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들이-C

1C.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 안, 합, 니, 다, 라고 다섯개의 음절로 명확히 갈라질 경우, 대개는 미안하지 않다는 것으로 들린다. 정말로 미안할 경우 소리는 입 안에서 웅얼거리거나, 미에서 다까지 모두 한 데 섞이더니 한음절의 긴 소리가 된다. 그 소리는 울음같기도 하고 울음이기도 하다.

2C. わび

명품적 취향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은 와비(わび)이다. ‘띠풀을 엮어 만든 암자에서 마시는 차’ 1草庵の茶 로 대표되는 리큐(千 利休) 화상의 와비란 ‘간소한 속에서 발견되는 맑고 한적한 정취’ 2和敬淸寂 였다. 맑은 차와 더 이상 간소할 수 없는 격조를 간직한 다구들, 거기에 스며든 정성과 고요한 시간들이야 말로 명품이 이루어지는 요소다. 한 화상의 와비적 이상이 조선의 도공들이 두루미로 엮여 왜국으로 끌려가게 된 이유다. 간소한 찻잔 하나에 대한 욕심이야말로 엄청난 양의 점토와 유약, 노동력과 장작을 낭비하고 깨진 그릇들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여자는 사내에게 말했다.

“가마에서 꺼낸 그릇들이 웃는 소리를 들었어. 도자기가 식을 때 겉에 바른 유약이 실금처럼 터지면서 나는 소리랬어. 밤새도록 별들이 웃는 것 같은 소리를 냈어.”

아주 조용한 밤에 유빙렬이 세밀하게 난 찻잔에 차를 따르면, 찻잔이 소리를 낸다고 한다. 실금 사이로 차가 스미는 소리란다. 그래서 오래된 찻잔에는 차의 색깔이 배여 있기 마련이다.

3C. 감정의 실체

“당신의 슬픔은,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슬픔,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그런 외로움같았어요.”

4C. 그림같은 글

때때로 글을 읽다보면 그림같은 글이 있다. “편의점이 생기고 나서 부터 한밤중에도 나의 육신이 불을 환히 밝히게 되었다는, 쉴 줄 모르게 되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정진규의 시를 읽은 후, 새벽 세시에도 편의점은 열려있다는 것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하얗게 밝혀진 자신의 육신을 귀신이 어두운 골목 안에서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풍경도 떠올랐다.

사내는 혹시 아는 얼굴의 귀신이 아닐까 궁금했다.

5C. 편지

아이는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 오랜시간동안 문맹의 상태에 빠져있던 사내는 불과 하루 이틀만에 동급생이 읽고 있는 모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휘면에서도 다른 아이들보다 오히려 앞서 있었다. 그는 책을 읽었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말을 하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난독증에 시달렸던 아이는 편지 때문에 커서는 선택적 실어증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사내의 편지는 사악할 정도로 진실같은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기도 했다. 여자는 사내의 편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편지를 읽으며 기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사내의 가장 큰 잘못은 아무 내용이 없는 글로 여자를 울고 웃게 했다는 것이다.

6C. 얼굴과 이름의 흔적

여자들은 얼굴을 고치고 싶어한다. 또 자신의 이름이 마뜩찮다. 얼굴을 고치고 이름을 바꾼다면, 자신은 여전히 나(我)이겠지만, 타인에게는 낯선 사람이 된다. 결국 한 사람의 자아는 한 개인의 내적 체험에 대한 해석학적 산물이다. 얼굴과 이름이 바뀐 타인을 해석하여 누구라고 조립해내기란 힘들다.

사내가 여자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이름을 개명하고 딴 여자가 되었던 탓이다. 헤어진 애인을 찾는다면 이름보다 유용한 것은 주민등록번호다.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믿을 수 있는 방법이라곤, 이제는 DNA의 염기서열과 6자리+7자리로 이루어진 주민등록번호 외에는 없다.

여자는 이름을 서현으로 바꿨다. 하지만 사내는 여자가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엄지손가락의 뭉뚝한 손톱으로 부터 서현이라는 여자가 그 여자라는 것을 다시 조립해낼 수 있다. 미소한 상처와 몸의 한쪽 구석에 있는 조그만 점이야말로 10년전에 잃어버린 어린 아이를 대표하는 제유적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내는 여자들의 엄지손톱을 보는 훔쳐보는 습관이 있다.

7C. 죽음에 대한 책임

열대어를 기른 적이 있다. 물도 갈아주고 먹이도 알맞게 주었는데 조그만 열대어는 일년이 안되어 죽고 말았다. 아이는 자기의 잘못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생애가 1년에 불과한 그 열대어의 사인은 노환이었다.

아무리 해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아이처럼 자기 탓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행이다.

8C. 꿈

사내가 잠의 끝자리를 더듬자 여자는 하얗게 비어있다.

여자는 툇마루에 앉아 무릎 위에 얼굴을 올려 놓은 채 바다를 보는 것 같다. 좁은 어깨 너머로 아침이 온다.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 밑에서부터 서서히 밝아지다가, 수평선에서 빛이 자글자글 끓기 시작하더니 아침이 해안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뭘 보고 있는거야?”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떨어졌던 것 같다.

“꿈을 꾸었어. 헤어지는 꿈을…”
“그런데 우리가 있는 곳이야말로 꿈이야. 여기는 육허 3六虛 : 상하동서남북 라는 꿈이지.”

여래께서는 모든 것은 꿈이 물거품의 그림자를 빚어내는 것과 같다 4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고 말씀하신다.

– 이상 –

This Post Has 8 Comments

  1. 후박나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공유하지 못하는 3C의 글이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비는 내리지만 후덥지근한 날씨가 이어지네요.ㅠ
    더운 여름이 시작되려나봅니다.
    지치지 마시고 건강한 여름 보내시길 바래요^^

    1. 旅인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서 다행입니다.

      어제 서울은 33도 길을 걷다보면 녹아서 길에 늘러붙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장마가 빨리 지나가야 할 텐데 소식이 없네요.

      아무튼 여름을 잘 보내십시요.

  2. 아톱

    정말 멋진 글이 그림같은 글이 아닐까요.
    누구나 보아도 쉽게 읽히고 눈 앞에 글이 그려지고 오래 잔상에 남아있는 그런 글이요.
    요즘은 책을 못 읽고 있어 그런 멋진 경험을 못하고 있네요.
    독서의 계절이 기다려지는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해요.

    요즘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 법문을 듣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마지막 글을 자꾸 되읽게 되네요.
    겉으로 훑는 수준이지만요.^^;

    1. 旅인

      정진규의 시는 상업자본주의에 유린된 시간(밤)을 몸으로 그려내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글은 금강경 사구게 중 마지막 구절 앞 부분에서 빌려왔습니다. 통상의 번역은 “모든 유위(有爲)의 법(法)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와 같으며”라고 되어 있으나 제 나름대로
      고쳐 해석했습니다. 유위의 법과 같은 것을 무위의 법인 실상계와 반대되는 현상계 등으로 해석을 해서 불자들의 이해를 도와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은 예수님의 일생처럼 드라마틱하지 않아 재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3. ree얼리티

    가을은 연습을 하면 가을나무와 친해질 수 있을까요?

    실금 사이로 차가 스미는 소리.
    그래서 오래된 찻잔에는 차의 색깔이 배어있기 마련이라는 글이
    찻잔에 새겨진 고운 빛깔을 닮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하네요.
    여름이 물러가는 끝자락의 시작은 이르게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굴리는 바람입니다.

    1. 旅인

      가을연습은 자신의 내면, 고독과 친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리얼리티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세상의 모든 것들과 친해지는 것이기도 하네요. 실금 사이로 차가 스미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아침도 바람은 시원합니다.

    2. ree얼리티

      찻잔을 보고 있으면 들릴 것 같아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녀온 소리는 들리고
      들리는 소리는 지녀온 색으로 보이면서
      함께 한다는 것이 그리움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을까요?

    3. 旅인

      천년묵은 나무가 마치 영혼을 가진 것 같듯이…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탄 물건들은 자신의 모서리를 깍아가며 손에 익어버리고 함께 한 사람의 냄새를 담을 것이라서 색과 소리, 감촉 모두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잠시 떨어져 있으면 금새 그리움을 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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