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들이-B

B1. 가을연습

사무실에서 묵묵히 창 밖을 내다보거나, 종이 위에 뭔가를 쓰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퇴근을 한 후에는 시내로 나가 기억을 더듬으며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사내는 도시의 한쪽 귀퉁이에서 홀로 저녁을 사먹거나, 집으로 돌아가 거실 창에 하얗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보며 늦은 저녁을 먹는다.

Fall Practice, Sonata D minor No 13 : 2, adagio

B2. 사실들

그때 사랑이 아니었다고 해도, 지금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해도, 그래서 거짓이고 단지 꿈일 뿐이라도, 괜찮아요. 슬펐던 것은 당신의 편지가 아니었어요. 단지 어렸고 슬펐을 뿐입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무엇인지 몰랐던 탓이지요. 다가가려고 했는데, 다가갈 방법을 몰랐던 것이 슬펐습니다. 저는 당신을, 당신은 저를, 어쩌지 못하여 안절부절하였지만, 그런 서로를 위로하지 못했지요. 우리는 서툴렀지만, 그 서투름과 떨림이야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어요. 하지만 아직도 사랑이라는 게 뭔지 저는 모르고 있군요. 그때 우리는 행복했을까요? 그랬다면 지금 함께 살고 있겠죠. 그때 행복했는지 지금은 아득하지만… 모든 것이 행복했다고 기억날 뿐, 잘 모르겠어요. 행복했던 순간들이야말로 지금은 그리움이라는 고통으로 변해버린 것 같아요.

이 대화들은 사실이었을까? 그 시절 그토록 간절했을까? 그때는 왜 몰랐으며, 왜 말하지 못하였을까? 그토록 간절했으면서도 어쩌자고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것인가?

B3. insist

“존재의 반대가 비존재가 아니라 존속이라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존속하며, 존재하기 위해 노력한다” 1실제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37~38쪽 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 경우(존재) 그 사랑은 흘러가버린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경우(비존재) 그 말을 하지 못했다는 후회로 존속한다. 사랑한다고 말한 사랑은 흘러가버리지만, 말하지 못한 사랑은 멈춰서서 결국 추억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우리는 진정으로 어떤 사건을 잊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내어 그것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 2실제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37쪽 는 말은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사내는 추억할 수는 있지만, 기억해낼 수는 없다.

B4. 자웅동체

달팽이나 지렁이들은 두마리가 서로 껴안고 정자를 토해내고 받아들이며 생식을 한다. 자신의 내부에 암 수의 생식기관이 다 있음에도 사랑을 통하여 서로 다른 정자를 교환한다.

조선의 임성구지(林性仇之)는 두가지의 성기(兩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받아들였고, 그는 아내와 밤을 보냈다. 사람들은 임성구지를 사형해야 한다고 했지만, 명종은 “괴이한 물건이지만 인간의 목숨이 지중하니 외진 곳에 두어 인류와 섞이지 않게 하라”고 한다. 사형을 처해야한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두가지 성기를 가지고 남녀를 넘나들면서 여자의 쾌감과 남자의 쾌감을 모조리 누렸다는 것, 행위가 끝난 후의 공허함과 불만족이라는 비밀을 모조리 알아버렸다는 것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아니었을까?

최초의 인간인 아담 카드몬(Adam Kadmon) 또한 양성동체라고 한다. 그 안에서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이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임성구지가 자기를 껴안고 자신에게 사정을 하지 못하는 반면, 아담 카드몬은 자신을 포옹하고 입맞추며 섹스를 하고 엑스타시를 느끼며 모든 것을 방출하는 것이다. 신이란 어쩌면 이런 절정과 혼란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아인소프(무한 혹은 비존재의 존재)의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져 있고 사람의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신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사내는 홀로 침대에 누워 여자가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양성동체이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다면 밤마다 침대에서 세피로트가 자라났을 것이다.

B5. 관찰

연인들의 양태를 이삼 일간 만 지속적으로 관찰하면, 사랑이 재미없다는 것을 투명하게 알 수 있다. 유치하고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남녀가 유치한 것은 그 마저도 없으면 더 이상 사랑을 유지할 수 없는 탓이다.

B6. 추억

추억이란 아름다왔던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무료한 현실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지금이 무료한 만큼 추억은 반짝이도록 날조되는 법이다.

B7. 무관심

여자 친구의 탈춤공연이 있었다. 사내는 생각없이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여자가 다니는 학교의 강당에 들어섰고,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박수갈채와 함께 무대 위로 꽃다발을 든 남자들이 우당탕 몰려들었고, 우르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소란이 끝나자, 탈바가지를 머리 위로 올린 여자들이 꽃다발을 들고 활짝 웃었지만, 여자만 빈손으로 서 있었다. 여자의 당황한 모습을 본 사내는, 자신의 잔인함이란 소외감을 여자가 느끼게 했을 뿐 아니라, 무관심이야말로 모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넌 왜 나같은 놈을 만나고 있는거니?”

“너에겐 나 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이 꽃 향기가 참 좋다. 이름이 뭐야?” 뒤늦게 사내가 사온 꽃다발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으며 여자가 물었다.

사내가 고작 기억해낸 것이라곤 그 꽃다발이 만이천원이라는 것이다.

This Post Has 2 Comments

  1. 아톱

    사랑은 청춘과 같지요.
    사랑을 바라보는 시절엔 그것이 무언지 모르고 사랑을 하는 중에는 그것이 귀한 줄 모르고 사랑을 놓쳐버린 시절은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그래서 둘다 안타까움만 가득한 것 아닐까요. 그 순간을 100%살지 못했으니까요.

    1. 旅인

      충족된 것과 완성된 것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 지워집니다. 항상 결여된 것, 이루지 못한 것이야말로 유령처럼 우리에게 달라붙어 그리움과 갈증을 유발하게 마련이라고 합니다. 오일륙으로 좌절된 사일구의 망령이 오일팔 광주민주항쟁으로, 미완의 오일팔 항쟁이 육십 민주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게 되며, 충족되지 못한 사랑이야말로 결핍을 채우려고 추억을 주장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추억이야말로 그 순간에 100% 올인하지 못했다는 반증인 셈이죠.

      그런데 충족되고 완성된 사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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