어디도 아닌 영원한 안개 속의 풍경이었을까?

참고> 안개 속의 풍경

This Post Has 3 Comments

  1. ree얼리티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네요.
    흑백의 톤으로 정리된 영화같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노시인과 아이, 낙엽같은 남매들이 사는 세상은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라
    바라보는 시선마다 허공인 회색빛 같을거라는 …
    “태초에 어둠이 있었어. 그 후에 빛이 만들어졌지”
    나무 한 그루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1. 旅인

      저도 모르지만, 나무가 없다면 언덕에 멈춰설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어디엔가 멈춰서야 할 곳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 ree얼리티

      아이들이 멈춰설 곳…나무같은 존재

      하늘을 날고싶은 새에게 나무는 없어서는
      안 될 안식처 겠네요.
      나무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나무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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