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페스토와 호모사케르

1. Maniesto

오랫만에 ‘공산당선언’을 읽었다. 1989년판인 이 책은 가격이 2,200원이다. 아마 ‘공산당선언’은 해금된 1980년대 읽었을 것이고, 이 책은 줄이 쳐진 것으로 보아 1990년대 어느 날 읽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부분’이라는 레닌의 도론부터 독일어판에 붙이는 1872년과 1890년의 서론을 거쳐 꽤 꼼꼼하게 이 ‘선언’을 읽었다.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과 민주화가 막 시작된 1990년대에 읽을 때만 해도, 이처럼 처절하고 스산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재벌의 차입경영과 관치금융의 부실에서 비롯된 1997년 12월의 ‘IMF 구제금융’ 이후, 책임은 진원지인 재벌과 금융권에 돌아가기 보다, 오히려 가계부문이나 중소기업, 자영업자들에게로 전가되었다. IMF 이전의 가계부문의 저축을 바탕으로 한 기업부문의 부채는, IMF 이후에는 무역수지의 흑자에도 불구하고, 가계부문의 적자, 중소기업 및 자영업이 괴멸되는 가운데, 삼성, 이-마트 등 재벌 대기업 중심으로 한 방대한 흑자구조로 이어진다. 이런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에 넘어간 것 같습니다”(밑의 참고)고 선언한다. 그 이후 정말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시장에 넘어간 그림자를 드리웠다.

군부독재의 시대가 아님에도,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한진중공업 등에서 국가의 공권력의 보호 범위 안에 노동자(국민)는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는 시장이(자본주의가) 민주주의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법 앞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결코 평등할 수 없다는 반증이거나, 법의 외설적인 측면이 과다하게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선언’ 속에는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 The working men have no country”라고 쓰여 있다. 이 말뜻은 자본주의에서의 국가는 자본을 대변할 뿐 노동자를 대변하지 않는 기구라는 뜻이자,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에 종속되기보다는 인터내셔널을 지향한다는 의미이겠으나,

나에게는 말 그대로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로 받아들여졌다.

2. Homo-Sacer

우리는 법이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작용하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작 법이 작동하는 지점에 우리가 서게 될 때, 법이 나에게 공정하게 집행되리라고 믿을 수가 없다. 다른 신을 믿지 않고, 간음하지 않았다면 – 혹은 않는다면- 모세의 십계가 존재할 수 없듯이, 법은 불법과 범죄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폭력적(집행은 법이 금하는 사형, 폭행, 구금 등)이다. 그리고 (우리가 공정하게 집행되리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는 만큼 나마저도 갖은 수단으로 부당하게 연줄을 놓으려고 하는 만큼) 집행되는 절차 또한 돈과 권력의 네트워크 속에서 외설적일 수 밖에 없으리라는 가정은 사실처럼 늘 존재하는 것이다. 단지 외설적인 현실을 우리는 모르는 척 할 뿐이다. 이런 외설적인 현실을 인정하고 까발린다면 정의라는 가면마저 벗어버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말이다.

평소에는 늘 법의 존재 자체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불가해하고 (미지의 폭력을 지닌 것으로 예상되는) 타인으로 부터 ‘나’를 지켜주리라는 믿음 속에 살지만, 우리가 직면하는 법의 모습은 국정원 댓글 사건, 용산참사, 간첩증거조작 사건에서, 법의 적극적인 표현인 최저생계비 지원 등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일당 5억원짜리 황금노역에서 목도하듯이, 우리의 기대와 딴 판으로 돌아간다는 외설적인 현실 만 마주하게 된다.

호모 사케르는 법의 층위에서 배제된 자들이다.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닌 존재들이다. 그래서 법 질서 외부에 있는 자들이다. 주민등록증이 없거나 말소된 자, 혹은 국가를 전복하려는 세력으로 국가 내부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세력, 유가려씨처럼 탈북자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중간지대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이들은 “벌거벗은 사람”이며 이들 “법과 자연이 식별되지 않는 영역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국가의 본성”이라고 한다. 여기에 보편적인 인권은 작동하지 않는다. 죽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산 자가 아니기에 그러하다. 그래서 이들은 공권력에 의해서 함부로 취급당해도 된다는 것이며, 필요에 따라 간첩으로 선언되고, 간첩인 만큼 어떠한 반대되는 증거나 진술도 교활한 공작인 만큼 국가 권력은 이 공작을 분쇄하기 위하여 증거를 조작을 해서라도 반드시 간첩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사명에 들뜨기도 한다.

문제는 호모 사케르는 존재 자체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타자(국가나 법)에 의하여 호명될 뿐이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가 서 있는 지점은 “법과 자연이 식별되지 않는 영역”인 셈이다. 자본주의가 작동해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며 국가가 기능하기 때문에, 노동자의 쟁의는 국기를 문란하고 전복하기 위한 행위라는 것이다.

3. Proletarians

문제는 지금 시대에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내포와 외연을 갖는가 이다. 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는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 밖에 없다” 1The proletarians have nothing to lose but their chain고 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고 풍요롭다. 이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의식과 자본에 대한 적대가 없다. 이들이 적대하는 세력은 자신의 일자리를 넘보는 외국인 노동자, 하청노동자, 그리고 일자리에 혈안이 된 실업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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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이 말은 ‘2005.07.05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시책 점검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말로 기사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다. 그러니까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김용철 변호사가 언급한 ‘국가권력이 삼성으로 넘어갔다’는 맥락은 아니다. 중소기업에 대한 대책도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이나 시책으로 풀어나가기 보다 시장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이겠지만, 이제 이 말은 김용철 변호사의 ‘국가권력이 시장을 대표하는 재벌에 넘어갔다’는 식으로 밖에 해석이 안된다.

중소기업과 함께 가는 대책도 시장에서 이루어져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시장에서의 여러가지 경쟁과 협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정부는 시장을 공정하게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정부가) 중소기업 정책을 하면서 나름대로 기여한바 있겠지만 지금 정책 현실이 정부 정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는 판단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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