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체결합 우리말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통해 정조는 무엇을 이루려 했던 것일까? 패관소품을 금하고 아정한 고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고집하는 정조의 속내를 알 길이 없다.

말(語)과 말(言)들의 전쟁에 대해서 쓴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 “전하, 지금 성 안에는 말(言)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 또한 말(馬)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은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라고 최명길은 묻는다. 반면 후금 누르하치의 아들인 칸(홍타이지)은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고 한다.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라고 칸은 글을 쓰는 문한관들을 꾸짖었다. 문한관들은 멋진 문장보다 또박또박 쓰기 위해 땀을 흘렸다.

MB 정권을 지나, 박근혜 정부에 이르면서 도덕성과 정부에 대한 신뢰를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말은 썩어있다.

말이 썩어있을 때, 그 말에 어떻게 믿음이 묻어날 수 있으며, 뜻과 뜻이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여 대동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전임과 이번 정권에서 ‘유체이탈 화법’이 이야기되고 있다. 이는 ‘말을 하고 있는데, 정작 말하는 자는 없는 고도로 세련된 대화 방법’을 말한다. 이 뿌리없는 말은 주체가 없고, 책임도 없으며, 마땅히 말이 이루어야 할 결말마저 없다. 아무 것도 없이 말만 겉돈다. 흘러나오는 말은 현란한 데, 말의 내부는 텅비어 있다. 의미없는 말과 글은 기괴하고 추악하다. 그래서 후보 때 내걸었던 공약과 지금 집행되는 정책 사이에 계보를 지을 수 없다. 교회에서 그가 한 말과 신문에서 네가 쓴 글과 총리 후보로 서 있는 나와는 무관하다. 말과 자신이 견련되지 못하면, 말만 무너지고 썩는 것이 아니라, 나마저도 썩고 분열되는 것이다. 결국 분열된 내가 말을 해도 거기에 나는 없다. 그래서 영혼없는 말들이 저자거리를 떠돌고, 나라는 썩는다.

이렇게 망한 우리말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나라에서 공부 잘해서 판 검사도 하고, 말 잘해서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 영어도 아닌 우리말로 쓰여진 남북정상 간의 대화록을 읽고 ‘NLL 포기 발언’이 있는 지 없는 지 분간조차 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말로 교회에서 강연한 똑같은 화면을 보고 신문에서 같은 글을 읽은 처지에, 한쪽에서는 반민족적이라고 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애국자라고 한다면, 우리말이란 더 이상 서로의 뜻을 소통하는 공능을 상실하고 니 말과 내 말로 불화할 뿐이다.

특히 현대의 문한관이라고 할 언론인이 쓰고 한 말을 놓고 나라 전체가 옳다그르다 반목하게 되었다면, 대한민국의 언론이 그 간에 한 일이란 사실을 펴서 내지른 것이 아니라, 권력과 돈과 언론사주의 주먹 앞에서 말을 접고 꼬깃꼬깃 구겨 아무도 사실과 그 속내를 알지 못하도록 호도하는 것 아니었나 싶다.

말이 망하지 않도록 그래서 나라와 겨레가 망하지 않도록, 아정한 우리말을 살리기 위하여 제2의 문체반정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더 이상 유체이탈하지 못하도록…

20140627

댓글을 달려다가…

어떤 말을 들었는데 그 뜻을 알지 못하거나 석연치 않을 경우, 우리는 자신의 이해력이 딸려서 상대의 의사를 갈파하지 못하거나, 혹은 상대가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현상이 있으면 그 배후에 반드시 어떤 실체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대충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외설적인 수준에 이르면, 현상과 실체의 관계가 붕괴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역으로 말씀드린다면 현상과 실체의 맥락이 찢어지는 틈이 바로 더럽고 추잡한 지점이라는 것입니다. 그 지점에서 실체는 하얗게 사라지고 현상 만이 남습니다. 실체가 없는 현상이란 한마디로 허울이며, 허울은 현상보다 더욱 현란한 법입니다. 허울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허울을 통해서 있지도 않은 괴물(실체)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건국 이후 공산주의, 사회주의자가 아닌, 실체를 알 수 없는 빨갱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매도하고 죽여왔던가 하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라고 매도하기에는 두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은 개념규정이 명료하기 때문에 매도하려면 팩트(사실)를 바탕으로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점을 논증(논리)해내야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상 및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 내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배척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며,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헌법의 수호해야 할 민주주의와 양립불가한 사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정체가 없는 허울, 빨갱이를 만들어냈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들을 솎아냈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을 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고 등지게 했는지는 잘 알 것입니다.

이렇듯 실체가 없는 것은 있지도 않으면서 공허하게 떠돌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 입니다. 그것은 라멜라(아메바가 아닌 심리학에서 말하는)라는 단세포의 생물체처럼 어떤 반박 논리나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형태를 적절히 변형시켜나가며 자신의 목적을 수행해 나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단어가 어떤 개념에 정박하지 않고 떠 다니다가 적절한 자리가 있으면 거기에 붙어 피를 빨아대다가 숙주로 부터 적절한 영양을 흡수했다 싶으면 떨어져 다시 떠 다니기도 합니다.

사실 어떤 권위있는 사람(전문가, 정치가, 부모, 상사)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할 경우, 우리는 통상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거나 그들의 말이 전문적이거나 아니면 표현이 서투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느낌 상으로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경우, 대부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화일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어떤 그룹의 회장은 항상 자신의 직원들이 거짓말을 하고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을 달고 다녔습니다. 회장의 거짓말의 정체를 알고 보면, 직원들이 상사나 손님에게 하는 “다 되어갑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는 의사소통을 위한 의례적인 말들 입니다. 회장인 자기 앞에서 “기다리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탱자탱자 놀고 있습니다”라고 말해 달라는 것인데, 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 달라는 요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직원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의 논리에 따르게 되면 대화는 불가능해집니다. 회장의 말대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일차적으로는 재털이가 날라갈 것이고, 그 다음엔 ‘본인의 원에 의하여 직위를 면함’이라고 인사발령이 날 것입니다. 왜 그가 직원들의 거짓말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분석해보면 이렇습니다. 다른 그룹 총수들에 비하여 공부도 잘했고, 그룹을 물려받은 후 딴 짓거리도 않고 불철주야 열심히 일을 했건만, 그룹 사세가 확장되어나가기 보다 물려받기 전에는 규모가 작았던 다른 그룹의 한 회사만도 못한 찌질한 그룹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기 싫었던지, 아니면 찌그러드는 원인을 몰랐던지, 찌그러들어 마침내 그룹이 사라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그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불안과 무지, 무능을 회피하기 위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된 모든 전말이 직원들의 거짓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직원들에겐 회장의 말이 공허했고, 회장의 말이 떫떠름한 만큼 회장의 목소리는 가파라졌지만, 직원들은 오늘도 거짓말 타령이라며 자신의 상사에게 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제가 몸 담았던 프로젝트의 경험을 말하자면, 외부에서 영입되어온 프로젝트 매니저와 회의를 자주하게 되는데, 그녀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ERP 경험이 없던 저는 처음에는 그 쪽 부문에 경험이 없는 탓에 이해를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두 달 석 달이 지나도록 이해가 가지 않았던 저는, 회의에 같이 참석하던 ERP 경험이 많은 친구에게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겠다. 뭘 알아야 면장이라도 해먹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자신은 ERP를 아는 처지에 누구에게 프로젝트 매니저의 말을 이해를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끙끙 앓고 있다고 하더군요. 결국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된 것은 제가 무지해서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ERP의 주변 일을 오랫동안 했으면서도 정작 ERP가 뭔지 핵심에 한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한 사람이 마치 아는 것처럼 ERP에 대해서 떠들어댔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프로젝트가 흘러가는 동안 일의 맥락과 무관하게 모든 일이 해석되고 지시되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것 때문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프로젝트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그녀의 모든 말들은 무지 뿐 만 아니라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쪽으로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이해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프로젝트가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외부에서 데려온 전문가인 그녀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프로젝트를 오히려 혼란에 빠져들도록 했습니다. 결국 프로젝트의 의사결정은 밑의 부하직원들이 자기 책임 하에 자율적으로 해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이 공허해지는 이유는 인간의 상식이 가닿을 수 없고 가 닿아서는 안되는 것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극단적이고 황당한 경우는 말하는 자기가 사라지는 경우입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욕하면’ 자기 주제를 모른다고 지랄이라도 하겠지만, ‘똥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욕하면’ 지랄조차 못할 만큼 황당해집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체이탈 화법이란 결국 도둑이 법의 이름으로 준엄하게 도둑을 심판하고, 강도가 강도를 잡으러 다니고, 적폐가 적폐를 향하여 비수를 들이대는 형국이지요. 그러니 말만 무성하되, 도둑은 창궐하고 강도는 더욱 세련되고 적폐는 착찹하게 쌓여가게 마련입니다.

결국 정조가 도모했던 ‘문체반정’이란 열하일기 등의 표현에 치중한 감각적이고 참신한 것을 수용하기 이전에, 성현들이 뜻(意)를 전하기 위하여 썼던 고문으로 돌아가야 말(言)이 바로 서고, 말이 바로 설 때, 나와 너, 올바름과 그름이 나뉘어지는 것을 바탕으로 도덕이 바로 서고, 나라가 반듯해질 것이라는 경세치국의 방략 속에 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정조의 방략이야말로 꿈꿔볼 수 있는 보수의 혁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This Post Has 10 Comments

  1. 아톱

    최근에 홍명보 감독도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더군요.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어요. 말하는 자신은 알까? 질문하고 다른 말을 하네.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정치인들이 말을 그렇게(?) 하는 데에는 어떤 더러운 의도가 있다고 느껴지거든요. 실제 자기 생각을 몇겹의 포장지로 감싸고 휘둘러서 자신은 말의 뒷방 구석으로 숨어 피하고, 실제 있지도 않은 말로 상대를 모욕하는… 가상의 적을 끊임없이 만들고 상대를 깎아 내려 스스로를 올리려 하며… 그래서 저는 말을 잘하는 것을 크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은 꾸밈이 너무 많아서 피곤해요. 저도 지금 그러고 있지만(-.-) 한마디만 해도 충분한 걸 너무나 미사여구가 많네요. 현실에 사는 우리들이 전부 소설가는 아닌데 말이에요.

    1. 旅인

      댓글을 달려다가 그만 말이 길어져 본문 아래에 길게 달았습니다.^^

    2. 아톱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그 분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겠네요.
      때로는 체면같은 건 벗어도 될 텐데 말이죠.
      모르는 건 모른다 할 수 있는…
      그럴 사람 자체가 아니었겠지만요.

    3. 旅인

      그녀에 대해서는 한번 포스트에 올린 적도 있습니다. 솔직하면 될텐데 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만, 누구나 임금님이 발가벗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침묵하는 것과 발가벗었다고 누군가 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이 실력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실력이 있다고 그 자리를 차지한 만큼, 자신이 사기를 쳤다는 선언과 다름없기 때문에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녀 때문에 고생한 것보다는 비굴한 조직의 생리를 다시 한번 목도했다는 점이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2. 후박나무

    내부가 텅비어 있는 공허한 말들…
    모두들 뭔가 중요한 것을 어딘가에 두고 멍해진 상태로 이것저것 토해내는 거 같아요.ㅠㅠ

    1. 旅인

      사실은 의미없는 여과되지 못한 감정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말들이 많지요. 단지 적대적인 말들…

  3. 플로라

    그분과 비슷한 그분이 비슷한 일을 비슷하게 하고 계십니다….
    떠받들고 엎드려 큰절하며 눈물흘리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요?
    그분을 구해야 나라가 산다는 사람들…알면서도 그러는 거겠죠.

    하나마나한 결론이지만 정조가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했다면 역시나 오래 살았어야 했다는…거.
    이해는 할수있겠어요. 현재의 관점에서 왜곡되고 다르게 이해되는 것을 그 글이 쓰였던 당시로 돌아가 당시의 현실, 시대상을 기반으로 판단하는 거. 아무것도 아닌거 같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마치…문창극이 김대중의 신앙고백을 언급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러한 신앙고백이 나오기까지, 서로 처한 상황과 시대적 배경이 다르죠. 그들이 즐겨쓰며 왜곡하고 속이는 성공률높은 기법기기도 하고.
    그런걸 경계하고자 한 의도라면 문체반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1. 旅인

      호가호위하려면 설령 잇빨이 빠졌더라도 호랑이는 있어야 하며, 사람들을 속이려면 제일 먼저 자신이 속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책임을 면하고자 지껄이는 유체이탈화법이나 개념이나 관념에 뿌리내리지 못한 단어들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믿을 수 없는지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을 가리기 위하여 한번 뱉은 말에 대하여 얼마나 집요하게 집착하는지도 말입니다. (…의) 앞 날에 대한 꿈도 비젼도 없이 권력에 대한 무한 욕망만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황폐로 타인을 피폐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크로체의 말이나, 전통은 전통을 말하기 순간 구축되기 시작한다는 것처럼, 아무리 해석학적 방법을 통하여 追 體驗의 노력을 한다고 해도 과거에 대한 해석은 결국 현재에 사는 개별적인 실존적 존재의 경험을 통해 재해석되는 만큼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일 뿐 만 아니라, 새로운 사실이 발굴되고 새로운 의견이 제시되면 역사와 정신문화는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고쳐져 나가야 한다는 숙명에 처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교학사 교과서나 지금 우리나라의 이병도의 후학들이 문제되는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과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이 묵수했던 역사를 허물고 사실에 입각하여 기존의 역사를 재해석하고 부단히 새롭게 써나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흐름이기 때문에 논리맥락에 따른다면 전혀 외울 필요가 없는데, 우리나라의 역사는 사대강처럼 보 때문에 흐름이 막히고 모래톱에 정화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썩어 흐름을 거스르고 있어서 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문창극씨가 교회와 언론, 강의 등에서 한 말을 언론이 잘라 왜곡보도를 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말이 나오게 된 상황과 중요한 말과 글은 전체 문맥을 놓고 다시 그 말과 글의 실체를 더듬어보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국민들이 그의 단편적인 글과 말일지언정 문창극이라는 전체 맥락을 파악했다는 것을 여당과 정부, 그리고 문창극은 무시한 것이죠.

      그런데 왜 정조는 문체반정을 도모했던 것일까요?

  4. 플로라

    저도 왜 문체반정을 도모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문제반정을 놓고보면 다산에 대한 이제까지의 평가가 좀 의문스러워지곤 합니다.
    공부가 짧아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요.

    1. 旅인

      다산은 고증학을 공부한 경학의 대가인 만큼 패관소품보다는 고문에 길들어져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노론계의 실학자들로 천주교를 믿는 남인들과 퉁치자는 것이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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